9월 30일(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영광 저녁 산책길에서 저 멀리 주인과 함께 나온 강아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게로 다가와 내 냄새를 맡더니 마치 제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거처럼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주인이 이름을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고 핥고 그랬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와 한동안 놀았다. 주인이 와서 그를 안아 데려가서야 그 놀이는 끝나고 손을 닦을 수 있었다.
복잡하고 마음 아픈 하루 끝에 찾은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까지 골치 아프고 속상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음 내려놓을 데가 없으니 그나마 찾아갈 곳은 자연의 품뿐이었다. 그곳은 하느님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가 강아지 모습으로 내게 와서 하느님 말씀을 전해줬다, 수고했다고 기뻐하라고.
무죄한 이들이 받는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부르며 하소연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세상이 왜 이렇고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참 좋으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 왜 악이 넘쳐나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빚으신 사람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예수님 제자들이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따졌던 걸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가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는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고, 가장 큰 분이 가장 작은 자가 되셨다. 죄 없는 분이 죄가 되셨다. 그분은 반대하고 고발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그들의 표적이 되셨다. 인간의 거짓, 억지 고발, 그리고 폭력을 당신의 몸으로 다 받아 안으셨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느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알지만 이해할 수 없다. 믿지만 잘 모른다. 그분과 함께하고, 그분과 같은 처지에 있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강아지 천사, 십자가 수난과 죽음, 하느님의 영광 등 이 모든 얘기가 뜬구름 잡는 일이다.
예수님,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저야 제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런 처지가 되면 제 죄에 대한 보속이라고 기쁘게 받아 안지만, 주님은 어떻게 그런 일을 다 견디실 수 있었습니까? 주님은 참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두렵고 떨리지만 오늘도 아드님 계신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