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국 서부의 이서국은 현재의 청도군으로 본래 이서국이었다는 기사가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습니다.
【건치연혁】 본래 이서소국(伊西小國)이었는데, 신라 유리왕이 정벌해서 빼앗고 뒤에 구도성(仇刀城) 경내의 솔이산(率伊山) 이(伊)는 사(巳)로도 쓴다. 경산(慶山) 가산(茄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烏刀山) 등 세 성과 합쳐서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했다. 구도(仇刀)는 구도(仇道), 오야산(烏也山)은 오례산(烏禮山)이라고도 하는데, 오도산이 그 지방인 듯하다. 경덕왕 때에 구도를 오악현(烏岳縣)으로 개칭하고, 경산을 형산현(荊山縣)으로 개칭하고, 솔이산을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쳐서 모두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세 성을 다시 합쳐서 군으로 하여 지금의 이름 일명 도주(道州) 으로 고쳤다가 곧 밀성에 붙였다. 예종 4년(1109)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혜왕 때에 군 사람 김선장(金善莊)이 공이 있어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감무가 되었고, 공민왕 15년에 다시 군이 되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청도군 건치연혁조
요약하자면 청도군은 본래 이서소국이었는데, 신라 유리왕대에 정벌되어 대성군으로 고쳐졌다는 내용입니다. 가장 오래된 사로국의 영역확장 기록이죠.
반면 삼국사기에서 가장 오래된 사로국의 대외확장 기록은 본기가 아닌 거도열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도(居道)는 그의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국경의 이웃에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그 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張吐)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유희 놀이를 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馬技)’라 불렀다. [군사를 동원하였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에 [거도는] 병마를 출동하여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거도전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은 각각 지금의 울산지역과 부산 동래 지역으로 비정이 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동국여지승람의 청도국 건치연혁조를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14년의 기사의 착오로 보기도 합니다만, 후대 신라의 팽창 과정을 볼때 이서국이 신라에게 복속되어 있지 않았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을 밝힙니다.
14년(297) 봄 정월에 지량(智良)을 이찬으로 삼고 장흔(長昕)을 일길찬으로 삼았으며, 순선(順宣)을 사찬으로 삼았다.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문제는 후대인 유례이사금때에 신라에게 정벌당했단 이서국이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는 것 입니다. 이는 주변국의 통치체제를 해체하지 못하고 군사적 위협과 회유를 반복하여 간접통치하던 사로국의 간접적인 지배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방의 고구려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토산물을 바치게 했던것과 비슷한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사로국은 탈해 이사금때의 영토 확장으로 지금의 경주에서 부산까지 이르는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후대의 읍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의 경계다툼의 판결을 사로국에 요청한것도 사로국의 이러한 지위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옥저, 동예와 같은 복속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고구려와 달리 보다 후진적이었던 진변한 지역의 맹주국들은 주변의 복속국들을 실질적으로 독립상태를 유지시킬수 밖에 없었고, 후대에 이서고국과 같은 반란(?)적 성격을 지닌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내용 추가
동사강목, 동국통감에 의하면 탈해왕이 장군 거도를 보내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합병한건 탈해 79년
- 참고문헌
신재호, 사로국 수취체계의 성립과 전개
이춘식,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형성과 조공외교:춘추시대를 중심으로
이인철, 사로국의 진한소국 정복과 국가적 성장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한국 고전 종합 DB :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원본 : http://cafe.naver.com/historygall/7918
첫댓글 정말 소국들이 많았군요..
저 시대를 흔히 열국시대라고들..
일본 전국시대와 비슷하군요.
일본서기의 야마토국 성립과정이나 중국의 춘추시대 초반이 아마 가장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서기의 경우 신화적인 윤색은 많긴 한데, 고대 일본 열도에 퍼져있는 수많은 잡국-_-들을 토벌하는 내용들이 있거든요. 중국의 춘추시대엔 각 지역에서 점차적으로 영토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고요. 아직 행정능력이 발전하기 전 시대에 촌락 규모의 국가들이 많이 존재하는 것은 대부분 지역에 보편적 현상일 수 밖에 없는듯 합니다 ㅎㅎ
센고쿠시대나 춘추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점이있는데 앞의 두시대는 상징적인 형태로서 중앙의 구심점, 즉 명목으로서의 '중앙정부'라는게 존재하는데 비해서 사로국은 그런것과 관게없이 단순히 여러개의 국가를 정복한거죠.
차라리 비슷하다면 로마 왕정시대가 더 비슷한듯하네요
일본 전국시대는 나말여초 호족 난립시대에 비교해야죠.
어 라이트온공 유럽화에도 있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