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살아야 하는 이유
죽는 거보다 못한 삶이 있는 거 같다. 그러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겠지. 자살은 큰 죄다. 생명은 내 소유가 아니고 희망을 버렸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리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이해는 한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했을까. 자살이 아니라 병사(病死)다.
욥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 사이에 그 엄청난 재앙을 겪은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욥 3,3). 그런데 그는 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욥 3,20.23)”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아 있어야 한다고 느꼈던 거 같다. 죽을 수 있지만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느님 말씀대로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었기(욥 1,8).” 때문이었다.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라서 죽고 싶어도 죽지 않았다.
반면에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주 잘 아시면서도 그리로 들어가셨다. 그분이 영화에 나오는 거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신 말씀과 행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거를 지켜보니 당신은 살해당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실 수 있었다. 그 수난과 죽음을 피하는 길은 당신이 삶을 바꾸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진리란 그런 것이다. 죽게 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거다. 그래서 순교는 진리에 대한 증언이다. 세상이 진리를 대하는 첫 번째 태도는 거부와 폭력인가 보다. 시메온이 아기 예수님을 두고 한 예언을 기억한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십자가는 하느님의 구원과 인간의 폭력이 만나는 자리다. 주님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다.
고통은 죄의 결과다. 내 죄, 아니면 너의 죄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이다. 알지만 우리는 억울하다. 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라서 그랬고, 약해서 그랬다. 하느님이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이 당신이 잘 돌봐주셔서 그런 거라고 했다. 이에 하느님은 그의 주장대로 그를 시험해 보라고 욥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 단, 그에게는 손대지 못하게 하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욥 1,12).” 예수님도 유혹받으셨고 시련과 극한 고통을 겪으셨다. 불의하고 억울한 죽임까지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요한 19,36; 탈출 12,46; 민수 9,12).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라는(요한 19,37)” 성경 말씀도 이루어졌다(즈카 12,10). 사탄은 유혹하고 죄짓게 해서 서로에게 폭력을 저지르게 하고 고통을 줄 뿐 내 생명에는 손댈 수 없다.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29). 설령 고통을 못 견디고 죽는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아직 단련이 다 끝난 게 아니다. 연옥 단련이 남아 있다. 죄 없는 분이 먼저 그 길을 가셨으니 죄 있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로마 1,4).” 선하신 하느님이 만든 세상에 왜 악이 있는지, 왜 고통이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 믿음을 더욱 굳건하고 깊고 순수하게 만드는 은혜로운 시간이라는 건 안다.
예수님, 시련을 은혜로운 시간이라고 여기는 게 쉽지는 않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그 길을 통해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셨으니 저도 그렇게 하면 주님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가 계셔서 인내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