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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다할 궁(窮))
(그림 2 궁(窮)의 옛 모습)
(그림3 穴혈)
이 궁 자에는 크게 세 글자가 합쳐져 있어요. 첫째 한 글자는 밑에는 원래 없는 글자로 위에 있는 것만 땄어요. 움집이에요(그림3). 옛날 난방이나 냉방이 안 되던 시절에 이렇게 땅을 파고, 상대적으로 보온을 하려면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내고 더위로부터 좀 지켜내려면 좀 땅을 파는 게 좋았죠. 좀 땅을 파는 대신에 기둥을 크게 안 세워도 되죠. 그리고 움을 덮어서 집을 만들었죠. 그 가운데 위에 있는 형태만 딴 것이 (그림3)처럼 이렇게 된 거죠. 이게 구멍 혈, 움집 혈(穴)이죠(그림3).
(그림4 身몸)
그런데 여기 아래에 몸 신(身)자를 놓았습니다. 몸 身자는,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그 사이에 배가 있죠. 배 안에 뭐가 들어있죠(그림4). 원래는 임신했다는 의미예요. 임신한다는 건 뭐죠? 의미를 좀 확장해보면 내일을 재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죠. 내일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사람 몸이 평균적으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그래서 이 몸 신자가 처음에는 임신한 것을 가리켰으나, 나중에는 사람의 몸놀림이 일상적인 자기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이렇게 신이라고 하게 되죠. 그래서 육체가 아니라 그 육체를 굴리는 시스템을 말하게 되죠. 그래서 이렇게 신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그림5 呂여)
그 다음 활 궁(弓)이 들어가 있는데, 예전에는 활 궁이 이 (위에 있는) 궁이 아니었어요. 이렇게 안 쓰고 이 옆에 몸을 이렇게 빌 공(工)을 쓰는 게 아니라 법 여(呂)을 써서 써요. (그림2) 이렇게 썼던 것이 글자가 바뀌어가지고 활 궁으로 바뀌었는데요. (그림 5)
궁의 본래 글자와 그것에서 유래된 궁핍의 과거와 오늘날 의미
이 여(呂)라는 것은 허리뼈를 의미해요. 우리 법 뼈라고 하는 게 허리뼈예요. 입구 2개 또는 그 사이에 점을 찍든 말든 간에 이게 허리뼈예요. 그리고 이게 법(法)이에요.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의 몸의 근간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이 여(呂)가 들어가 있어요. 여기 굽힌 것은 곧 허리뼈를 굽힌 거죠. (그림2)
그러므로 궁 자는 원래 몸이 움집에 들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에요. 어떨 때 그렇게 되죠? 너무 먹고 살 게 없어서 궁핍한 거죠. 그래서 궁핍(窮乏)이라고 쓰죠. 그 다음에 누군가가 쫓아와요. 잡히면 잘못될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 그러죠? ‘궁지(窮地)에 몰렸다’고 쓰죠. 이 궁 자라는 것은 크게 보면은 어렵다! 어쨌든 먹고 살 게 없어서 처지가 어렵다! 몸의 놀림이 자유를 잃고 궁지에 몰려서 추궁 당하는 신세가 되고 이럴 때 궁 자를 쓰죠.
그리고 이 궁 자를 가지고 만든 말 가운데 우리가 누구나 알 수 있는 꽃 이름이 하나 있죠. 무궁화라는 꽃이죠. 무궁화는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은 꽃이에요.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에요. 어디 쫓길 만큼 그렇게 하루 이틀 피고 마는 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엄청 길게 펴서 1년 내내 피는 꽃도 아니에요.
그저 궁핍 하는 정도를 면했고 궁지에 쫓길 만큼 오늘 폈다 내일 지는 나팔꽃 같은 신세도 아니고, 산차화나 동백꽃처럼 아주 오래 피어 있지도 않죠. 그러니까 우리 애국가가 좀 웃기죠.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이러는데, 무궁화는 화려하지 않아요. 중정(中正)이에요. 너무 모자라지도 않고 너무 넘치지도 않고, 너무 쫓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긴 욕심을 부려서 세월을 점령하지도 않는, 그런 게 무궁화라는 뜻인데요.
아무튼 이 궁(窮) 자를 보면서 쫓긴다! 몸이 움집에 들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있다! 이걸 보면서 (드는 생각이) 이게 궁핍이면 현대인들은 더 못한 거 아닌가! 움집도 없고, 진짜 먹을 게 없으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돼요. 대한민국에 살면서 40대까지 왔다면, 절반 정도의 사람은 한 번 내지 몇 번 정도의 위기감을 느꼈을 법한 일이에요. 움집도 없는 그런 느낌은 우리 40대 이상, 50대 가까이 온 분들이면 겪었을걸요. 이 나이 대를 넘은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두 번은, 아니 다 한 번씩 움집도 없는 그런 느낌을 겪었을 것입니다. 여기는 움집이나 있어요. 심지어 지금은 움집이 소유가 되기 시작하니까 움집 장사로서 건설사, 움집 빌려주기로서 주택임대업 등 이런 게 되는데요. 그래서 이것까지 업이 되다 보니까 움도 없는 처지로까지 몰려왔지만요.
아무튼 이 궁이라는 것은 원래 예전에는 소유가 없으니까 땅 파고 내가 그냥 지어 올리면 되니까, 하루 만에 지으니까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에요. 이 궁하다는 게 그 중에 가장 궁한 게 우리 인생에서 사궁(四窮)이라고 그랬어요. 4 가지 궁한 게 있다, 환과독고(鰥寡獨孤)라는 말 들어보셨죠?
환이라는 것은 늙어서 부인이 없거나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 요즘은 여자친구도 부인 역할 충분히 하니까, 어쨌든 늙어서 짝이 되는 여인이 없는 사람을 환이라고 그러죠. 반대인 사람을 과라고 그러죠. 그래서 아무나 보고 남편 없다고 과부라 그러면 안 돼요. 늙어야 돼요. 늙지 않고 남편이 없는 사람은 과부가 아니에요. 그냥 독거인이에요. 남자도 번역해서 마찬가지인데, 남자는 환이라는 글자를 잘 안 쓸 뿐이죠.
그 다음에 늙었는데 의지할 데가 없는 거예요. 가족 단위의 생활을 할 때 아래 세대가 없는 거죠, 그걸 독이라고 하죠. 그 다음에 아직 어린데 조실부모 하거나 해서 기댈 데가 없는 거예요. 그걸 고라고 해요. 환과독고가 가장 어렵다 해서 예전부터 환과독고를 보살피는 것이 복리의 가장 기본이었죠.
이제 여기 이 자리도 보면 한두 개씩 해당되는 분들 가 있으실 거예요. 최대한 2개 이상은 해당 안 돼요. 그렇죠? 남자, 여자인 이상 하나밖에 해당 안 되고 그 다음에 독이 같이 겸해질 수 있죠. 그 다음에 고는 나이가 든 사람은 고가 될 수 없죠. 그래서 최대한 두 개까지는 더 가질 수가 있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만드는 것이 시간
아무튼 그렇게 살아요. 이렇게 사는 사람도 가지고 있는 게 있어요. 시간을 가지고 있어요. 살아있다는 것은 자기가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흔히 시간과 공간의 좌표 축 위에 어딘가 자신을 그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그런 좌표축이 어디 있어요? 우리 관념이 만들어낸 거죠. 그냥 내가 존재해요. 내가 존재하니까 그냥 존재해 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시간이에요. 내가 가고 있잖아요. 남이 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가고 있잖아요. 이게 시간이에요. 그럼 시간은 뭐죠? 내가 만들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라는 것은 내 삶이 뿜어내는 하나의 현상이에요. 객관적으로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만 가는 게 아니라, 개도 가고 고양이도 가고 꽃도 가고 나무도 가고 같이 가요. 표준은 필요했겠죠. 사실 공간이 어디 있어요? 공간을 번역하면 스페이스(space)인데 심지어 공(空)이 스페이스예요. 공간은 스페이스 비트윈 스페이스(between space)예요. 비트윈 스페이스 앤 스페이스(between space and space)? 이건 말이 안 돼요. 스페이스와 스페이스 사이에 뭐가 있죠? 또 스페이스에요. 그런 말도 막 써요.
아무튼 그런 공간과 그런 시간 위에 나를 점으로 놓고 내 삶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좌표 이전에 나는 존재하는 거죠. 내가 존재해서, 내 힘으로 내 안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나는 걷고 있고 말하고 있고 입고 있고 먹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자고 있는 거죠. 자고 있는 사이에 또 남의 에너지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에너지가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쉬고 있는 거죠. 쉬는 것도 가고 있는 거에요. 가고 있는 그것이 시간인 거죠.
가는 것은 나죠. 따라서 시간은 내가 만드는 거죠. 내가 만들지 않는 시간은 없다는 거예요. 이 우주라는 것은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시간의 총합인 거죠. 생명 현상의 총합인 것이지, 별도의 축이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마치 축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는 거예요. 그 순간 나는 우주에 부품이 돼버리죠. 우주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점이 돼버리죠. 내리다가 금방 녹아버리는 눈이 되어버려요. 내리다가 금방 말라버리는 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한, 자기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죠. 시간은 만드는 것이지, 나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내 삶이 달라져요. 미리 시간으로서 착착 착착 줄여가지고 100년을 그려놓고 100년! 100년 인생이라고 하죠. 100년 인생이 아니라 나는 오늘 움직이고 있는 거죠. 오늘 움직이고 있는 거죠. 오늘 나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존재인 거죠.
자신의 시간을 생산해 내지 못하도록 변화시키는 행위, 공(工)
별은 별대로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시간을 만들어내는 존재를 어느 날 시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존재로 바꿀 수 있죠. 뭐죠? 죽이는 거죠. 죽이는데 죽이는 이유는 다양하겠죠. 아이들이 심심파적으로 개구리 죽이듯이 죽일 수도 있지만, 심심파적은 뭐 그러면 목적 아닌가요? 심심한 것을 풀기 위한 목적이 있죠.
그 다음에 저기 살아있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를 베어다가 나무를 죽였죠. 그래서 책상을 만들고 걸상을 만들죠. 가구를 만들고 그러죠. 그리고 저기 잘 자라고 있는 꽃들을 꺾어다가 꽃꽂이를 하죠. 다 목적이 개입돼 있겠지만 어쨌든 생명, 그 시간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하여금 더 이상 시간을 못 만들도록 하는 거죠.
그걸 뭐라 그러죠? 우리는 한자로?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도록 뭔가 변화시켜버리는 행위, 그걸 공(工)이라고 해요. 우리가 공업(工業)이라 할 때 공업의 동양적인 의미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물건을 가져다가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존재로 변환시키는 거예요. 그게 공이에요. (그림6)
(그림 6 장인 공(工))
공(工)의 잘못된 응용
이런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요. 옛날 처음에 이런 해석을 했던 것은 설문(說文)에서 나와요. 그런데 지금도 그 설문의 범위에서 못 벗어나요. 설문이라는 글을 썼던 사람은 허신(許愼)인데, 이런 사람과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사림이 있어요. 1930, 40년대 방정환 선생이 누구 사위인지 아시나요? 손병희(孫秉熙) 선생님. 그래서 아이에 대한 개념이 남달랐던 거예요.
손병희 선생보다 더 뛰어났던 분이 두 아드님들이에요. 둘째 아드님은 러시아에서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졌죠. 20대 후반에 돌아가셨죠. 아무튼 간에 그 시기에 아이들을 강조 하니까, 그래도 아이들을 잘 돌보는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 갔다 온 분들이 보니까 공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서 노래를 지어요.
그런데 그 노래가 아이들의 현실과 너무 맞지 않는 노래가 나와요. 많이 기억하는데 갑자기 기억하려고 하면 저도 까매져요. ‘앞에서 네가 얘기해라’ 그러면은 여러분들만 까매지는 게 아니라 저도 까매져요. 까매지는 가운데 쫓겨나온 한두 마디 하는 거예요. 돌아서서 ‘아, 이거 빼먹었지!’ 저도 그래요.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면서도 연예인이에요. 오늘 연예인처럼 입고 왔지만 제가 연예인은 아니에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여러분 아시죠?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그 다음에 가사 뭐죠? ‘여름의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여름에 나무하는 나무꾼 봤어요? 나무는 다 가을 이후에 해요. 그렇죠? 낙엽이 진 다음에 적어도 그 나무가 한 해 동안 자기의 시간을 누린 다음에, 그래도 겨울로 들어가서 마지막 모습을 가질 때, 그때가 나무를 하기에 안전하기도 하고 실제 그 이전에는 산길에 길도 나지 않아요.
그런데 영국 유학 갔다 오신 분의 눈에는 그냥 여름에 부는 바람이, 기껏 해서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불어다 주는 고마운 바람인 거예요. 여름에 어느 누구도 나무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는 분께서 작사하신 거죠.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그게 저 때까지, 그 이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있던 공업 할 때 공의 도구가, (그림 7) 이게 도구라는 거, 아직까지 안 고쳐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또 다른 두 개의 글자가 만들어진 거예요. 공 자는 이후에 만들어진 글자인데, 아무튼 이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고요.
(그림 7 빌 공(空))
생사(生死) 전환의 의미로써 공(空)
工이 움막 안에 들어가요. 이렇게 들어가면 뭐가 되죠? 빌 공(空)이라고 그러죠. (그림 7) 움막 밑에 공이 들어가버렸어요. 공이라는 도구가 움막 밑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이것은 두 가지예요. a가 b로 연결되고 전환되는 겁니다. a가 b로 전환됩니다. 시간을 만드는 자가 시간을 못 만드는 자로 전환된 거예요. 뭐죠? 죽음이죠! 죽은 사물이거나 죽은 사람이거나 죽은 동물이죠. 그것이 움집 안에 있어요.
그런데 신선실이라 못하잖아요. 사실 그게 신선하다고 쓰고 있어요. 우리 음식을 먹을 때 신선(新鮮)하다는 게 뭐죠? ‘신선한 맛이 나요’ 무슨 뜻이죠? 객관적으로 얘기하면 금방 죽은 맛이에요. 금방 죽은 그걸 우리는 신선하다고 표현해요. 우리 말이라는 게 그렇게 우리 자신을 속여요.
이 커피포트는 뭐로 만들어졌죠?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죠. 무슨 뜻이죠? 녹 없는 쇠! 왜 녹이 없죠? 이게 녹으로 만들었으니까 녹이 없는 거죠. 애초에 녹으로 만들었으니까 녹이 슬지 않는 거죠. 이렇게 해 볼테니 여러분 사실래요? ‘전다지 녹으로 만든 쇠!’ 이렇게 하면 사실래요? 아니면, ‘녹슬지 않은 쇠!’ 이렇게 하면 사고 싶죠? ‘녹으로 만든 쇠!‘라고 하면 안 사고 싶죠?
말을 그렇게 하면서 비틀어 온 게 한두 세대가 아니고, 1~20년이 아니고, 100~200년이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왜곡된 표현을 우리는 당연하게 쓰고 있을까요? 이 스테인레스는 100년도 안 된 거잖아요. 이게 올 스테인레스 스틸(all-stainless steel)인걸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팔릴 거 알고 회사 차원에서 스테인리스 그 기능에 주목한 거예요. 그래서 스테인리스 스틸이에요.
그래서 금방 죽은 맛이 나요. 그러면 음식이 맛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신선한 맛은 죽였으니까 먹는 거 아니에요? 그럼 ‘산낙지’는 먹으면서 죽이는구나. (웃음) 이런 예외적인 상황도 있어요. 그런데 대개는 신선하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이미 잃어버렸을 때죠. 살아 버림을 잃었다는 것은 자기가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존재가 됐다는 거죠. 자기 시간은 자기가 움직여서 만드는 거니까.
아무튼 그렇게 이제 공이 움집에 이렇게 들어갔어요. 그럼 이건 뭐죠?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존재가 된 거예요. 이것이 외형적으로 확대된 게 뭐죠? 좀 더 이 존재가 살아있다가, 죽은 존재가 살아있다가, 이렇게 죽게 된 존재가 된 것, 이런 게 공이에요.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게 가장 두려운 공(恐)이에요. 가장 두려운 것은 무얼까요? 내가 지금 시간을 만들고 있어요. 내가 움직이고 있어요. 움직이는 게 이게 시간이니까, 움직이는 건 내가 하고 있으니까, 시간은 내가 만드는 거잖아요.
공(工)의 음가를 지닌 글에 담긴 의미- 생명으로서의 시간, 생산 작용으로서의 시간
그런데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게 가장 두려운 거잖아요. 그게 두려울 공(恐)의 발음도 그래서 거기서 온 거잖아요. 공으로 발음 나는 모든 한자에는 그와 같은 시간을 만들다가 더 이상 시간을 만들지 못하게 되는 그 정황과 관련된 최대 공약수와 최소 공백수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 무덤 위에 초막을 치우고 이 사람이 조금 중요했나 봐요. 위에다가 돌을 얹어요. 뭐죠? 고인돌이에요 우리 ‘고인다’는 말을 경상도 분들 뭐라고 그러죠? ‘공인다’ 그러죠. 원래 ‘고인다’ 그러지 않죠. 경상도 출신인 분 손 살짝 들어보세요. ‘공인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공이다’, ‘공인다’ 그러죠. 원래 고인다는 말의 ‘ㅇ’이 두 개나 마찬가지예요. 두 개는 붙어봐야 ‘ㅇ’하나이니까, 그 공도 거의 그런 의미에서 온 말이에요. 아무튼 이렇게 고가 돼요.
제가 자사를 만드는 이싱에 갔는데, 지금은 저는 마음으로는 제일 친했던 작가라고 생각을 해요. 그분도 그랬을 거라고 믿어요. 서달명(徐達明) 대사인데요. 지금은 돌아가신 분입니다. 서달명 대사는 평소에 웬만해서는 술 먹는 자리에 안 와요. 술도 안 먹어요. 왜? 작업해야 되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한 자리에 왔고 또 그 자리에 또 다른 친구도 남경에서 오기로 했어요. 남경공항에서 내렸다고 ‘나 어디로 가야 되냐?’ 전화가 온 거예요. 그랬더니 ‘정산(丁山)이라는 곳으로 오라’ 이싱 자사차호 만드는데 지명이 정산입니다. 이렇게 쓰는 정산이에요. (그림8) 중국 발음으로는 띵산이라고 얘기해요. 띵산! 우리도 산이라고 하잖아요.
그림 8 정산(丁山)
옛 고(古) 형성의 사회적 배경
아무튼 발음이 다 달라지긴 하죠.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든 고, 공 하는 것들은 더 이상 생명을 생명으로서의 시간으로 생산 작용을 못하는 거예요. 이 고인돌이 되죠. 고인돌이 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은 아니고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되면은, 옛날로 치면 홍박사님도 정도 되는 분이죠. 옛날에 나이가 한 30 넘었는데 서른 다섯 정도 됐는데 그 마을의 지도자를 누구로 할까 할 때1번의 원칙이 뭔지 아세요? 하늘과 머리의 작용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 머리가 광이 나는 사람! 죄송합니다. (웃음) 아무튼 그런 분이나 고인돌에 들어가는 거죠. 나머지는 어떻게 되죠?
유럽에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라는 도시가 있어요. 유럽 최초의 대학이 세워졌던 곳이고 인체 해부 실험이 제일 먼저 진행됐던 의과 대학이 있는 곳이죠. 물론 그때는 해부 수업이라고 하지 않고 해부 극이라고 그랬어요. 극장처럼 보여주면서 해부를 했던, 그러면서 배우는 거죠. 그 대학이 유럽 최초의 대학이다 보니까 유럽 전체에서 공부하러 오는 거예요. 학생들이 유럽 전체에서 보면 어떤 학생들일까요? 어느 지방, 잘 나가는 집안, 어느 왕족, 어느 귀족, 어느 공작의 아들, 어느 자작의 딸 이런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자기들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을 초빙하는 거죠. 초빙하는 사람은 그냥 기껏 해봐야 뭐 단테(Dante), 그 다음에 갈릴레오(Galileo)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레오든 단테든 집안이 미미한 사람들입니다. 귀족으로서 행사할 수 없는 중산층, 기회를 가져서 배움이 풍부했던 사람들이었던 거죠. 이 사람들을 모셔다 놓고 배워보는 거예요. 토론해보니까 이 사람 가르치는 게 영 신통치 않은 거예요. 내보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잘하는 거예요. 그러면 2급 교수를 올려요. 더 잘 하는 거예요. 1급 교수를 올려요. 더 하잖아요. 중국식 표현으로 원사급 교수로 올려요. 그 칼리지(college)를 총괄하는 교수로 즉 학장급, 총장급 교수로 올리는 거예요. 권리를 학생들이 갖고 있는 거죠. 그 배경이 너무 무시무시하니까 그게 유럽 대학에서 학생들이 상아탑이라 하면서 자율권을 가졌던 역사의 시작이에요.
사실은 귀족주의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상아탑으로 학생들의 자율이 중요하다는 이 당연한 논리 안에는 봉건시대의 귀족적인 상황도 같이 사실은 있는 거예요. 뭐든지 동전의 양면이 있는 거죠.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해서 대학의 진리의 전당이라는 상아탑으로서의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귀족주의 때문에 있었던 거예요. 평민 학생들이 와서 배웠더라면은 단테! 못 쫓아내죠. 갈릴레오 갈릴레이! 못 쫓아내죠.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이 와서 가르쳐요. 마음에 안 들어요. 못 쫓아내죠. 힘이 없는 평민이니까.
그 평민들 어디에 살죠? 성 밖에 살죠. 성 밖 골목에 살죠. 우리도 옛날 조선시대로 치면은 남대문 밖에 살죠. 장사했으니까 돈은 좀 있겠죠. 동대문 밖 진곡에 살죠. 그렇게 살던 사람들은 그 동네를 부르그(bourg)라 그랬죠. 합스부르그 무슨 부르고, 부르그라 그랬죠. 부르그에 사는 사람들이 뭐죠? 브루주아(bourgeois)죠. 부르그 출신들, 부르그에 살던 인간들이 부르고와, 부르조아죠. ‘g’의 발음이 프랑스 다르고 이태리 다르고.
그런데 그런 부르주아들 출신에서 학자가 나왔어요. 그리고 학생이 나왔어요 학자와 학생 가운데 누가 더 권위가 있을까요? 교수 못 쫓아내죠. 한국에 왔는데 유럽 귀족주의 시대 때처럼 ‘어, 선생이 신통치 않아, 나가, 우리가 대학의 주인이야’ 학생들이 하잖아요. 현실적으로 힘들죠.
저 다닐 때. 지네 아버지가 소 팔아 갖고 대학을 보냈어요. 뭐죠? 소 안 팔면 못 보내는 형편이죠. 논 팔아서 보냈어요. 논 안 팔면 못 다니는 형편이죠. 교수는 제가 다닐 때도 월급 70만 원 받았어요. 대충 계산해 보면 몇 년도인지 나올 거예요. 그때 생산직 노동자들은 월급 3만 원에서 7만 원 받고 시작해요. 교수가 힘이 있죠. 대학은 교수들과 재단의 것이죠. 출발이 달랐던 거예요. 출발이 다른 것 치고는 굉장히 많이 달랐죠, 대학이 그래도 귀족주의가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의 근처까지 왔어요. 많이 온 거예요.
아무튼 이제 그렇게 왔는데 그런 사람들이나 여기 묻히죠. 그래서 볼로냐의 대학에 가면은 그 학교 벽마다 이 대들보가 있는 위의 벽마다 귀족 집 안의 문장들이 다 있어요. 거기에 문장 없으면 유럽의 귀족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있는 귀족들의 문장만 보면 어느 집 문장인줄 알잖아요. 그러면 유럽에서 가장 지식이 넓은 사람이에요. 모든 지역의 주요 인물들과 주요 지역의 주요 가문을 다 아는 것만큼 넓게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실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굴까요?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 성씨의 파와 갈래까지 다 아는 사람이 제일 유식한 사람이에요. 대한민국 다 아는 거예요. 사람이 살고 지내는 곳이니까요. ‘어디 집안 무슨 파? 몇 대 손이라고?’ ‘어디 산다고? 어디 살다가 이렇게 이게 그 집까지 갔겠구먼‘ ‘아닌데요’. ‘그럼 원래 여기 있었는데 아버지 때 저기서 거기 있다가 다른 길로, 현대적인 일로 가겠구먼’ 다 나와요. ‘그 옆 동네 누구 많이 살지? 어느 성씨 많이 살지? 그 집이 옛날부터 뭐 하는 집이야. 지금 뭐 하는지 몰라’ 이렇게 나와요. 한국만 하더라도 좁은데 넓은 유럽의 각 집안들을 다 안다는 거 엄청난 지식이에요.
4천 개 정도의 귀족의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그 문장이 4천 개나 붙어 있지만 실제 4천 가문이냐? 그렇진 않아요. 메디치 가문이 썼던 문장이 6개예요. 나누기를 다 서너 개씩 해야 돼요. 그러면 실제로 유명 가문은 7~800개가 있었다고 봐요. 역사적으로 흥망성쇠를 했기 때문에 늘 동시에 존재하던 건 한 300개 가문 정도가 유럽을 움직였다! 그렇게 보면 되죠. 그 정도 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구성원이 그럼 어떻게 묻죠? 묻어야죠. 옛날에는 매장이니까. 티베트처럼 새한테 시체를 쪼개주는 천장을 했을 리도 없고 풍장을 했을 리도 없고 다 아시다시피 매장을 했죠. 매장할 때 뭘 같이 묻을까요? 거기에 따라서 부장품이라는 게 나오잖아요. 부장품의 1번은 그가 쓰던 집안의 문장이에요. 문장이 대충 다 뭐처럼 만들어져 있죠? 방패처럼 만들어져 있죠.
가문의 문장을 새긴 방패에서 유래한 옛 고(古)와 파생 글자들
왜? 방패의 제일 앞에 그렸던 이 문장이고 모든 집안의 문양은 방패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나갈 때 맞고 죽을 수도 있잖아요. 상대방이 죽이더라도 누구를 죽이는지 알고 죽여요. 내 왼손에 들고 있는 이 문장은 내 집안의 상징 보호예요. 그게 방패예요.
(그림9 옛 古)
방패는 어떻게 생겼죠? 대충 뭐 이렇게 생겼지 않았겠어요? (그림 9) 방패 밑에 이렇게 사람 하나 묻어놨어요. 우리 천(天) 자 쓸 때 기억나시죠? 하늘 천 자 쓰실 때 동그라미가 일자로 바뀌죠. 이것도 일자로 바뀌면 되죠. 언젠가 바뀌겠죠. 그럼 어떻게 되죠? (그림 10)
(그림 10 옛 고(古)의 상형자)
(그림 11 고(古)와 천(天)의 연관성)
이게 옛 고(古)자에요. (그림 12) 옛 고자 위에 있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방패예요. 그러니까 사람 묻고 사실 입 구(口)가 아니라 여기까지는 움이고, 요게 사람인데, 이건 이렇게 나중에 와서 입구가 돼버렸고 이거는 원래 방패였는데 이게 가늘게 돼서 십자만 남은 거예요. (그림 11)
하늘 천 자 이렇게 쓰다가 위에 이게 영역이 한 일(一)자가 돼버리잖아요. 이것처럼 옛 고자도 그럼 뭐죠? ‘고이다’, ‘공’ 같은 음가라는 얘기죠. 고인(古人)이라 그러죠. 이렇게 옛 고, 이거는 죽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옛 사람이라는 뜻이죠.
(그림 12 옛 고(古))
이미 시간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생산하지 못하는 사람! 썩어가죠. 시신도 자기가 썩는 게 아니죠. 다른 존재들이 썩게 하고 있는 거죠. 세균을 비롯해서 바람을 비롯해서 다른 존재들이 썩게 하고 있고 마르게 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자신을 마르게 하고 있지 않죠. 자신은 더 이상 시간을 생산하지 못하죠.
그런데 이 사람은 스토리가 남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고인이에요. 고 누구누구.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죠. 객관화된 사람이 아니라 고(故) 박현 선생. 이러면은 어떤 분한테 여기 계신 어떤 분한테는 그냥 고인이고 어떤 분한테는 그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되겠죠.
그래서 음가는 같다는 거예요. 왜? 최소 의미는 이 고(古)자에 있으니까. 옛 고에 있으니까. 더 이상 시간을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고인이고 그가 있는 상태가 空이에요.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와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 사이에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죠.
(그림 13 이미 지나간 때 고(故))
해도 움직이잖아요. 태양이 누가 움직이게 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안에 있는 중력과 에너지 작용을 통해서 해는 돌고 있잖아요. 자신도 돌고 있고 또 다른 어딘가의 대(大)태양계를 향해 돌고 있겠죠. 또는 중(中)태양계를 향해 돌고 있겠죠. 그 중태양계는 이 소(小)태양계들이 도는 것을 유지한 채 또 대태양계를 돌고 있겠죠. 그 중태양계를 안드로메다라 하는지 대태양계를 안드로메다라 하는지 그건 천문학자들의 몫입니다.
달은 지구를 향해 자신이 돌고 있잖아요. 지구는 달이 돌고 있는 채 그걸 전제로 해서 또 태양을 돌고 있잖아요. 태양은 그걸 다 전제로 해서 또 다른 태양을 돌고 있잖아요. 그 태양은 또 다른 것을 다 전제해서 또 다른 큰 태양을 돌고 있잖아요. 다 시간을 만들고 있는 거죠. 같이 함께 만드는 시간이 우주인 거죠. 그게 울과 줄인 거죠. 함께 돌고 있는 테두리를 ‘울’이라고 하고, 울타리라 하고 그것이 함께 돌고 만들어내는 시간을 ‘줄’이라고 하는 거죠. 우주라는 것은 ‘울’과 ‘줄’이죠. 우리가 말하는. 현대인들이 말하는 공간과 시간이죠.
아무튼 이렇게 고인은 생겨요. 그리고 시간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해요.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고 내보낼 수 없다는 얘기예요. 인풋(input)도 못하고 아웃풋(output)도 못한다는 얘기예요. 인풋하고 아웃풋 할 때 눈 한 번 크게 안 뜨면 순식간에 지나가요.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럴 수 있어요.
한 끼 밥 먹고 빨리 화장실에 가는 분들은 30분 만에 가는 분이 있지만, 방금 먹은 거 싸러 가는 건 아니죠. 그건 자루죠. 그럼 죽죠.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저는 진짜로 인풋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먹는 게 때려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때려 넣었으니 걱정이 되죠. 자기가 먹어야 되는 상황에서 정말로 필요해서 먹었다면 나가는 게 걱정될 리가 없죠.
시간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
아무튼 우리 삶이 잠깐 들어와서, 밥이 들어왔다가 소화가 돼서 나가는 그 인풋, 어쩌면 숨 한 번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것이 반복되고 있는 거죠. 그 반복 활동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시간이 거죠. 시간은 생명 작용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고인을 갖고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이들에 의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들을 보고 있는 시간을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흘러가는 거죠.
이렇게 이제 갑니다. 그래서 아까 공도 말씀 드렸고 무궁할 때 궁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그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이에 여기 함께 모여서 또 하나의 시간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같이 지금 시간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내가 그냥 어디 참여하고 참석한다 그러잖아요. 자신이 초라해져요. 내가 지금 내 시간 활동을, 내 시간 생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시간에, 내가 만드는 시간에, 내가 색을 입히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들고 있는 시간에 내가 빛을 얹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들고 있는 시간에 무언가의 따뜻함을 얹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만드는 시간이, 내가 토해 놓는 시간이 차가우면 세상은 차가워요. 내가 만드는 시간이 따뜻하면 세상은 따뜻해요. 내가 만드는 시간에 빛이 나면 세상도 빛이 나요.
제가 네 번째인가 그 말씀을 드렸죠. 사람의 뇌는 가소성이다. 사람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와 달라서 무언가를 바로 받아들이고 그걸 통해서 다른 어떤 변화 작용을 주도적으로 한다는 거죠. 가소성이다! 뇌가 아프다고 생각하잖아요. 실제로 아프잖아요. 그럼 뇌가 그걸 받아들여가지고 아픈 시스템을 끌고 가요.
그래서 ‘나는 안 나을 거야.’ 하는 그 순간 뇌는 아픈 상태로 가소화해 만들어내요. ‘나는 앞으로 계속 아플 거야’ ‘나는 못 살 것 같아’ 못 사는 방향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거죠. 가소작용을 해요. ‘저기 가면은 추울 거야’ 벌써 추워질 몸의 준비를 다 하고 들어가죠. 그런데 뭐도 모르고 들어가면 들어갔다 한참 있다 추워서 튀어나오죠. ‘어, 추워’ 그러고 튀어나오죠. 미리 준비하고 들어 간 사람은 그러지 않죠. 이미 거기에 가사 작용에 의해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몸을 만들어 갖고 들어가죠.
뜨거운 줄 모르고 이렇게 집어넣었다가 한참 후 ‘엇! 뜨거워’ 빼내지만은 이미 저기가 얼마만큼 뜨겁다는 걸 알고 들어가잖아요.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내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이상은 못 견딘다고 생각하잖아요. 거기에 따라서 몸이 다 가소가 돼 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던 범위를 벗어나는 온도가 느껴지면 빼버리는 거죠. 그 이전까지는 견딜 수 있죠. 그런데 그 범위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70도에서 손을 빼고, 어떤 사람은 60도에서 빼고, 어떤 사람은 40도에서 빼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한겨울에도 영하 30도, 40도 내려가도 그냥 빤스 한 장만 입고 다녀요. 제 몸이 특수해서가 아니라, 제가 영하 40도까지 맨몸으로 다녀도 된다고 저는 가소돼 있는 거예요. 반면 저는 30도만 되면 귀찮아요. 30도 이상은 안 다니려고 가소화돼 있어요.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욕망을 내죠. ‘100살까지 살아야 되는데’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100살까지 살 거야’ 하는 사람들이 100살까지 살아요. ‘100살까지 사는데 조금 무서워’ 그 사람은 좀 무서운 상태를 겪으면서 살아갈 거예요. 부들부들 떨면서! 아플까 봐 전전긍긍 하면서! 그게 자기 머리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단식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단식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단식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한두 번 자기 몸을 비우기 위해서 하는 건 괜찮아요. 상습적으로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면은 머릿속에서 굶었을 때의 몸의 상태를 만들어버려요. 안 그러면 못 버티거든요. 특히 한 3일째 되면 먹고 싶어 환장할 때, 그때 어느 순간 몸 속에서 가소 상태가 일어나면서 안 먹어도 되는 몸으로 전환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이제 복식을 해서 먹죠. 그러면 그때 가서 또다시 바꾸는 거예요.
찰흙 아시죠? 찰흙을 이렇게 해와서 이렇게 작업을 해요. 뭘 만들어요? 언제까지 가능하죠? 찰흙이 다 마르기 전까지만 가능해요. 찰흙에서 수분이 다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못 만들어요.
사람의 가소성도 한도가 있는 거예요. 너무 여러 번 풀었다 놨다를 반복하면 견딜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해요. 그래서 단식을 상습적으로 하지 말라! 이것은 지금 이 사회에서 아무도 실험 안 해보고 나온 결론이에요. 시시껄렁한 약 하나도 FDA 허가를 안 받으면 못 파는데 인간의 생명을 더 건강하게, 더 약하게 할지도 모르는 그 가능성을 30년, 40년, 50년의 실험 테스트 없이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 용감해요. 무모한 거죠. 무모한 거에 어떤 논리도 갖다 붙여봐야 견강부회(牽强附會)예요. 적어도 60년, 70년의 경험이 나온 다음에 얘기예요. 지금은 그분들이 60년, 70년 뒤의 스스로 자원한 자료가 되고 있는 거예요. 그 자료의 결론은 피눈물로 나올 겁니다. 정말 몸이 괴로워서 안에 한 번은 다 씻어 내고 싶을 때 한두 번 하고 말아야 돼요. 그건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아무튼 뭐, 그 얘기하자는 건 아니고요.
지난번에 얘기했잖아요. 최대 공약수도 만들어야 되고 최소 공배수도 만들면서 문자를 만든다! 목요일 날 여기 점장님께서 여기 앉아 계시고 저는 여기 앉아 있고, 47년생 어떤 분은 여기 앉아 계시고, 중간에 의자가 하나 더 있고 뭔 얘기를 하다가요. 그 얘기는 맞는데! 맞다! 그럼 거기서 끝나야 해요. 그죠? ‘그런데’가 나오면 안 버린 거예요. 다시 줍는 거예요. 뭔 말씀인지 이해되시죠? 제 페이스북 혹시 보신 분 어제, 오늘 몇 분 보셨죠? 그 얘기 비슷한 얘기한 거예요.
주체적이지 않을 때 겪어야 했던 상흔의 역사
조선 후기에 임진전쟁이 터지면서 임진년에 일본이 침략해 왔죠. 임진왜란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해왔죠. 왜가 언제 우리 내부 인물입니까? 일본이 우리 내부에 있지 않았잖아요. 왜란 아니죠. 전쟁 해 들어온 거죠. 침입해서 들어 온 거죠. 침략해 들어온 거죠. 일본 침략 전쟁이죠.
그러니까 1592년에 일본침략전쟁이 있었죠. 그리고 그 전쟁이 7년을 끌었죠. 98년까지 갔죠. 7년 전쟁을 겪으니 그것도 함경도 일부와 평안도의 의주 일부만 놔두고 전라남도를 빼고 다 피폐화 돼버렸잖아요. 그런 상황 속에서 양반들이 권위가 있을 게 뭐예요? 도망갔던 임금이 권위가 있을 게 뭐예요? 권위가 없을 때 어떡하죠?
어느 분께서 그러셨어요. 공립학교 선생님이다 보니까 인문계도 가고, 공립도 가고 이랬던 모양이에요. 공고를 갔는데 어느 학생들을 보니까 너무 무섭더래요. 그래서 무서워서 한 행동이 먼저 패기 시작했대요. 옛날 이야기에요. 무서워서 먼저 팼대요. (웃음) 안 무서워지려고요.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이해되죠?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제일 먼저 뭘 할까요? 오히려 악을 쓰고 권위를 세우죠. 권위가 있을 때는 권위를 안 세우죠. 권위가 없을 때 권위를 세우려고 악을 쓰죠. 양반들도 권위를 세우려고 악을 쓰죠. 그럴수록 백성들은 먹고 살 길이 더 없죠. 먹을 게 없죠. 먹을 게 없으니 어떻게 해요? 창의적으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삶의 방법을 찾아보는 거죠. 화전도 해보고 뭘 만들어도 보고, 팔아도 보고, 별 짓 다 해보는 거죠. 먹고 살아야 되니까.
또 어떤 경우에는 안 심었던 거 한번 심어보고, 가령 ‘내가 곡식을 왜 심어? 차라리 담배 심어, 담배 심어 돈으로 바꿔가지고 쌀 사 먹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아’ 하는 방법이 다양해지죠. 그러니까 농사에서는 작물도 다양해지고 상거래도 조금 더 다양한 방면에 활기를 띠고, 뭔가 수공업도 생기고, 새로운 간척지도 생기고 막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러고 살아요. 그러고 살면서 양반들과 왕조를 원망하면서 여전히 왕조와 양반들이 심어놓은 그 생각에 묻혀 있는 거예요.
그 범위 내에서 원망하는 거예요. 그 범위 내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아니라 왕이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식으로 원망하는 거예요. 같은 시대에 좀 나은 모습을 바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또 반대로 ‘이놈의 왕조 싹 무너지고 새 왕조 들어왔으면 좋겠다’ 해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있는 왕조가 좀 더 나은 모습을 취해줬으면 하면 뭐죠? 현대 이념으로 가면 보수죠. 이놈의 왕조가 무너져가지고 새 왕조 들어왔으면 좋겠다 하면 뭐죠? 요즘식으로 하면 진보죠. 진보와 보수는 같은 거예요. 같은 세상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아무것도 차이가 없어요. 낡은 세상에 의존하고 있는 건 똑같은 거예요. 똑같이 낡은 세상에 의존하고 있는 거예요. 낡은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의존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에요.
결국은 길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길들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러는데 1627년, 그러니까 98년이니까 29년째, 되던 30년째 되던 해에 정묘호란이 들어서 금나라가 쳐들어오죠. 또한 몇 년 안 돼가지고 병자년에 또 쳐들어오죠. 결국은 이제 왕이 무릎 꿇죠. 무릎 꿇고 나서 돌아서면 어떡하겠어요? 대가리를 더 바짝 들어야죠. 대가리를 더 바짝 들고 나가는 거죠. 그냥 그 아들놈은 와 가지고 북벌 하겠다고 덤비는 거죠. 북벌하겠다는 게 북벌하려고 북벌했겠어요? 대가리 치켜들려고 북벌하자 그런 거죠. 권위가 없으니까, 아무도 왕을 안 봐주니까 그렇게 된 거죠.
효종의 북벌은 북벌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왕조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그러면 그 뻔히 다 알잖아요. 양반, 귀족들은 우습게 알죠. 자기들끼리 싸워 자기들이 결정하면 땡이에요. 저 앞에 용상이라는 데 앉아 있는 놈은 그냥 무시해도 되는 애예요. 제가 목에 힘을 줘봐야 암행어사 내려 보내봐야 그렇죠, 암행어사가 뭐예요? 혹시 몰래 뭔 짓을 하고 있나 몰래 가서 알아보는 거 아니에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면 암행이 필요가 없어요. 공식적으로 감사하면 끝나요. 공식적으로 감사도 할 수 없는 나라인 거예요. 그래서 암행어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숙종 같은 사람이 암행어사를 보내봐야, 효종 같은 사람이 북벌을 해봐야 이미 나라는 기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양반도 아니면서 양반 귀족층은 더욱더 아니면서 겨우 끼니도 못 채우면서, 그런데도 역시 그 이전에 세웠던 편을 들어요. 더 가난한 사람이, 귀족들은 본질을 알고 해먹기라도 하죠. 그 편을 들어요. 그러면서 노론이 옳네, 소론이 옳네, 노론 중에 시파가 옳네, 벽파가 옳네, 또 여전히 남인도 괜찮네, 남아 있는 서인도 괜찮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이러지 말고 ‘현실의 문제를 풉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요. ‘현실의 문제를 풉시다. 정의 같은 거 세울 생각 좀 하지 말고 현실에 먹고 사는 문제 좀 풉시다’ 하잖아요. 정의는 백성을 피 흘리게 하고 죽이는 결과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정의는 그랬어요.
정의를 드는 순간 죽어나가는 건 백성입니다.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아요. 그 정의는 반작용을 반드시 가지고 우리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정의를 두고 계신 분들이 많잖아요.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자기 만족에 불과한 거예요. 자기 머리 만족에 불과한 거예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위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중요한 거는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뭐가 개선돼야 되잖아요.. 개선하자고 얘기하잖아요. ‘너는 왜 반윤석열 전선에 안 나서는데? 너는 왜 반 이재명 전선에 안 나섰는데?’ 이래 버려요.
실학 하던 사람들 보고 박제가 보고 ‘저 서얼 놈의 자식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저 버릇없는 놈이!’ ‘지난번에 북경(연경) 갈 때는 이 소리 하더니, 이번엔 저 소리 하는 놈이!’ ‘아, 저놈이 저기 어디 동네 저기 누구랑 친구라고 그러더니, 어느 서당 출신이라고 그러더니, 그 서당 제대로 졸업도 못했대!’ 이러는 거예요. 인간 대접을 안 해줘요.
왜 지난번 연경(북경) 갈 때와 이번 연경 갈 때 소리가 달랐겠어요?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바꾼 거 아니에요 누군가에게는 핑계지만. 안 바꾸면 더 문제죠. 그렇게 욕 먹어요. 정약용은요? 재주는 많은데 세상을 장난처럼 게임 보듯이 하려고 한다 그래요. 그렇게 하고 나서도 그때 실학을 밀어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절대 왕정이라도 탄생했을 것이고, 적어도 서양에서 외세가 들어왔을 때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겠죠.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나라는 식민지가 안 돼요. 나름대로 연방국이 돼요. 일본한테 무너졌을지라도 쉽게 안 무너지는 국력을 갖고 있는 나라였으면요. 어느 정도는 평등하게 연합국이 돼요. 유럽의 역사를 보면 다 그래요. 완전히 식민지는 누가 되느냐? 마침내 진 나라가 되는 게 아니라 쉽게 진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거예요. 너무 쉽게 져버린 거예요.
상흔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한국의 독특한 위상과 문화
그때 실학자들이 권력을 잡았더라면 안동 김씨 세도가 됐을까? 아마도 한국의 운명이 바뀌었을 거예요. 그랬으면 지금은 역으로 더 나빠졌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잖아요. 제국주의를 해보지 않고 선진국이 된 유일한 나라에요.
외국인들이 왜 한류에 그렇게 목 매달겠어요?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몰라요. 그런데 냄새를 맡고 있는 거예요. 제국주의적 지배를 하지 않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던 나라의 독특한 뭔가가 있는 거예요. 냄새가 나는 거예요. 새 시대의 냄새가 나는 거예요. 새 선진국의 냄새가 나는 거예요.
기존의 전쟁을 해서 남의 나라 굴복시켜보고 했던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러시아 일본, 이런 나라들이 아닌, 제국주의 지배를 당했던 식민지 출신의 선진국 유일한 선진국이다! 맞죠? 유일한 선진국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어딘가 그렇지 않았던 선진국들의 문화를 겪었던, 그 애티튜드(attitude)를 겪었던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거예요. 그게 뭔지를 정의 못해내면 재생산 못하죠. BTS!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거예요. 싸이!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거예요. 뉴진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올 텐데 그런 분위기인지 아닌지 봐야 돼요.
아무튼 그런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유일한 선진국’이라는 칭호는 지금 없겠죠. 그 대신에 우리도 비슷하게 일본처럼 준(準)제국주의였던 선진국으로 남아 있겠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이 주는 세계적인 느낌은 식민지배를 했던 선진국이냐? 식민지배를 당했던 선진국이냐? 여기에서 한국은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식민지배를 당했던 유일한 선진국’이에요.
운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세가 좌우
문제는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왔는지 어떻게 오는지 우리도 몰라요. 스스로 정리하기에는 정리 못해요. 그냥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우리 이 선생님이 지금 어렵고 힘들지만은, ‘엄마를 먹여 살려야 된다는데?’ 그런데 저기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봐요.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이만큼 온 거는요. 역사적인 설명을 갖고 하라 그러죠? 오만이에요. 역사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운이 있는 거예요.
그 운은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세에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들의 태도에요. 그 태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 상황은 마치 18세기나 19세기의 조선처럼 가고 있는데, 당시 실학자들을 비난하면서 결국은 외세를 맞이했고 나라가 망했는데, 지금은 나라가 그렇게 망하지 않아요. 지금은 나라가 그렇게 망하는 게 아니라, 지금 만약에 우리가 그런 길을 한 번 더 놓치잖아요. 이 땅에서 인구 80%가 사라져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쳐들어갔죠? 그냥 대놓고 쳐들어갔어요. 탱크 끌고 가서 깨졌죠. 그 다음에 하마스가 이스라엘 쳐들어 갈 때 어떻게 쳐들어갔죠? 대놓고 쳐들어갔다가 안 되는 거 봤잖아요. 자기들은 그만한 힘도 없잖아요. 7천 발, 5천 발의 미사일 로켓트를 날려놓고 들어갔죠.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안 됐잖아요. 밀리잖아요.
어제 라이칭더씨가 대만 총통이 됐잖아요. 그분이 원래 대만을 독립하자는 원조입니다. 차잉원 아니고 천수이볜 아니고, 대만독립 이데올로기가 이 사람입니다. 대만은 독립해야 된다고 외쳤던 가장 강경한 분이 라이칭더입니다. 어쨌든 됐어요. 만약에 대만에 전쟁 난다 그러면, 로켓트 5천 발 날리는 걸로 끝날까요? 또 다른 방식으로 급습할 거예요.
그런데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나 커요. 여전히 미국이 버티고 있거든요. 중국이 작은 대만을 먹기 위해서 로켓 5천 발이 아니라 미사일 5천 발이 아니라, 포탄이 아닌 다른 거를 때릴 수가 있어요. 그래야만 통할 것 같으니까, 뒤에 워낙 강력한 미국이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 못할 거예요.
만약에 북한이 우리를 때린다! 지금은 우리가 전쟁을 점점 만들고 있거든요. 전쟁 같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군부는 하나하나 모르게 준비해야 되거든요. 그걸 국민들한테 떠들면 안 되거든요. 특히 있지도 않은 상황을 떠들면 안 되거든요. 있지도 않은 상황을 떠들기 시작하면 그건 전쟁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전쟁 요소가 축적되고 있는 상황이 이번 정권 들어서 처음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국방부 장관이 계속 정치를 해요. 다른 모든 사람이 정치해도 좋아요. 국방부는 정치하면 안돼요.
그런데 총선 때 북한이 준동할 것 같다! 그럴 것 같으면 국방부는 떠들지 말고 뒤에서 준비해야 되요. 실제 그런 조짐도 없고 이게 쌓이잖아요. 진짜 터져요. 터지면 북한은 뭐로 할 것 같아요? 가장 강력한 핵을 가장 큰 도시에 한 방 때려놓고 시작할 거예요. 그러고 협상을 들어갈 거예요. 그 외에는 협상으로 끝날 방법이 없어요. 재래식 무기로 남한 건드렸다가는 자기들은 요만큼도 못 살아나요. 워낙 남북한이 힘 차이가 많이 나니까요.
그래서 일단 핵 한방 때리죠. 바로 협상 안 들어갈 거예요. 일단 그 사이에 미국이 보복이라도 해줄 것 같고 해주면 뭐해? 그러면 어떻게 버티죠? 두 방 때리죠. 그러면 1차로 서울 경기도에 한 1500만 먼저 죽었고, 부산 대구 간에 한 방 때려 한 600만 명 죽어버리면, 2천만 명 이상 죽어요. 거기다가 후유증으로 죽는 사람들이 또 그만큼 돼요. 인간 구실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 수일 거예요. 제대로 사람 역할하고 사는 사람들은 전국에 500만에 불과할 거예요. 나머지는 전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그때 협상할 수밖에 없어요. 4,500만 명 인구가 무너지고 나서 협상 들어갈 거예요.
그런데 여전히 정의를 부르짖어서 사회를 개혁한다고 해요. 10년 동안 안 됐으면 깃발 내려야죠. 내 깃발인 거예요. 이 사회에서 걸어가는 많은 시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생각해야죠. 우리 말로 나쁘다가 뭐죠? 나쁜 셀피쉬(selfish)한 거예요. 영어의 베드(bad)는 어떤 기준에 적합하지 않는 게 베드예요. 베드는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어요. ‘나쁜’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안 달라져요. 셀피쉬, 이기적인 거예요. 나뿐인 인간이 나쁜 거예요. 개념이 달라요.
버리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는 변화
아무튼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말게요. 마지막 날이니까 얘기는 다른 데로 넘어가요. 우리는 청소가 된 상태나 청소가 되는 걸 ‘말끔하다’ 그러죠. ‘깨끗하게’ 그러죠. 깨끗하게 혹은 말끔하게 이 뒤에 뭐가 붙죠? 동사? 말끔하게 치워놔라! 깨끗하게 치워라! 우리는 치우는 게 깨끗하게 하는 거예요.
서양의 클린(clean)은요? 정리 정돈을 잘하고 더 예쁜 거 갖다 붙여놓고, 먼지도 털고 좀 이렇게 화사하게 해놓으라는 뜻이잖아요. 서양 사람들의 클린(clean)은 ‘깨끗하게 하라’ 하면, ‘깨끗하게 만들어 놔라’지만, 우리는 ‘깨끗하게’ 그러면 ‘말끔하게 치워놔라’ 이렇게 ‘다 치워야’ 되는데 덜 치웠어요. 이게 더러운 거예요. 제일 깨끗한 것은 싹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때 묻은 것을 때 지우는 게 아니라 아예 내보내버려요. 우리는 그래서 ‘말끔하게 치워놔라’고 해요. 얼마나 지혜로워요?
깨끗하게 하려면 던져야 해요. 그래서 버린 만큼 깨끗한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생각도 버린 만큼 깨끗한 거예요. 내 몸에 있는 것도 버린 만큼 깨끗한 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돈도 버린 만큼 깨끗한 거예요. 그걸 누가 말씀하셨죠? 싯다르타도 예수님도 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버린 만큼 깨끗한 것이에요. 꽉 차 있으면 더러운 거예요. 더티(dirty)한 게 아니라 꽉 차 있는 거예요. 우리의 깨끗함은 엠티(empty)예요. 완전히 못 비워도 최대한 비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는 뭐라 그러죠? 이렇게 예쁘게 해놓고 나서는 행복해 해요.
요즘 젊은이들이 집에 이렇게 하트도 붙이고 그리고 ‘아우, 예뻐’ 이래요. 그런데 옛날 분들, 제 나이 또래 분들 시원하게 청소하는 걸 뭐라고 그러죠? ‘속이 시원하다’ 그러죠. 물건 치우면서 속에도 많이 치운 거예요. ‘속도 시원하다!’ 그 반대가 ‘답답하다’는데 걸려 있는 거죠. 속 답답한데 많이 치워내니까 속도 시원한 거예요. 많이 치우는 거예요.
그렇게 치우는 방식으로 문자를 만들어 왔어요. 그렇게 치우는 방식으로 생활 방식을 만들어 왔어요. 그렇게 치웠을 때 내 앞에 있는 시간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왔어요. 그렇게 비웠을 때 내가 만들어내는 시간이 따뜻하다는 걸 배워왔어요. 이렇게 치울 수 있는 거! 그렇게 보면 차는 나에게 청소 물이다. 찻집을 이용하면서 지금 말하고 있는데 (웃음). 차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죠.
아무튼 오늘 얘기는 기존에 했던 얘기에서 좀 궤를 달리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싹 비우고 나면요. 사람이 광이 나요. 그 광은 비운 사람들끼리 알아봐요. 그래서 그들만의 공동체가 만들어져요.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 얘기를 짧게 한 자락 할게요.. 저희 아버님은 한국의 어떤 특정 술 회사에서 상을 주셔야 될 분이었어요. 취해 계시진 않으셨는데 늘 한 병씩은 드셨어요. 그런데 어떤 날은 이제 좋은 일이 있거나 하면 많이 드시기도 하셨죠. 저는 머리가 이렇게 백발이지만 아버님은 80이 되셔도 머리에 흰 올 하나 없으셨어요. 근데도 술을 조금이라도 드시고 오면, 이제 연세가 드시고 나서 주무시면 코를 고시죠. 술 먹고 주무시니까. 그러면 주무시다 보면 코 고는 소리가 나죠.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세요. ‘크헝’ 하고서 ‘누고?’ (웃음) 누군 누구야? 자기지! 아버님 당신이지요.
우리가 밖에 대해서 누구냐고 탓을 하는 소리가 사실은 자기에게 하고 있는 소리인지 몰라요. 이제 그런 거 없이 ‘내 탓이오’ 하고 살자는 건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불공대천(不共戴天)으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도, 저 건너 이면 어디선가에 한 올의 시간을 나랑 같이 하고 있다는 것! 참 더럽죠? 안 더러 우려면 그 생각을 비워내는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시간에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공(工)을 넘어 감사의 마음으로 만물을 대해야
어쨌든 차 갖고 하는 한가한 얘기라 하고 별의별 얘기 드리다가, 문자 얘기로 넘어왔다가 이제 이런 얘기까지 드립니다. 아무튼 시간을 더 이상 들지 못하게 되면은 그냥 공예품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있는 이 자사 잔이랑 다를 게 없었습니다.
자사 공예라 그러죠. 뭔가 생명이 있던 이 흙을 죽여서 생명 없는 것으로 만은 거죠. 단,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야죠. 생명이 있던 돼지를 죽여서 먹이라는 것으로 만드는데, 요리라는 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걸 만들어야죠.
운남에 제가 처음 갔을 때 벌써 20년도 넘었습니다만, 운남의 곤명 가장 큰 사거리에 육교가 있었죠. 지금은 철거가 된 육교인데, 그 육교 위에 늘 거럭질을 하는 거지가 계셨어요. 그 거지 죄명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나무를 꺾은 죄였어요. 나무를 꺾어서 공동체에서 추방 당한 거였어요. 나무를 꺾어서 뭘 만들었으면 덜 했을지 몰라요.
그런데 나무를 꺾어서 뭘 만들지라도 늘 그 나무에게 고마워하는 절차를 거치고 꺾어요. 그 절차가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게도 그 현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교이지만 이슬람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어요. 기도해서 잡아요. 내가 먹는 고기라도, 소라도 아무 소고기 먹는 게 아니고 절차를 거쳐서 고마움을 표하고 위로를 하고 달래준 후에만 먹어요.
우리는 너무 막 써요. 너무 막 쓰다 보니까 어머니 대지를 파헤쳐가지고 막 고름을 빼내는 거죠. 위를 피부를 막 긁어 재끼는 거고, 그 피부 먹고 자라는 동물들을 막 죽이는 거고, 형제인데 막 죽이는 거고. 그런데 죽이는 데 절차가 필요하고 얻는데 절차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반드시 그런 행위를 해야 되는데 그 행위를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지나치게 공(工)에 의존했어요. 왜? 공을 하면 돈이 생기니까요. 그 절차 지키는 사이에 남이 돈 벌어가니까요. 절차 안 지키는 것만큼 내가 먼저 돈을 벌 수가 있게 되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게 아니라 절차를 안 지키는 새가 돈을 먼저 챙겨가니까.
그게 우리들 시대의 자본주의에요. 아무리 먹고 사는 게 힘들어도 지킬 절차는 지켜줘야 돼요. 돼지를 잡는 사람이 감사를 안 했다면 먹는 나라도 감사해야죠. 그러면 이슬람식으로 보면 반(半)할랄은 된 거예요. 남들이 해준 것을 골라 먹으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친환경으로 기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벨 때 생명을 뜯어오는 거잖아요. 팔을 꺾고 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거 없이는 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하늘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내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요. 서로가 살려주는 것이잖아요. 내가 죽였지만 그가 죽어준 걸로 간주해야 돼요. 늘 고마워해야 돼요. 하물며 거기에도 고마울 수 있는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뻘겋게 째려봐야 되는 원수라 하더라도요. 일말의 고마움을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내가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데 같이 기여하는 거니까요. 함께 숨 쉴 수 있는 존재는 누구도 일말의 감사는 받을 자격이 있어요. 악마였지만 악마도 일말의 그래서 불경에는 얘기해요. 수보리나 장로나 나중에 아수라까지도 함께 기뻐했다는 거예요.
아픔의 공동체 안에서 차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
우리가 그렇게 살려고 애는 써야죠. 애를 쓰는 자리에 청소해 주고 빛을 도와주고 생계를 도와주는 그 자리에 저는 차를 갖다 놨습니다. 그리고 그 차를 통해서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요. 그래서 10월부터 나누어 온 이야기에 외람됨이 있었다면 또 용서하시고 또 널리 이해로서 비판한다고 제가 그렇게 고마워 하지 않으니 비판도 하지 마시고. (웃음)
비판하면 듣긴 해요. 고마워는 안 해요. 왜냐하면은 비판을 듣는 순간, 1분의 비판이 저에게는 몇 시간의 고민이 되니까 고마울 수가 없어요. 힘들어요. 그 힘든 것까지 견디고 가기에는 저도 나이가 이제 부치나 봐요. 하나의 고민거리가 던져지면은 저는 몇 날 며칠이고 잠을 못 자요. 그런다고 풀리지도 않는 것도 아는데 다만, 잊어버리지 않는 과제로 새겨놓을 뿐인데요.
아무튼 그렇게 온 거에 대해서 농담으로 그랬지만 나중에 던져주실 거리가 있으면 던져주시고 그리고 그러면 열심히 또 고민해서 또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봄 돼서 또 만나 뵙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외람된 이야기, 부족한 이야기 그러나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 우리는 다 공동체예요. 아픔으로 공동체에요. 안 아픈 분들 얘기해 보세요. 어디가 아파도 아파요. 마음이 아파도 아프고요. 우리 이 땅에 태어났다면 다 아파요. 시간을 만들어가는 모든 행위는 아픔이에요 시간을 만들어가는데 아프지 않은 길은 없어요. 아픔으로 공동체에요. 그 공동체 안에서 소리 질렀다 생각하시고 널리 헤아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안 받고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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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茶中閑談 마지막 편(1/1, 1/2.1/3, 1/4~2, 3~12)까지 장장 석달(2023.10.08 ~ 2024.01.14) 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신 아라가비 박현 선생님의 열정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끝까지 동참해주신 분들께도 공명이 되어 전해졌으리라 사료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가소성 可塑性에 있음을 마음 속에 정리하였고, 결국은 아픔을 공유하는 우리 공동체는 감사하며 살아가는 지혜로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차를 마시며 하는 영혼과의 대화을 일상사로 삼아, 차 한 잔이 나의 영혼을 살찌우고 시간을 만들어내는 사해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겠노라 다짐해봅니다.
늘 그랬습니다 표준이 뭔지 잣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