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頓煌本 六祖壇經의 禪思想(1)_돈황본 [육조단경]의 선사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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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국 禪宗史(선종사)에서 禪을 般若(반야)의 虛宗(허종)으로 새롭게 전개한 선구자가 菩提達摩(보리달마)이며 또한 慧可(혜가)의 禪이 攝山三論宗系(섭산삼론종계)의 習禪者(습선자)들과의 結緣(결연)으로 한층더 强化(강화)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神會는 禪 그 자체의 입장을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로 하고 있으며 또 그 實踐的(실천적)인 입장으로 새롭게 頓悟見性說(돈오견성설)을 結合하여 종래의 全佛敎(전불교)를 禪(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으로 歸結(귀결)시키고 있는 점은 중국 禪思想史上(선사상사상)에서나 불교의 역사에서 볼 때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높게 평가해야 한다.
敦煌本 [六祖壇經]에서 강조하는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이나 頓悟見性說(돈오견성설)은 이러한 神會의 사상을 繼承(계승)하여 새롭게 六祖慧能(육조혜능)의 說法으로 再編(재편)된 것이라는 禪思想史的(선사상사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다시 壇經에서 설한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의 내용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26段)
여러분들을 위하여 摩訶般若波羅蜜法(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여러분들이 비록 생각하더라도 깨닫지 못하니,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설하니 각자 잘 듣도록 하라. 摩訶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밀)은 西國(서국)의 梵語(범어)인데, 唐言(당언)으로선 '大智慧(대지혜)로써 彼岸(피안)에 이른다'란 의미이다.
이 법은 모름지기 행하는데 있는 것이지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다. 입으로 외우고 행하지 않음은 마치 幻化(환화)와 같으며, 수행자는 法身(법신)이나 부처와 동등한 것이다. 무엇을 摩訶(마하)라고 하는가? 摩訶란 크다(大)는 뜻이다. 心量(심량)이 廣大(광대)하여 마치 虛空(허공)과 같은 것이다.
空心(공심)으로 앉아선 안 된다. 이는 곧 無記空(무기공)의 虛無(허무)에 떨어지는 것이다.(虛空은) 능히 日月星辰(일월성신)과 大地와 山河, 一切의 草木·惡人·善人·惡法(초목·악인·선인·악법)이나 善法(선법), 天堂(천당)이나 地獄(지옥)을 모두 다 空中(공중)에 포용하고 있다. 世人의 本性(본성)이라는 虛空(허공)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27段)
本性(본성)이 萬法(만법)을 包含(포함)하는 것이 바로 큰(大)것이며, 萬法(만법)이 모두 바로 自性(자성)인 것이다. 一切의 사람이나 사람이 아니거나, 惡과 善, 惡法이나 善法을 보더라도 모두 다 버리지도 않고 또 그것에 染着(염착)하지도 아니하며, 마음이 마치 虛空과 같은 것을 크다(大)고 한다. 이것이 바로 摩訶行(마하행)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 외우지만 智慧(지혜)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빈 마음(空心)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큰(大)것이라고 하나 이것 역시 옳지 못하다. 心量(심량)이 크다고 할지라도 行하지 않으면 적은(小)것이다. 입으로만 헛되이 말하지 말라. 이 행을 닦지 않은 사람은 나의 弟子(제자)가 아니다.
이상 26, 27段에서 摩訶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밀)과 摩訶(마하)에 대해서 禪佛敎(선불교)의 입장에서 獨自的(독자적)인 觀心釋(관심석)으로 설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觀心釋(관심석)이란 禪佛敎의 實踐的(실천적)인 입장에서 經典(경전)의 의미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中國禪宗(중국선종)에서 자주 實行(실행)되고 있다.
특히 여기서 摩訶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을 일단 正統的(정통적)인 解釋(해석)으로 '大智慧到彼岸(대지혜도피안)'이라고 설명한 뒤 입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수행으로 전개할 것을 강조하면서
'수행자는 法身과 佛과 同等(동등)하다' 혹은 '摩訶의 行을 닦지 않은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까지 강력하게 설하고 있는 것은 禪佛敎(선불교)의 정신이 어디까지나 實踐佛敎(실천불교)의 입장에 있음을 端的(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摩訶를 설명함에 단순히 '크다'라는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心量(심량)이 廣大(광대)하여 虛空(허공)과 같다'하고 虛空은 日月星辰(일월성신)과 山河大地·一切法·天堂·地獄(산하대지·일체법·천당·지옥)까지도 다 포용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本性도 허공과 같이 一切의 萬法을 수용하고 있다고 觀心釋(관심석)으로 설하고 있다.
즉 摩訶의 큰 뜻을 허공에 비유하고 또다시 그 허공을 인간의 本性으로 확대 해석하여, 우리들의 本性으로 확대 해석하여, 우리들의 本性이 허공과 같이 크고 넓어 一切의 萬物을 포용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心性이 허공과 같다'는 말은 華嚴經(화엄경) '寶王如來性起品(보왕여래성기품)'(T.9-614 中)에서도 설하고 있으며, 또 七卷 [楞伽經(능가경)] 卷6에도 '心性은 원래 淸淨(청정)한 것, 마치 깨끗한 허공과 같다'(T.16-626 中)라고 설하고 있는 말에 依據(의거)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壇經(단경)에서는 앞(14단)에서 인용한 것처럼
'허공과 같이 맑은 심성에 菩提般若(보리반야)의 智慧(지혜)가 작용하고 있으며, 一切(일체)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智慧(지혜)를 本來具足(본래구족)하고 있다'고 强調(강조)하고 있다. 또한 30段에도 '本性에 스스로 般若의 智가 있어 智慧(지혜)로써 觀照(관조)하기에 문자를 빌리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사실 自性(자성)에 般若(반야)의 智慧(지혜)가 具足(구족)되어 있다는 주장은 南宗禪(남종선)의 般若主義的(반야주의적)인 頓悟見性說(돈오견성설)의 根據(근거)이기도 한데 이는 涅槃經;열반경 및 梵網經;범망경 등에서 주장하는 '一切衆生 悉有佛性(일체중생 실유불성)'·'自性淨心(자성정심)'이라는 佛性思想(불성사상)과 般若空思想(반야공사상)의 實踐思想(실천사상)으로 멋있게 조화시켜 이룩한 것이다.
또 華嚴經(화엄경) 卷51 [如來出現品(여래출현품)]에 '일체의 모든 중생이 모두 如來의 智慧를 具有(구유)하지 않은 자가 없지만 단지 妄想(망상)으로 顚倒(전도)되어 집착하여 이를 證得(증득)치 못할 뿐이다. 만약 妄想(망상)을 여의면 一切智·自然智·無碍智(일체지·자연지·무애지)가 곧바로 現前(현전)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法華經(법화경)의 方便品(방편품)에서는 一切衆生(일체중생)이 모두 成佛하게 될 것과 衆生이 佛知見(불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부처님이 出現하게 되었다는 유명한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을 설하고 있는데 이러한 大乘佛敎(대승불교)의 根本思想(근본사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壇經(단경)의 禪思想(선사상)은 단순한 번뇌퇴치의 修定主義(수정주의)나 瞑想(명상)의 實踐(실천)을 강조하는 狹義(협의)의 禪宗(선종)의 主張(주장)이 아니라 佛陀(불타)의 根本精神(근본정신)을 되살리려는 佛敎思想(불교사상)의 本質的(본질적)인 입장에 있다.
그리고 '마음이 허공과 같다고 하여, 空心(헛된 마음)으로 앉아 있다면 이것은 無記空(무기공)의 虛無(허무)에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의시키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無念·無心說(무념·무심설)의 誤解(오해)를 잘 지적한 것이다.
허공과 같이 無心하게 한다고 함은 아무 생각없이 허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그 어떤 하나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크고 넓은 작용을 말한다.
여기 27段에 '일체의 人이나 非人, 惡이나 善, 惡法(악법)이나 善法(선법)을 보더라도 모두 버리지 않고 포용하면서 (一切의 境界)그 어디에도 染著(염저)하지 아니하여, 마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을 크다(大)고 한다'라고 摩訶(마하)를 無心의 실천으로 觀心釋(관심석)하고 있음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無心의 사상은 壇經(단경)에서 강조하는 般若의 실천인 無念·無住·無相·無縛(무념·무주·무상·무박)의 가르침과 똑같은 構造(구조)인데 이 점은 뒤에서 再考(재고)하자.
壇經(단경)에는 앞의 摩訶의 설명에 이어서 '般若波羅蜜'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28段)
어떤 것을 '般若'라고 하는가? 般若는 곧 智慧이다. 一切時中(일체시중)에 念念(념념)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智慧를 행하는 것을 般若行(반야행)이라고 한다. 一念이 어리석으면 般若는 끊어지고 일념이 智慧로우면 般若는 살아난다.
(世人은) 心中이 항상 어리석으면서도 스스로 나는 般若를 닦고 있다고 말한다. 般若는 形相(형상)이 없지만 智慧(지혜)의 本性(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을 '波羅蜜(바라밀)'이라고 하는가 ? 波羅蜜(바라밀)이란 말 역시 西國(서국)의 梵語(범어)인데 唐言(당언)으로 '피안에 이르다'란 뜻이다. 이 뜻을 알면 生滅(생멸)을 벗어나지만, 境界(경계)에 執着(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난다.
물에 波浪(파랑)이 있으며 此岸(차안)에 있는 것과 같고, 境界(경계)를 벗어나면 생멸이 없으니 마치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를 到彼岸(도피안)이라고 하며 波羅蜜(바라밀)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 외우지만 智慧(지혜)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이 일어날 때 妄念(망념)이 있지만, 그 망념은 眞實(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念念으로 행하는 것을 眞實이라고 한다.
이 법을 깨달으려면 般若의 법을 깨닫고 般若行(반야행)을 닦아야 한다. 修行(수행)하지 않으면 凡夫(범부)요, 一念(일념)으로 修行(수행)하면 法身(법신)이나 부처와 동등하다.
여러분! '煩惱(번뇌)가 곧 바로 菩提(보리)'이다. 前念(전념)이 迷(미)한 즉 凡夫(범부)요, 後念(후념)에라도 깨달은 즉 佛이다.
여러분! 摩訶般若波羅蜜(마하반야바라밀)은 最尊(최존)이며 最上(최상)이며 第一이고 無住·無法·無來(무주·무법·무래)이다. 三世諸佛(삼세제불)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마땅히 大智慧(대지혜)로써 彼岸(피안)에 이르고, 五陰(오음)의 煩惱(번뇌)와 塵勞(진노)를 打破(타파)해야 한다.
最尊·最上·第一(최존·최상·제일)은 最上乘(최상승)을 讚歎(찬탄)한 것이다. 最上乘法(최상승법)을 修行(수행)한다면 틀림없이 成佛(성불)한다. 無法·無住·無來(무법·무주·무래)는 바로 定慧(정혜)가 平等(평등)하여 一切法(일체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三世諸佛(삼세제불)도 여기에서 나왔으며, 三毒(삼독)을 바꾸어 戒定慧(계정혜)로 하였다.
여기 般若(반야)의 실천으로써 '一切時中(일체시중)에 念念히 어리석지 않고 항상 智慧를 행하는 것이 般若行(반야행)'이라고 規定(규정)하고 있는 一節(일절)은 사실 南宗頓敎(남종돈교)의 禪思想(선사상)의 本質(본질)이다.
이것은 壇經(단경) 16段(단)에 '一行三昧(일행삼매)란 一切時中(일체시중)의 行住坐臥(행주좌와)에 있어서 항상 直心(직심)을 행하는 이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一段과 똑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의 一行三昧(일행삼매)는 南宗禪의 實踐思想(실천사상)을 설하고 있는데, 자세한 점은 뒤에서 再考(재고)하겠지만, 直心(직심)은 즉 智慧(지혜)의 本性(본성)을 의미하는 維摩經(유마경)의 말이다.
사실 이러한 南宗(남종)의 般若의 實踐(실천)은 일찍이 身體(신체)를 앉혀 놓고 마음을 수습하는 北宗의 修定主義(수정주의)의 坐禪(좌선)과 禪思想(선사상)을 四句(사구)의 格言(격언)으로 묶어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었던 확실한 思想的(사상적)인 根據(근거)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南宗(남종)의 獨自的(독자적)인 坐禪(좌선)의 理致(이치)나 새로운 坐禪(좌선)의 定義(정의)가 이러한 般若思想(반야사상)의 實踐(실천)에서 주장될 수 있었다.
行住坐臥(행주좌와)의 日常行(일상행)을 모두 禪이라고 주장하는 南宗의 行動禪(행동선)이 뒤에 祖師禪(조사선)의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고 斷言(단언)한 日商 生活佛敎(일상 생활불교)에의 새로운 길을 열어놓는 사상사적 의의를 看過(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波羅蜜(바라밀)을 설명하는 곳에 '물과 波浪'을 예를 들어 설하고 있는 一段과 '煩惱卽菩提(번뇌즉보리)'는 彼岸(피안)에 이르는 具體的(구체적)인 實踐行(실천행)의 例를 大乘經典(대승경전)의 설법에 依據(의거)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과 波浪(파랑)'은 楞伽經(능가경) 卷2의
如水大流盡 波浪則不起 (여수대류진 파랑칙불기)
如是意識滅 種種識不生(T. 16-496 中) (여시의식멸 종종식불생)
라고 하는 偈頌(게송)에 의거한 말인데, 此岸(차안)과 彼岸(피안)을 갈라놓은 물이 다 흘러가 버리면 此岸이 그대로 彼岸이 된다는 말이다. 此岸이나 彼岸이 원래 둘이 아닌 것처럼 마음이 境界(경계)에 집착되지 않고 妄心(망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妄心이 일어나지 않는 본래의 根源的(근원적)인 마음이 그대로 波羅蜜(바라밀)이며 彼岸(피안)에 이른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妄心(망심)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境界(경계)에 끄달려 집착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이 집착에서 벗어나면 바로 본래의 眞心(진심) 그대로가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인 것이다.
그리고 '煩惱卽菩提(번뇌즉보리)'는 유명한 維摩經(유마경) 第3品의 舍利弗章(사리불장)의 宴坐(연좌)를 설한 一段(일단)이다.
夫宴坐者 不於三界現身意 是爲宴坐 (부연좌자 불어삼계현신의 시위연좌)
不起滅定 而現諸威儀 是爲宴坐 (불기멸정 이현제위의 시위연좌)
不捨道法 而現凡夫事 是爲宴坐 (불사도법 이현범부사 시위연좌)
心不住內 亦不在外 是爲宴坐 (심불주내 역불재외 시위연좌)
於諸見不動 而修行三十七品 是爲宴坐 (어제견불동 이수행삼십칠품 시위연좌)
若能如是坐者 佛所印可(T.14-539 下) (약능여시좌자 불소인가)
維摩經(유마경)의 宴坐는 大乘(대승)의 坐禪精神(좌선정신)을 說(설)한 것인데 神會(신회)는 이를 北宗攻擊(북종공격)의 창으로 應用(응용)하고 坐禪方便(좌선방편)을 빌리지 않는 南宗頓敎(남종돈교)의 思想的 根據(사상적 근거)로 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주목되는 말이 '煩惱를 끊지 않고 涅槃(깨달음)의 境地에 드는 것을 宴坐'라고 한다'는 大乘佛敎(대승불교)의 實踐構造(실천구조)이다. '煩惱卽菩提(번뇌즉보리)'의 주장은 壇經의 42段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란 것은 깨달음의 實現(실현)을 방해하는 번뇌도 그 主體는 淸淨(청정)한 自性(자성)인 것이다.
또한 이를 벗어나서 별다른 佛法이 있는 것도 아니며 번뇌나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번뇌가 곧 열반'인 것이다. 이 역시 앞에 인용한 楞嚴經(능엄경)의 '물과 波浪'의 비유와 똑같이 大乘佛敎의 實踐構造(실천구조)를 說한 것이다.
따라서 한 생각 어리석으면 凡夫(범부)이지만, 한 생각에 깨달으면 부처이다.
범부나 부처가 원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華嚴經에서는 '心·佛·衆生(심·불·중생) 이 셋은 원래 差別(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T.9-465 下)'라고 說하고 있으며, 一切衆生(일체중생)이 모두 부처님의 智慧(지혜)와 德相(덕상)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말도 똑같은 大乘佛敎의 思想인 것이다.
그리고 摩訶般若波羅蜜은 最尊(최존)이며 最上이며 第一 云云이라고 하는 一段은 앞의 最上乘을 論한 곳에서도 言及(언급)한 것처럼 壇經의 30段에도 인용하고 있는데, 神會는 [南宗定是非論(남종정시비론)]에서 金剛經을 宣揚(선양)한 다음의 一段을 그대로 인용하여 觀心釋(관심석)한 것이다.
金剛般若波羅蜜 最尊 最勝 最第一 (금강반야파라밀 최존 최승 최제일)
無生無滅無去來 一切諸佛從中出 (무생무멸무거래 일체제불종중출)
神會의 이 偈頌(게송)은 金剛經의 8段, 12段, 29段의 趣旨(취지)를 偈頌(게송)으로 묶어 찬탄한 것인데, 敦煌本(돈황본) 壇經(단경)에서는 摩訶般若波羅蜜의 實踐行(실천행)으로 응용하여 한 구절씩 새롭게 解說(해설)을 가하고 있다.
특히 '智慧(지혜)로써 彼岸(피안)에 이른다'는 말은 다름 아닌 [般若心經]의 趣旨(취지)라고 할 수 있으며, '三毒(삼독)을 바꾸어 戒定慧(계정혜)로 한다'라는 말은 北宗 神秀(신수)의 觀心論(관심론)에서 三毒心(삼독심)을 바꾸어 三聚淨戒(삼취정계)로 한다는 觀心의 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응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壇經에서는 心地法門(심지법문)에 依據(의거)한 독창적인 三學說(삼학설)을 주장하고 있다. 자세한 점은 拙論(졸론) '敦煌本 [六祖壇經]과 心地法門'에 미루겠지만, 戒定慧의 三學一致를 三學으로 나누어 지기 이전인 인간의 根源的(근원적)인 心地(심지)에서 統合(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壇經의 43段, 志誠(지성)의 參問(참문)에 北宗 神秀(신수)의 七佛通戒(칠불통계)의 三學說(삼학설)과 南宗 慧能(혜능)의 心地法門(심지법문)의 三學說(삼학설)을 對照(대조)하여 慧能의 三學說이 단연 뛰어난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15段에는 定慧(정혜)를 南宗頓敎(남종돈교)의 근본으로 설하면서 定慧一致(정혜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三學說(삼학설)은 戒→定→慧의 順으로 이루어지는 불교의 實踐構造(실천구조)이었지만 壇經에서 '三學一致(삼학일치)'·'定慧等(정혜등)'이라고 함은 從來(종래)의 이러한 전통적인 解釋(해석)을 무시하고 三學으로 나누기 이전의 根源的근원적)인 心地(심지)에서 파악하게 하고 있다.
앞에서 論한 것처럼 般若나 一行三昧(일행삼매)의 독자적인 觀心釋(관심석)으로 새롭게 說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佛敎用語나 槪念(개념)이나 전통사상 및 불교의 정신을 단순히 追從(추종)하는 解釋(해석)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이 나오기 이전의 根源的(근원적)인 心地(심지)에서 다시 비판적으로 전체를 본질적인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존의 개념이나 사상으로써 인간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根源的인 自心에서 새로운 독창적인 自己의 사상을 만들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새롭고 독창적인 自己의 사상을 만든다는 것은 各自의 根源的인 眞如自性(진여자성)에 의한 智慧의 작용에서 이루어진다.
般若의 智慧가 一切時中(일체시중)에 念念히 어리석지 않으면 항상 智慧를 行하는 것이 바로 般若行이라고 說하고 있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러한 智慧(지혜)의 작용을 慧能(혜능)은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29段)
여러분! 내가 說하는 法門은 八萬四千(팔만사천)의 智慧(지혜)를 작용시킨다. 왜냐하면 世上에는 八萬四千의 塵勞(진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塵勞(진로)가 없다면 般若는 常在(상재)하여 自性을 여의지 않는다.
이 法을 깨닫는 자는 곧바로 無念(무념)이며, 無憶(무억)이며, 無著(무저)인 것이다.
광妄(광망;虛僞:허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곧 그대로가 眞如(진여)의 本性(본성)인 것이다. 智慧로써 觀照(관조)하여 一切法(일체법)을 取(취)하지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곧 見性(견성)하여 佛道(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八萬四千의 智慧는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기 때문에 그 번뇌의 숫자에 맞게 法門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똑같은 趣旨(취지)의 說法(설법)이 黃檗(황벽)의 [傳心法要(전심법요)]에도 보이는데 이 역시 壇經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煩惱菩提(번뇌보리)'와 같이 번뇌의 實體(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곧바로 菩提의 當體(당체)인 것이기에 번뇌가 없어진 그대로가 菩提인 것이며, 般若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러한 智慧의 작용으로서 無念·無憶·無著(무념·무억·무저)의 三句(삼구)로써 說하고 있는데, 無憶(무억) 역시 無念(무념)과 똑같은 입장이다. 예를들면 維摩經(유마경) 菩薩品(보살품)의 彌勒章(미륵장)에
不行是菩提 無憶念故 斷是菩提 (불행시보제 무억념고 단시보제)
捨諸見故 離是菩提 離諸妄想故(T.14-542 中) (사제견고 이시보제 이제망상고)
라고 說하고 있는 점이나, 또 文殊尸利行經(문수시리행경)에
如是法者 卽是常住 亦名法界·若常住法界者 無憶無念·無憶無念者一切 無證 無不證 無不證者 亦非不證 不憶不念 若如是知者 卽名如來 眞實聲聞弟子 名爲最上 得言應供者(T.14-513 下)
여시법자 즉시상주 역명법계·약상주법계자 무억무념·무억무념자일체 무증 무불증 무불증자 역비불증 불억불념 약여시지자 즉명여래 진실성문제자 명위최상 득언응공자
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無憶이나 無著 역시 無念과 똑같은 의미이다. [文殊尸利行經]에서 '만약 常住(상주)의 法界(법계)라면 無憶 無念인 것이며, 無憶·無念(무억·무념)이라면 一切의 證得(증득)함은 없고 證得(증득)하지 아니함도 없다'라고 한 一節은 壇經의 三句說法(삼구설법)과 비슷하다.
원래 三句說法(삼구설법)으로는 宗密(종밀)의 所傳(소전)이나,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에 의하면 四川成都 淨衆寺(사천성도 정중사)에서 活躍(활약)한 新羅出身(신라출신)의 無相(무상;684~762)이 '無憶·無念·莫忘(무억·무념·막망)'의 三句로써 戒定慧 三學(계정혜 삼학)의 실천에 配當(배당)시키면서 독자적인 引聲念佛(인성염불)로 敎化(교화)한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또 無相(무상)의 法嗣(법사)로 自任(자임)한 保唐宗(보당종)의 無住(무주;714~774)는 이러한 無相의 三句를 계승하여 '無憶·無念·莫妄(무억·무념·막망)'으로 바꾸어서 설하고 있다. 壇經의 三句說法(삼구설법)은 이러한 歷代法寶記(역대법보기)의 無相·無住(무상·무주)의 三句思想(삼구사상)은 사실 '無念(무념)'이 중심이 되고 있다.
壇經에서는 19段에 '無念(무념)을 宗(종)으로 하고 無相(무상)을 體(체)로 하며 無住(무주)를 근본으로 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주장인데, 이 점에 대해선 無念說(무념설)에서 再考(재고)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無念은 일체의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妄念(망념)이 없는 根源的(근원적)인 본래의 마음을 말한다.
無憶 역시 憶念이 없는 것이기에 無念과 같고, 無著은 마음이 그 어디에도 어떤 境界에도 머무름이 없고 집착됨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無念·無憶·無著(무념·무억·무저)이 自性에 一切(일체)의 번뇌가 없어진 般若智慧(반야지혜)의 작용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 '이러한 眞如의 本性은 智慧(지혜)로 觀照(관조)하며 一切法(事物·境界;사물·경계)에 取하거나 버림이 없는 것이 곧 見性하여 佛道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설하는 말은 南宗의 頓悟見性說(돈오견성설)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壇經에는 數處(수처)에 '菩提般若之智 世人本自有之(보리반야지지 세인본자유지)'(14段)이나 '衆生本性 般若之智(중생본성 반야지지)'(30段)라고 하는 주장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智慧의 本體인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本性·佛性)의 주장은 불교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며 禪佛敎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大乘經典(대승경전)의 處處(처처)에서 강조하는 佛性思想(불성사상)과 般若(반야)의 智慧(지혜)가 여기 [壇經(단경)]에서 종합되어 頓悟見性(돈오견성)하여 佛道를 이루는 禪佛敎(선불교)의 사상을 體系化(체계화)하였으며 사실상 中國禪宗(중국선종)의 사상적인 完成(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壇經]에서 주장된 頓悟見性說은 般若의 智慧가 具足(구족)된 眞如(진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며, 般若의 智慧는 그러한 眞如本性(진여본성)인 無念(무념)의 작용인 것이다.
一切法(일체법)에 取捨(취사)가 없는 本性(본성)의 작용이 다름아닌 智慧(지혜)로 觀照(관조)하는 것이다.
첫댓글 참 좋은 자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