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이란
주님안에서 쉼을 얻는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란
힘들기란 매한가지 입니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것이 공부와 시험입니다.
그래서 어디 안식할 방도를 찾아 해메지만
고작 부모님안과 친구들과 함께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향해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편히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말씀은 우리를 편히 쉬게하기는커녕
너무나도 힘겨운 짐을
추가로 어깨에 얹어 놓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육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쉼이라는 것은 주어지지 않기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날 때부터
육적인 문제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고방식은,
자기가 스스로 책임져보겠다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인 사고방식은
이리 잘려내고 저리 잘려내면
나중에 한 토막도 남지 않고
전부다 지옥 불에 태워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런 육적인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도 같이 나와있습니다.
즉 우리의 보호자가 하늘에 계시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어른들로부터
공부하라고 강요받게 되고
잘못된 길로 가지말라고
주의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의 보호 아래에 있는 청소년들이
강요받고, 주의 받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받을수 있죠?
우리 몸의 일부는
우리 몸 전체 덩어리와 일체를 이룹니다.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과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려는 사람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육적으로 태어났기에
구원도 자기 책임 하에 이루려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육은 육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육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
모두압니다.
육적인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뭐든지 자기가 손에 쥐고 있어야소유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가치를 두고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자기 소유가 되지 않은 것에는
별로 귀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일단 자기 것으로 삼아놓고,
그렇게 해서 자기 것이 된 것으로
남에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은
인간이 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끌어 모으려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아예 만들지도 않는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용서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는
자기가 만들어 낸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황공스럽고 고귀한 선물로
남들에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솜씨가 아니라
못난 자신을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의논해서
성령을 통해서 제공된 무궁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또한 육 적인 사람은
자기 인생이 힘들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용납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안 돼,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내 인생에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마 이것은 꿈일 거야. 악몽일거야.
제발 곧 깨어질 악몽이었으면....!"
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오면,
"그래 이것이
나보다 먼저 십자가 지고 가신 예수님의 길이었지.
이런 수모를 당하셨구나.
주님 저도 이 십자가 아픔이 얼마나 지독한지
저도 그 아픔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를
보다 더 알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에게 있어 어려움이란
항상 자기한테는 일어나서는 안 될
비정상적인 일로 보지만
영적인 사람에게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경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육적인 사람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을
경쟁 상대로 간주합니다.
"누가 더 똑똑한지,
누가 더 재산이 많은지,
누가 더 권력이 센지 시합해봐?"하는 식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누구를 대하든지 '허수아비'로 간주합니다.
즉 "인간이란 풀이요
그 풀로 만든 허수아비라.
너의 인생이나 나의 인생이나
그 자체로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거야"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숙덕숙덕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미래나 장래도
똑바로 알고 살아라. 허수아비 주제에…"
하는 식입니다.
그런 자에게 영적인 사람은
봉사하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 너희들에게도
나의 봉사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제공하리라"
라는 마음을 발휘하게 됩니다.
또한 육적인 사람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어떻게든 반석을 깔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정착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영적인 사람은
가뿐하게 훌쩍 이 세상을 뜨고 싶어합니다.
자기 고향을 찾아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성도는
지금 남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실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성도는 그저 객이요 나그네일 뿐입니다.
미련 둘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육적인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방어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죄를 알기에 급급합니다.
도대체 내 속에 어떤 죄가 들어있기에
예수님께서 몽땅 용서해야만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내게 오는 자는 편히 쉼을 얻는다"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즉 예수님과 우리는
따로 따로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꾸만 따로 따로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들의 수호 천사가
지금도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 아이'는
실제로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소위 육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업신을 당하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적이고 육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있기에
업신여김을 당해 쉽게 상처입을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5:3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땅에서 그냥 상이나 칭찬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천국 자체가 저희들의 것입니다.
천국가면 이런 자들만 소복이 모여 삽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마태복음 11:25-27에 보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어린 아이'란
자체적인 지혜를 의존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셔서
숨겨진 은혜의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결코 '천사가 지켜주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살게 됩니다.
오직 주님에 대해 의존적이지요.
육의 속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에
사활을 걸지만
성도의 가난한 심령 속에는
오로지 주님의 보호와 용서와 사랑해주심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그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6-31에 보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기 공적과
자기 의로움을 소유하기에 급급하면
그곳에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할 마음이 들어갈 틈이 없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