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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승속을 막론하고 반드시 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영원한 자유, 선문정로] 등에 의지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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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성철스님
6. 십이연기의 재해석
-----전반부 생략-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성은 항상 머무르니, 여래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루어서 나타내 연설하고 분별하여 열어 보이느니라. 이른바 이 일이 있으므로 저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므로 저 일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을 연하여 행 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 병 사 우 비 뇌 고가 있으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苦陰) 의 모임이니라.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한즉 노 병 사 우 비 뇌 고가 멸하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如來出世커나 及不出世커나 法性은 常住하니 彼如來自知하여 成等正覺하고 顯現演說하여 分別開示하느니라 所謂是事有故로 是事有하며 是事起故로 是事起하니 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 如是苦陰集하느니라 無明滅則行滅하고
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하니 如是苦陰滅하느니라. [那梨迦經, 相應部經典 2권]
이 경전에서는 연기의 성품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였는데, 법성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은 항상 법계에 존재하므로 연기, 곧 십이연기는 항상 법계에 존재하는 법성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여래는 이법을 스스로 깨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은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 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느니라."
世尊이시여 謂緣起法은 爲世尊作가 爲餘人作耶오 佛告比丘하시대 緣起法者는
非我所作이며 亦非餘人作이니라 然이니 彼如來出世거나 及未出世거나 法界常住하느니라 彼如來自覺此法하여 成等正覺하고 爲諸衆生하여 分別演說하고 開發顯示하느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느니라 [雜阿含經 제12권 ; 大正藏 제2권 p. 85 中]
이 연기법경(緣起法經)은 앞의 내용과 더불어 여기법의 성품을 뚜렷이 규정짓고 있습니다. 앞의 경전에서는 연기법의 성품은 곧 법성이라고 하였으며, 이 경전에서는 그 연기법은 항상 법계에 머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법성, 법계로의 해석은, 연기법이 생멸적이고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내포하든 아니든 그 근본은 진실한 법성의 연기, 법계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을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緣起를 見하는 者는 法見하며 法見者는 緣起를 見하느니라 [中阿含經 p.241]
발가리(跋迦梨) 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리라. [相應部經典 3권 p.190]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하고 연기를 직접 깨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깨친 연기는 곧 법이며 곧 중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계라고 하면 화엄종의 법계연기에서만 주장하였지 근본 원시경전에는 그런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미 앞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원시경전에서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법계설이 설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문 한가지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잘 법계에 도달하였느니라. [南傳大藏經 相應部經典 제2권 p.81]
이는 부처님만이 법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인 사리불도 법계에 잘 도달하였다고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시경전을 살펴본 까닭은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그런 큰스님들이 아함불교(亞含佛敎)를 소승이라 하여 무시하다시피 했으므로 후대에서도 아함(亞含)이라 하면 으레히 소승불교 계통의 경전으로만 인식하고 대승적인 법계 연기 진여연기를 원초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역의 아함경이나 이에 상당하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불교는 결코 후대에서 잘못 이해한 유부(有部)의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설해 온 가전연경 등 연기설에 관련된 경전들의 사상에 의하면 부처님의 근본법은 중도연기(中道緣起)에 있는데, 이 중도연기란 곧 진여법계를 말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여법계란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종(華嚴宗) 등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이며, 화엄경 법화경의 근본 도리입니다. 원시불교 경전에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법계의 사상을 구성하는 중도(中道)나 법계(法界) 법성(法性), 여여(如如), 진여(眞如) 등의 사항이 연기설을 주축으로 하여 부분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불교에 있는 중도사상 연기사상 진여법계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흔히 화엄사상을 부처님 뒤에 발전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근본불교에서 설한 연기설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이 화엄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리로 선종(禪宗)도 똑 같습니다. 화엄의 법계연기가 부처님의 진여법계연기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선종은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도를 정득각하여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것이 다름아닌 선종입니다. 선종도 흔히 뒤에 중국에서 발달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선종이란 부처님의 중도, 즉 법계연기 연기법계를 단박에 증득(頓證)한 것이며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여의 법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든지, 혹은 증득하든지간에 이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근본 불교시대에 미숙한 형태로나마, 적어도 문헌의 기록적인 측면에서, 친히 잘 말씀하시고 친히 증득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세에 이르러 보다 완벽하게 이론화되고 문자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연기법을 한 게송을 지어 읊어봅니다.
가이없는 풍월은 눈〔眼〕속의 눈이요
담함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러라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십만의 집에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無邊風月眼中眼이요 不盡乾坤燈外燈이라 柳靑花明十萬戶에 叩門處處有人應이로다
삼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 "예"하고 저기 불러도 "예" 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것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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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의 말에 따르자면,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식의 단위가 마치 한 등불이 다른 등불을 밝히듯이 다른 물질과 정신으로 재생되므로 이것은 재생연결식이지 단견(斷見)도 아니고 상견(常見)도 아니고 무아(無我)이다. 즉, `부처님의 견해이다`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식의 활동을 재생연결식이라고 보는 것은 다름아닌 부파불교의 주류인 설일체유부에서 연기를 시간을 전제로 유전연기(流轉緣起)를 해석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무명은 행을, 행은 식을, 식은 명색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무명은 행을 연하여 있고, 행은 무명을 연하여 있어서, 비유하자면 두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있는 것과 같아서 만약 한 단을 빼버리면 같이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은 앞의 것은 다만 뒤에 것에 대하여 영향만 주고, 그 영향에 의하여 뒤에 것이 문득 생긴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창조론이나 전변설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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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의 불교에 대한 글을 읽고
그의 불교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자세히 공부하지 않았지만, 가끔 마하시사야도의 불교에 대한 글을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은 잠시 미룬다 하더라도 불교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공부를 위하여 사람들이 더러 티벳의 달라이라마에게로, 혹은 동남아를 유학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바른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구경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으면 그 사람이 곧 부처이고 그 사람의 견해가 곧 부처의 견해이므로 그 어떤 것보다도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영원한 자유, 선문정로] 등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연기라는 것은, 한 티끌로 부터 일체 만유가 다 제각기 불성인데 이 불성은 그 몸은 공하며 일체의 만덕 즉 능력인 반야이므로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인데 이것이 각기 두루 가득한 것이 이 우주이며, 이것이 다함없이 불가설 불가설 불찰미진수로 중중무진으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서로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이며 곧 법계(法界)입니다.
마하시사야도는 재생연결식이라고 하지만 바르게 말하자면 재생연결식이 아니라, 반야가 오염되어 만유를 실유로 보아 집착하는 것이 무명이며, 이 무명은 그 집착을 놓지 못하여 그 집착하는 바를 따라 폭포수와 같은 번뇌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찰라 간에도 그렇고, 몸의 인연을 따라 그 몸을 바꾸어 가며 계속하는데, 이것이 곧 영원토록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 만법의 참모습 연기법은 위빠사나 수행법으로는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왜그렇느냐 하면, 수행이 제8 멸진정에 이르면 이미 아공을 체득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더 이상 살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공(我空)을 체득한 제8 멸진정 이상에서는 이미 아(我)가 공(空)하므로 윤회를 그치고 영원 불퇴전으로서 더 이상 노력이 없어도 열반을 수용하여 성인의 경계에 머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여열반(有餘涅槃)이므로 법공을 보지 못합니다. 수행자들은 누구나 여기에 이르르면 모두가 만족하여 구경으로 삼아 버리니 이것이 바로 소승 아라한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경계하여 의발을 정법안장의 신표 삼아 가섭에게 부촉하여 인가법의 철칙을 세우셧습니다.
화두참선법을 배워 위빠사나 사마타, 지관, 정혜를 쌍으로 닦아서, 인가를 이은 스승의 지도를 받아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파도는 조건에 따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다만 서로 인연을 따라 의지하여 원융무애하게 출렁이니 이것이 마치 법계의 연기법과 비유할만합니다. 다만 불성의 작용인 일체지(一切智) 반야는 무엇으로도 그 비유가 어렵습니다.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은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의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이라는 것은 생겨나서 일어나는 생기(生起)의 뜻이 아니라 성품이 일어나는 것 즉, 성기(性起)의 뜻입니다. 만법의 근본인 이 성품은 불성으로서 그 몸이 공하여 무량의 부처와 보살이 그 위신력(威神力)을 무한히 다하여도 조금도 빼거나 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품은 재생연결식이 아니라 영원토록 그대로일 뿐이므로 그 이름이 진여(眞如)입니다. 만법은 상즉상입한 진여 성품이 서로 의지하여 원융무애 할 뿐입니다. 이것이 연기 법계입니다.
다만 중생은 무명의 그 집착한 무한한 번뇌에 가려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제법을 실유로 여겨 그 집착한 바를 따라 영원토록 윤회하며 스스로 그것을 따라 갑니다. 깨닫기 전에는 자기의 불성 무한 보배를 등지고 무명의 집착한 바깥의 먼지를 따라 영원토록 고를 달게 받는 것입니다.
남방불교는 소승불교입니다.
남방불교는 그 전하여진 경전이 전적으로 소승경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소승불교인 부파의 설일체유부의 해석을 따라 변견(邊見)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제 일성으로 오비구에게 이르시기를 ``여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노라``고 선언하셨으며, 이것을 초전법륜이라고 하며, 불교의 핵심이며, 근본이며, 그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러므로 남방불교에서 설일체유부의 견해를 따라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소승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지금은 모든 불교학자들이 일치된 견해입니다.
이제는 불교를 부파 설일체유부의 소승불교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현실에 있어서도 모든 것은 시공을 초월해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현대과학 앞에서 미개한 사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은 초전법륜에서 오비구에게 선언하신 만법의 참모습인 중도(中道)에 있으며, 이 중도는 시공을 초월한 것이며, 격식을 떠난 것이며, 논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범부 중생인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만법의 구경의 참모습 중도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이 지구가 허공에 떠서 돌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그것을 말하는 것은 격식과 논리를 떠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신은 허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조건적 맹신으로 그 신앙에 안주할 수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와는 또 다르게 이렇게 중생 범부로서는 그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믿음이 그 원천이 되는 것이요, 그 믿음으로 마침내 선근을 익혀서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말에 따르자면,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 식의 단위가 마치 한 등불이 다른 등불을 밝히듯이 다른 물질과 정신으로 재생되므로 이것은 재생연결식이지 단견(斷見)도 아니고 상견(常見)도 아니고 무아(無我)이다. 즉, `부처님의 견해이다`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식의 활동을 재생연결식이라고 보는 것은 다름아닌 부파불교의 주류인 설일체유부에서 연기를 시간을 전제로 유전연기(流轉緣起)를 해석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무명은 행을, 행은 식을, 식은 명색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무명은 행을 연하여 있고, 행은 무명을 연하여 있어서, 비유하자면 두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있는 것과 같아서 만약 한 단을 빼버리면 같이 넘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은 앞의 것은 다만 뒤에 것에 대하여 영향만 주고, 그 영향에 의하여 뒤에 것이 문득 생긴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창조론이나 전변설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때 존자(尊者)마하구치라(Mahakautthika)는 존자 사리불(Sariputta)에게 이렇게 물었다. "벗 사리불이여, 노사(老死)는 자기가 지은 것〔自作〕입니까, 노사는 남이 지은 것〔他作〕입니까,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또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없이 나는 것입니까?""벗 구치라여,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 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노사는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습니다.""벗 사리불이여, 생(生)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벗 사리불이여,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식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은 것이며 남이 지은 것입니까, 식은 자기가 지 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입니까?""벗 구치라여,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으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며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명색(明色)에 연(緣)하여 식(識)이 있습니다.""벗 사리불이여, 이 말한 바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벗이여, 비유하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이 명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에 연하여 명색 이 있습니다. 명색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으며, 육처에 연하여 촉(觸)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입니다.
벗이여, 만일 그들의 갈대 묶음 가운데서 하나를 제거해버리면 나머지 하나는 넘어져버리며, 다른 것을 제거해버리면 그 다른 것이 쓰러져버립니다. 벗이여, 그와 같이 명색의 멸함이 있으며, 명색의 멸함에 의해서 육처의 멸함이 있으며 육처의 멸함에 의해서 촉의 멸함이 있으며, 이 와 같은 것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입니다.``』
[相應部經典 2권 南傳大藏經 13 p.164-166]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이 이야기는 남전대장경과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에 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있는 것과 같아 하나는 주체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객체가 된다는 것보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연기란 인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하여 생겨난다는 생성의 기본원리라기보다는 모든 일체 만물이 존재하는 존재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원리 - 지금 이 우주법계가 존재하고 있는 원리를 말하며 그 원리가 연기(緣起)입니다. 모든 존재 즉, 이 법계는 그 근본이 무아공(無我空)으로서 그것이 찰라이든 영원이든 항상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서로 의지하여 성품이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무명중생은 만법을 실유(實油)로 보아, 났다가는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고 보기 때문에 이 연기를 시간적 관념으로 봅니다. - [필자주] -
흔히 연기를 만물이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적 해석이 됩니다. 연기는 본래 존재의 모습을 말하는 기본원리였었는데, 후대에 오면서 생성의 원리를 말하는 시간적 관계로 보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연기란 우선적으로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기의 근본 성풍에는 앞의 남전정경에서 본 것처럼 진여(眞如)의 의미도 포함되고 있는데, 진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만약 연기를 생성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전변설(轉變說)에 떨어지게 됩니다. 전변설은 오늘날 하나님격인 범(梵: brahman)에서 일체만물이 나왔다고 하는 인도 고대종교의 사상이며, 부처님은 애초부터 이것을 부정하였습니다. 후대의 불교에서는 전변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데, 유식설(唯識說)은 은연중에 이러한 전변설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기란 전변설처럼 무슨 본질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본체에서 지말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화엄(華嚴)의 법계연기론(法界緣論)에서 성기(性起)라는 말을 하는데 그 일어난다(起)는 말을, 생겨나서 일어난다는 생기(生起)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불법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란 '서로 의지해 있는 것〔相依性〕'이라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의지하고 나는 너를 의지해 있다고 하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생겼고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즉 연기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형제 사이란 말입니다.시간적으로 연속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평등인 형제 사이라는 것이며, 우주가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말함이지 성경의 창세기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말하는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흔히 나에게 묻습니다. "예수교에서는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다고 합니까."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는 연기법이 있다. 이 우주라는 것, 법계(法界) 진여(眞如)라는 것은 누가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누가 부술 수도 없는 것이다. 법계 그 자체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不生不滅〕,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不增不減〕것이다.거기에서는 서로가 의지하여 원융 무애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면 외도법인 전변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주의 존재방식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연기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융화하여 무애자재 함을 말할 뿐이지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학자나 스님들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을 소승에 소속된 것으로 분류하였는데, 지금까지의 인용 경전과 그 해설에서 그와 같은 취급이 반드시 옳지마는 않다는 점을 다소간 이해하였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연기에 생사윤회의 시간적인 해석을 하게 된 까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학문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라고 하면 그냥 불교라는 것뿐이었는데, 학문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도 역사적인 전개에 따라 근본불교(根本佛敎)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분류하여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직접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기의 불교를 말하고, 원시불교란 부처님 제자들 이후부터 부파의 분열 이전까지 백여년 동안의 불교를 말합니다.그 뒤로 십 수 개의 부파가 나뉘어져 서로 이론적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는 바로 그 부파불교를 가리킵니다. 부파 성립 이후의 교단은 거의 소승불교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소승불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근본불교 정신으로 되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대승불교운동이 처음 일어난 때는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하며, 그것을 가장 잘 체계화시킨 사람이 용수(龍樹)를 중심으로 한 중관파(中觀派)이고, 그보다 다소 후에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을 중심한 유식파(唯識派)가 성립됩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인도의 불교사상을 오랜 세월 동안 수용하면서 전적으로 대승적인 교학을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천태종(天台宗) 선종(禪宗)등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근본이 되는 것인 만큼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 당시의 불교가 중심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시대를 내려오면서 만일 그 근본취지가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 변질된 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합니다.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해 온 바와 같이 근본경전에서 설해진 십이연기법의 근본성품은 진여이며 법계이며 중도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십이연기법을 시간적인 생멸법으로 해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 시대를 지나서 부파불교시대로 오면 각 부파가 서로 자기파의 변견을 고집하게 됩니다.한쪽에서는 부처님의 근본교설을 없다는 견해〔무견(無見)〕에 치우쳐 해석하고, 다른 쪽에서는 있다는 견해〔有見〕에 치우쳐 해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세력이 컸는데, 그것이 요즘 말하는 소승불교의 실세가 된 것입니다. 있다는 견해에 치우친 것이란 '일체의 모든 법에는 실체(實體)가 있다〔諸法實有〕'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체가 있으므로 고정적으로 생사 윤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서로 의지한다는 성격〔相依性〕 때문에 연기란 것은 무아(無我)가 근본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파불교에서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즉 양변을 여윈 중도사상을 모르고 변견에 떨어져 '실체는 있다'는 견해를 고집했고, 따라서 십이연기를 그와 같은 실유론적인 성격이 강한 생사윤회하는 법칙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최초로 나온 곳이 원시경전에 나오는 가전연존자와는 이름만 같고 실제로는 다른 가전연자(迦 延子)가 지은 「발지론(發智論)」인데, 거기에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써 설명한 것입니다. 그 뒤 오백명의 존자들이 모여서 가전연자가 지은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로서「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100권을 지었는데 거기서도 삼세양중인과설을 채택하여 생멸법으로서의 십이연기를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구사론(具舍論)」 등 유부(有部)의 소승불교 전체가 십이연기의 해석을 근본불교와는 다르게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런 풍조 속에서 용수보살이 나타나서 부처님의 근본불교를 생멸적인 견해로 곡해한 유부의 변견을 부수게 됩니다. 그는 「중론(中論)」을 지어서 중도를 다시 선양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중도사상을 가지고 근본불교를 회복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인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근본 불교에로의 복구운동이 소위 대승불교 운동입니다.간략하지만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 연기설이 어떻게 해서 유부(有部)적인 소승의 생멸적 견해로 해석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이 대강 짐작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에는 어느 학자도 십이연기를 반드시 생멸적이며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게 생멸적인 소승유부의 주장을 고집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부처님의 근본 뜻을 등지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上.p138~145]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제법은 연기한 것으로 실로 재행이 무상한 것을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근본은 그 성품이 공(空)한 까닭이고 그 공(空)한 성품은 불생불멸[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 반야심경]이며, 대승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아무리 찰라 간에도 무한히 재생하는 그 재생연결식의 현장을 뚜렷이 목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무시무종의 무명이 앞의 업연인 몸의 인연이 다하면 다른 업연의 몸을 따라 일어키는 번뇌인 것이지 재생연결식이 아닙니다. 이 무명의 번뇌는 마치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저 나뭇가지를 잡듯이 업연을 따라 일어날 뿐 한 방향으로 재생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중생이 불성인 반야를 깨닫지 못하여 어두운 것일 뿐 그 근본은 반야인 것입니다.
그 근본인 반야는 그 몸이 공(空)하므로 결국 공이 반야이니, 이것이 진공 즉 묘유(眞空卽妙有) 중도(中道)입니다.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부처요, 부처는 깨달은 중생입니다.
사바가 그 근본이 열반이요, 열반이 그 근본에 어두우면 그것이 곧 사바일 뿐입니다.
사바의 근본인 열반은 일찌기 생(生)한 바도 없고 멸(滅)한 바도 없습니다.
이것을 불생불멸이라고 합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재생연결식이 아니라, 무명의 번뇌가 그 집착한 바 업연(業緣)을 따라 끝없이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윤회(輪廻)라는 것은 재생연결이 아니라, 그 무명이 업연을 따라 거듭하여 몸을 바꾸어가며 일어키는 생사입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나는 이제 마땅히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 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느니라.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行)을 연(緣)하여 식(識)이 있으며 내지 이렇고 이렇게 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 [純大苦聚]가 모이느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짐을 말하느니라.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 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생(生)을 연 (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 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생(生)을 연(緣)하므로 노(老) 병 (病) 사(死)와 우(憂) 비(悲) 뇌(惱) 고(苦)가 있다고 하느니라.이들 모든 법은, 법이 머무르며〔法住〕, 법이 공하며 〔法空〕, 법이 여여하며〔法如〕, 법이 그러하며〔法爾〕, 법이 여여함(如)함을 떠나지 아니하며, 법은 여여와 다르지 아니하며, 참으로 진실하여 전도되지 아니하니, 이와같이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此丘하시대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하리니 云何 爲因緣法고 謂此有故彼有니 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乃至如是如是하여 純大苦聚集이니라 云何緣生法고 謂緣無明行하니 라. 若佛出世커나 若未出世커나 此法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死하니라 若佛出世커나 若未出世커나 此法은 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顯發하니 謂緣生故로 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라 此等諸法은 法住이며 法空이며 法如며 法爾며 法不離如며 法不異如며 審諦眞實하여 不顚倒니 如是隨順緣起를 是名緣生法이니라.
[雜阿含經 제12권; 大正藏 제2권 p.84]
이 연기법은 항상 있어서 법이 법계(法界)에 머문다는 표현 속에서 연기의 근본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연기법이란 법계이며,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법이 머문다〔法住〕'는 것은 법이 연기하여 존재함을 말하며, 연기한 모든 법은 다 공하므로 '법이 공[法空]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여여함[法如]'이란 일체만법이 진실하여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대로[法爾]'란 흔히 연기법을 자연법 그대로가 아니냐고 해석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며, 그 참된 의미는 '진여법 그대로다'하는 뜻입니다.앞의 파리문 경전에서는 연기법과 연생법을 진여성(眞如性) 불허망성(不虛妄性) 불이여성(不異如性) 상의성(相依性)이라 말한 것을, 여기 한역 경전에서는 '법이 머물고〔法主〕법이 공〔法空〕하며, 법이 여여하고〔法如〕법 그대로다〔法爾〕'거나, '법이 여여와 다르지 않다〔法不異如〕'라고 말했는데 이 양자의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
[성철스님 법어집 `백일법문上`p100~102]
장구를 치니 장구소리가 나고
북을 치니 북소리가 요란하다
봄 바람이 부니 만가지 꽃이 향기롭고
가을이 되니 소슬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지는 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