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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韓半島)! 1,900년도에 일본(日本)의 강토(疆土)였다?
2021년 08월 20일
○ 가끔 들리는 ‘대륙조선사연구회(大陸朝鮮史硏究會)’에서 필자(筆者)로써는 이해(理解)하기 힘든 게재(揭載) 글이 있어 이를 ‘펌’하고,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구절(句節)에 대해서 의문(疑問)을 갈구(渴求)한 것이다.
조선(朝鮮)의 지명(地名) 고찰(考察)에 대해 “대륙조선사연구회”의 성과(成果)는 “눈부시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업적(業績)을 쌓았다고 본다. “심심한 사의(謝意)의 표한다!”
물론(勿論) 이건 ‘재야(在野)라는 음지(陰地)에서나 통(通)하는 말’이다. ‘양지(陽地) 곧 강단사학(講壇史學)은, 사이비(似而非)라고 하여,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게재(揭載) 글 속의 아래의 몇 가지 의문(疑問)에 대해서, 지식(知識)이 짧은 필자(筆者)의 소견(所見)으로 본 것이니, 오해(誤解) 없기를 바랄 뿐이며, 대륙조선(大陸朝鮮)에서 이주(移住)한 분의 “증언(證言)”이 사실(事實)이라면, 이는 대대적(大大的)인 홍보(弘報), 적극적(積極的)인 행동(行動)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소망(所望)이며, 오해(誤解) 없으시길 진심(眞心)으로 바라며, 양해(諒解)를 구(求)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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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1
[1]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의 영토(領土)였는가? 【아래 이미지 참고 : 대륙조선사연구회 게재물 이미지】 식민지(植民地)였는가? 더불어 영토(領土)와 식민지(植民地)는 어떤 차이(差異)가 있는가? ‘네이버 한자사전’을 찾아보았다.
(1) 영토(領土) : 1. 한 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이 미치는 지역(地域). 2. 영유(領有)하는 땅.
(2) 식민지(植民地) : 1. 식민(植民)한 사람들에 의(依)하여 개척(開拓)된 국외(國外)의 영역(領域). 2. 새로 속령(屬領)으로 된 지역(地域)
식민지(植民地)의 또 다른 의미[나무위키] : 종속 지역의 일종으로 본국 밖에(주로 해외) 있으면서 본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
이렇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 ‘영토(領土)와 식민지(植民地)’는 그 뜻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다.
▶ 아래의 지도(地圖)를 보면 : 「1900-1945년 구한말(舊韓末) 일본의 강역」이라고 표시한 것인데, 열도(列島)를 제외(除外)한 다른 곳은, “식민지(植民地)”가 올바른 표현(表現)이 아닐까? 특히 당시(當時)의 일인(日人)들은 “열도(列島)를 내지(內地)”라고 표현(表現)하였는데, ‘내지(內地)란 곧 본국(本國)’을 뜻하는 말이다.
※ 대륙조선사연구회 게재물 이미지 캡쳐
(3) 필자(筆者)는, 이러한 설명(說明)에는 동의(同意)할 수 없다. 또 본래(本來)의 영토(領土)라는 것과 병합(倂合)하여 식민지(植民地)가 된 것과는 근본적(根本的)으로 다른 차원(次元)의 이야기다.
강토(疆土) 또는 영토(領土)라는 개념(槪念)은, 본시(本是) 그들의 거점지(據點地)를 말하는 것이고, 병합(倂合)했다는 말은, 그들의 땅이 아니었지만 침략(侵略), 토벌(討伐)하여 그들의 땅으로 만들었다는 즉 ‘식민지(植民地)로 만들었다 또는 건설(建設)했다.’는 뜻이다.
▷ 오늘날 열도(列島) ‘우익(右翼)과 아베’등이 주장(主張)하는 것처럼 본래(本來)의 일본(日本) 강토(疆土)였다면, 그들이 반도(半島) 국민(國民)들에게 사과할 이유(理由)가 없다.
▷ 그러나 점령(占領), 토벌(討伐)하여 식민지(植民地)화하여 강제(强制)로 그들 땅으로 편입(編入)시켜 영토(領土)화했다면, 열도 땅을 내지(內地)로 했다면, “우익(右翼)과 아베”는 당연히 사과할 책임(責任)이 있고, 마땅한 일이다.
이 말은 「한반도(韓半島)는 일제(日帝)의 식민지(植民地)였다.」는 뜻이다. 그들 땅이었는데 사과를 한다? 반대로 반도(半島)가 일본의 영토(領土)였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 에게 ‘영토(領土)=강토(疆土)’의 반환(返還)을 요구(要求)할 것이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하나? 이렇게 엄청난 차이(差異)가 있는 것이다.
「1,900년도의 반도(半島)는 일본(日本)의 식민지(植民地)가 되었다.」는 것에는 동의(同意)하지만, 「그들의 강토(疆土) 또는 영토(領土)였다는 것에는 결코 동의(同意)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또 하나, 「1,900년도의 대륙(大陸)의 남부(南部)지방이 일본(日本) 땅이었다.」면,
『일본(日本)은 그들의 영토(領土)로, 수만(數萬) 또는 수십만(數十萬)의 군대(軍隊)를 출병(出兵), 진격(進擊)시켜, 그들의 영토(領土)를 짓밟고, 그들의 40∼60만 백성(百姓)들을 총과 칼로 무자비(無慈悲)하게, 처참(悽慘)하게 학살(虐殺)했다는 이야기다.』
‘남경(南京)대학살이니, 해남도(海南島) 대학살’이니 하는 등의 일본군(日本軍)이 진격(進擊)하는 주변(周邊)의 모든 것들을 야만적(野蠻的)으로 초토화(焦土化)시켰다고 하였다. 일본(日本)! 그들의 영토(領土)와 그들의 백성(百姓)들을 무자비(無慈悲)하게, 처참(悽慘)하게 학살(虐殺)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들 즉 자신(自身)의 나라로 쳐들어가, 자신(自身)들의 부모형제(父母兄弟), 친인(親姻), 동료(同僚) 및 백성(百姓)들을 학살(虐殺)한 것이다?
이게 사실(事實)이라면 ‘당시(當時)의 일본(日本)은, 인간(人間)무리가 아니었다’고 봐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중국(中國) 아이들은 난리(亂離) 법석을 떠는 걸까?” 일본(日本)!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백성(百姓)들을 도륙(屠戮)한 것임에도, 중국(中國)에서 떠들썩한 것은, 내정간섭(內政干涉)일 뿐이다. 중국(中國)은 제삼자(第三者)일 뿐이었다. 무엇이 문젠가?
또 하나는 열도에서의 조선인들의 피폭자들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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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사연구회 / 지명찾기
구한말(舊韓末) 일본의 위치를 살펴보면..
송계 / 추천 4 조회 19421.08.10 13:39 / 댓글 8
1.
조선(朝鮮)이 대륙에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볼 때, 그렇다면 1910년 조선을 합병하고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에서 미국(米國)과 결사항전했던 일본(日本)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대륙에 존재했던 거대한 조선의 강역을 규정하고 지명을 복원하는 데 있어서, 사서(史書)를 통해 고증(考證)한다는 것은 대략적인 면은 가능할지 모르나 구체적인 부분은 절대 불가한 상황임이 틀림없다. 이로 인해 강역을 고증하는데 두리뭉실한 해석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후학들은 이후 항상 역사적 갈증에 몰말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대륙에서 이주한 분들의 증언(證言)이고 이것이 바로 대륙의 조선(朝鮮)을 고증해가는 길라잡이가 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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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2
[2] 〈대륙(大陸) 조선(朝鮮)에서 이주(移住)했다는 분의 증언(證言)〉이 진실(眞實)이다?
지금까지 ‘대륙(大陸) 조선(朝鮮)에서 이주(移住)했다’고 이걸 공개적(公開的)으로 증언(證言)한 분에 대해,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설(一說)에 수백(數百)만 이상(以上)의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이 한반도(韓半島)로 강제이주(强制移住) 당했다.”고 주장(主張)한다. 이주(移住)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證言)은 없고, 오직 몇 분, 아니 단 한 분 만의 증언(證言)이 있었다는 것일까?
형편(形便)상 “증언(證言) 할 수 없었다.”는 이유(理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증언(證言)한 분의 “증언(證言)이 진실(眞實)과 부합(附合)한다”면, 이를 소수(少數)인들만이 공유(共有)할 것이 아니라 대대적(大大的)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음지(陰地)에서 재야(在野)라는 소리를 들으며,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 국뽕주의자(主義者)소릴 들으며, 양지(陽地)로부터 사이비(似而非)소릴 들으며 고생(苦生)할 필요(必要)가 있을까?
그 분의 대륙조선(大陸朝鮮) 증언(證言)은, 그 파급효과(波及效果)는 음지(陰地)에서 연구(硏究)하는 많은 사람들의 것보다 휠 씬 큰 효과(效果)를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증언(證言)! 그것보다 더 좋은 연구(硏究)는 없다고 자신(自信)있게 말 할 수 있다.
●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은, 증언(證言)의 진실(眞實) 여부(與否)로, 그 증언(證言)을 누가 증거(證據) 또는 확인(確認)할 수 있는가? 그 많은 이주민(移住民) 또는 후손(後孫)들 중에서 다른 증언(證言)은 왜 없는 건가? 하는 점이다. 사실(事實)은 이게 핵심(核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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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현재까지 밝혀진 대륙조선의 많은 근거들과 기록들은 당 카페의 회원이신 모선생(某先生)에 힘 입은 바가 지대하다.
조선이주수인초(朝鮮移住手引草), 1926년의 반도 이주, 한양(漢陽)과 부산(釜山), 마산(馬山) 등등의 위치, 조선(朝鮮)과 명청(明淸)의 강역구분, 상해(上海)와 중경(重慶)의 위치, 나가사키가 항주만(杭州灣)에 있었다는 사실 등 그리고 일본의 위치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등이 모두 모선생(某先生)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사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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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3
[3] “조선이주수인초(朝鮮移住手引草)”라는 문건(文件)은 인터넷상에서도 떠돌고 있는데, 시중(市中)에 떠도는 것외(外), 별도(別途)의 원본(原本)이 있다는 것인가? 현재(現在) 유포(流布)되어 있는 “조선이주수인초(朝鮮移住手引草)”를 가지고, “대륙(大陸) 땅에서 한반도(韓半島)로의 이주정책(移住政策)이었다.” 고 한다.
일제(日帝)시대 내지(內地) 즉 일본(日本)에 살고 있는 그들의 국민(國民)들 중에서, ‘조선(朝鮮) 이주자(移住者)’들을 위한 안내 책자로, 이 책은 일본(日本) 내지(內地)에서 조선(朝鮮) 농업(農業)이주자(移住者)를 모집(募集)하면서 조선(朝鮮) 이주(移住)에 관한 정보(情報)를 수록(收錄)한 것으로 조선(朝鮮) 이민(移民)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規定)을 정해 놓은 책자다.
“이주(移住)신청(申請)시 유의점과 토지 대부, 거주 가옥과 간접 이민, 이주 비용의 대부, 이주도항 시 유의할 점, 이주 후 유의할 점, 농사에 대해 유의할 점, 제1회 이민 상황과 척식자금의 대부, 이주규칙, 단체규약준칙을 수록했다.”
또 내용(內容)을 보면 당시(當時)의 한반도(韓半島) 조선(朝鮮) 땅에는 내지인(일본)과 조선인, 지나인 및 기타 외국인도 있었다고 하였다. 조선인 농업자 수는 2,562,714호 라고 하였는데 인구로 보면 12,380,893명, 내지인(일본인) 8013호 : 26885인 / 지나인 : 434호 : 1426인 / 기타외국인 20호 : 15인등 당시의 농업에 종사하는 호수(戶數)는 총계(總計) 2,571,181호였다고 하였다. 【出處 : 改正 朝鮮移住手引草 : 改正(개정 조선이주수인초 : 개정) / 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주식회사 1915 大正 4】
당시(當時)에 반도(半島) 땅의 농업인구는 13,000,000인 정도나 되었다고 하니, 그 외의 백성(百姓)들을 계산(計算)하면 2,000만(萬)은 되지 않았을까?
이때 지나인(支那人)은 누군가? 또 다른 외국인(外國人)은? 조선이주수인초(朝鮮移住手引草)가 대륙(大陸)에서 반도(半島)로 이주(移住)를 위한 것이었다는 근거(根據)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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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일부 인사들이 마치 자신이 발견하고 알아낸 것처럼 너스레를 떨고 있기도 하나, 명확히 이 변조된 역사의 줄기와 대강을 밝혀낸 분은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의 회원이신 모선생(某先生)이 분명하다.
2.
구한말(舊韓末) 일본의 강역과 관련하여, 모선생(某先生)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강제 이주할 당시의 강역과 관련하여, 현 열도(列島)와 한반도(韓半島), 대륙 동남부, 그리고 현 대만(臺灣)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강역이었다고 고증(考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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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4
[4] 구한말(舊韓末)이라면,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합방(合邦)되기 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한말(舊韓末) 때의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 강토(疆土)였다」고 하였는데,
➊ 본래(本來)부터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 영토(領土)였다?
➋ 구한말(舊韓末)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에 의해 강탈(强奪)당했다?
위 “➊과 ➋”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에 따라 차후(此後)의 역사(歷史) 전개과정(展開過程)이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전혀 다른 차원(次元)의 것이 된다. 위에서 먼저 언급(言及)된 이야기다. 즉(卽),
(1) 구한말(舊韓末)의 한(韓)의 영토(領土)는 한반도(韓半島)가 포함(包含)되지 않았다. 고로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의 강역(疆域)이었다 : 『이는 오늘날의 일본(日本)에게 우리들은 사과와 반성(反省)을 요구(要求)할 권리(權利)가 없으며, 일본(日本)이 요구(要求)하면 우리는 한반도(韓半島) 땅을 비워주어야 한다. 아니면 이를 인정(認定)하든가 둘 중의 하나다.』
또 당시에 한반도(韓半島)에 있었던 원주민(原住民)들은 모두 “왜인(倭人)이었다.”는 이야기다. 틀렸는가?
(2) 구한말(舊韓末) 한(韓)의 영토(領土)속에 한반도(韓半島)도 포함(包含)되어 있는데, 일제(日帝)가 이를 강탈(强奪)하여 식민지(植民地)화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日本)에게 부당(不當)함을 지속(持續)하게 알리며 사과와 반성(反省)을 요구(要求)할 수 있으며, 한반도(韓半島)는, 일본(日本)의 영토(領土)가 아닌 식민지(植民地)였다」
무엇이 옳은 말인가?
영국(英國)이 인도(印度)를 강탈, 식민지(植民地)화했다고 해서 인도(印度)가 영국(英國)의 강토(疆土)였다고 말하나? 영국(英國)의 강토(疆土)가 아닌, ‘영국(英國)의 식민지(植民地) 인도(印度)’라고 말한다.
영토(領土)와 식민지(植民地) 개념(槪念)은 다르다. “특히 한반도(韓半島)와 일본(日本) 사이에서의 이런 개념(槪念)은 엄청난 오해(誤解)를 불러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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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중요논점은 바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의 개항요구와 더불어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 이후 1858년 구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이른바 현재의 역사통설이다.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였을 당시의 일본의 중심부는 명확히 현 필리핀이었다. 페리에 의해 일본이 개항되면서 일본의 중심세력은 현 대만(臺灣)으로 이동해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고 1867년에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달성하면서 많은 근대적 개혁을 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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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5
[5] 그렇다면 19세기 현 열도(列島) 땅 전역(全域)에서 수없이 벌어졌던 국지전(局地戰)은 무엇을 뜻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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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일본은 현 베트남을 정벌해 죠슈(장주-長州)藩을 세우고 임진왜란 이후 1658년부터 베트남의 동경(東京)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조선도공들의 도자기(陶瓷器)를 수출하는 일본의 중요거점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들 도자기들은 페르시아, 유럽시장을 상대로 많은 제품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1868년 일어난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명치정부는 지금의 홋카이도(하이-蝦夷)를 일본의 강역으로 편입하게 되고,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있었던 1876년에 현 한반도(韓半島)를 또한 병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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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6
[6] 위의 글 [4]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병합(倂合)한 것과 일본(日本)의 강토(疆土)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또 위의 최 상단(上段) 지도(地圖)에서는 분명 “1,900년”이라고 하였는데,
위 설명(說明)은 “1,876년에 한반도(韓半島)를 병합(倂合)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영토(領土)가 아닌 식민지(植民地)가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위의 본문(本文) 글【 2.구한말(舊韓末) 일본의 강역과 관련하여, 모선생(某先生)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강제 이주할 당시의 강역과 관련하여, 현 열도(列島)와 한반도(韓半島), 대륙 동남부, 그리고 현 대만(臺灣)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강역이었다고 고증(考證)하고 있다.】라는 설명(說明)은 잘못된 것이다.
병합(倂合)한 것과 본래의 강토(疆土)였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次元)의 이야기다. 이건 “일본(日本)의 식민지(植民地)였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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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즉, 일본의 근세역사를 분석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이 왜 일어났고, 또한 그 발생지역이 어디였는가를 명확히 가름하지 못하면 엉뚱한 역사왜곡이 일어나게 될 뿐이다. 명치유신은 정확히 현 대만(臺灣)의 타이페이 즉 동경(東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강역은 구한말 1900년에 태어나 반도로 강제 이주하고 연희전문을 나오신 모선생(某先生)의 집안 분 증언에 의해 밝혀진 내막이다. 또한 한양(漢陽)의 위치 또한 그분의 증언이 있었기에 기타 사서(史書)와 서양인 기록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濟州島) 또한 구한말(舊韓末) 장강(長江)의 동정호(洞庭湖) 아래 막부산(幕阜山)이었음을 증언했고, 이는 서양인의 기록을 통해 명확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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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7
[7] “제주도(濟州島)와 제주(濟州)와 탐라(耽羅)”는 동일(同一)한 땅을 말하고 있는 걸까? 원사(元史)에서는 ‘탐라(耽羅)’ 편을 별도로 두고 있는데, 제주도(濟州島)가 동정호(洞庭湖) 주변에 있었다는 설명(說明)이라면, 그곳의 기후풍토(氣候風土)로, 말(馬)의 사육장(飼育場)으로 알맞은 곳인가? 대규모(大規模) 목축장(牧畜場)으로써의 조건(條件)을 갖춰느냐? 하는 점이다.
제주도(濟州島)와 제주(濟州), 또 탐라(耽羅)와 섭라(涉羅)등은 같은 곳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곳의 산물(産物)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육지(陸地)의 땅과 호수(湖水)등지에 “대모(玳瑁) 또는 앵무(鸚鵡)조개”등이 산출(産出)될 수 있는가? 황금(黃金)이 산출(産出)되는가?
위의 글, “이러한 일본의 역사적 강역은 구한말 1900년에 태어나 반도로 강제 이주하고 연희전문을 나오신 모선생(某先生)의 집안 분 증언에 의해 밝혀진 내막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수백(數百)만 이주민(移住民)들이나 그 후손(後孫)들 중에서 또 다른 증언(證言)은?
왜 없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사실 음지(陰地)에서 수고를 할 필요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증언(證言)을 토대로, 또 다른 증언으로 진실을 담을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쉽게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問題)는 또 다른 증언(證言)이 없다는 점이다. 수백(數百)만 이주민(移住民)과 그 후손(後孫)들은 일천(數千)만 이상에 이를 것인 바, 그 밖의 증언(證言)이 없다는 것, 이게 문제(問題)라는 것이다.
제주도(濟州島)가 막부산(幕阜山)이라면 또 제주(濟州)는 어디를 말함인가?
‘막부산(幕阜山)’은, ‘호남(湖南)과 호북(湖北)과 강서(江西)’등의 세 개의 성계(省界)에 있는 산(山)으로, 해발고도(海拔高度) 1,597m의 산으로, 옛 천악산(天岳山)이다. 여기에는 구궁산(九宮山:1543m), 지각루(只角樓 : 1528m) 등 1,000m 가 넘는 몽우리가 12개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지도(地圖) “블로그 / 어이무사10 ・ 2021. 5. 23. 17:31”에서 펌한 것이다.
※ 블로그 / 어이무사10 ・ 2021. 5. 23. 17:31
▶ 이곳이 제주도(濟州島)가 맞는 것인가? 토산물(土産物)과 어류(魚類)들을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땅일 수밖에 없다. ‘제주도(濟州島)·탐라도(耽羅島)·섭라(涉羅)’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특산물(特産物)에 대한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오류(誤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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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계속]
이런 사실을 모르고 교열되고 위조된 많은 사서(史書)를 참고하여 찾으니 한양이 장강변에 있다느니, 서안(西安)이라느니, 현 만주의 요녕성(遼寧省)이라느니 하는 장광설이 나오게 되었고, 제주도(濟州島) 또한 현 해남도 라는등, 스리랑카 라는 등 실로 실소(失笑)를 금치못할 망언(妄言)들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이제는 정확히 알고 더 이상 황당한 추측성 말들에 현혹되어서는 안되겠다.
대륙에서 살다 오신 분의 증언을 토대로 사서(史書)와 서양인 기록을 통해 명확히 검증된 일들에 대해 아직도 그 지명이동의 역사적 사안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했거나 부족한 까닭임이 틀림없는 일이다.
3.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일본의 중앙정부가 현 필리핀의 생거터전에서 현 대만(臺灣)으로 옮겨온 것이 1853년 이후의 일이다.
일본이 필리핀 지역에 생거(生居)했기에 사서(史書)의 기록은 일본이 들입(入)자나 사람인(人)자와 같이 생겼다고 기록한 것임을 알수 있고, 이때 일본은 향료(香料)를 찾아 나선 서양의 네델란드나 포르투칼과 교역하면서 주변의 향료제도들에 대한 이권을 선점하게 되었고, 이를 보고 일부의 연구자들이 일본의 강역이라고 기록함에 따라 현재와 같이 일본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것처럼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확히 일본의 중앙정부는 필리핀에 존재했으며, 이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필리핀과 베트남 그리고 대륙 동남부의 막대한 군사(軍事)를 동원해 조선(朝鮮)을 침략했고, 이에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일본의 침략군 수를 일백만이라 기록했음을 우리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거대한 조선(朝鮮)과의 싸움이었기에 7년을 싸워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고, 일백만의 방대한 군사였기에 또한 조선과의 싸움에서 버틸수 있었던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일이다.
역사연구는 명확한 줄기와 대강을 세워야 할 일이다.
조선이 대륙에 존재했다는 명확한 줄기와 그 대륙의 강역을 통해 역사적 대강을 잡아 분석해 내고 핵심을 추려 올곧은 우리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야 한다.
이를 통해 중구난방으로 확대된 조선사(朝鮮史)의 오류를 극복하고 우리 스스로 절제된 모습으로 우리의 역사를 정확히 재단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우리의 연구가 온전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4.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本文 / 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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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疑問) 8
[8] 서양인(西洋人)들의 기록(記錄)에 대해서는 필자(筆者)도 대단히 중요(重要)한 사료(史料)라고 판단(判斷)한다. 고전(古典)이든 현대물(現代物)이든 이 모두는 “사료(史料)”에 포함(包含)된다.
여기서 문제(問題)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서양인(西洋人)들의 기록(記錄) 자체가 원본(原本)인가? 하는 것이고, 이를 번역(飜譯)하는 과정에서의 오류(誤謬)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오류(誤謬) 속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包含)된다.
기록(記錄) 당시(當時)의 단어(單語)의 뜻, 번역(飜譯)하는 분의 사고능력(思考能力), 사관(史觀), 지식(知識)등등이 영향(影響)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卽) 원본(原本)의 정확(正確)한 의미(意味)를 어떻게 전달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즉(卽) 우리로써는 번역(飜譯)본이나 해설(解說)본 만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왜(倭)=일본(日本)’의 영토(領土)는 시대적(時代的)으로 동진(東進)하는 모습으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현지(現地)에서의 사료(史料), 고고학적(考古學的)인 객관적(客觀的)인 유물유적(遺物遺跡)등은 현재(現在)에 이르기까지 밝혀진 것이 없고, 발표(發表)된 것이 없다.
따라서 이 모두는 “가정(假定)이고, 추정(推定)일 수밖에 없다.” 다만 “원전(原典)에서만이 그 같은 정황(情況)을 기록(記錄)해 놓고 있을 뿐이다.” 이게 또 중요(重要)한 점이다.
무엇으로 삼자(三者)들을 이해(理解)시키는 객관적(客觀的)이며, 합리적(合理的)인 설명(說明)을 할 수 있겠는가?
대륙(大陸)에서 살다 오신 분들의 증언(證言)이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누가 어떤 증언(證言)을 어떻게 했는가? 그러면 수많은 이주자(移住者)들과 그 후손(後孫)들의 증언(證言)은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점이 많은 사람들이 나타내고 있는 의구심(疑懼心)이다. 필자(筆者) 역시(亦是) 정말 궁금하다.
○ 위의 글은, 누굴 비난(非難)한다거나, 비하(卑下)한다거나, 비판(批判)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옛 선조(先祖)들의 조선(朝鮮)을 사랑하며, 진실(眞實)의 조선사(朝鮮史)를 찾아 40년을 갈구(渴求)한 자(者)의 의문(疑問)을 담은 것이다.
진심(眞心)으로 오해(誤解) 없기를 바라며, 양해(諒解)를 구합니다.
2021년 08월 20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