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제 趙仁濟(1918~1997)】 "광복군 총사령부 인사과장, 토교대 부대장 "
1918년 1월 30일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남면(南面) 황방리(篁芳里)에서 아버지 조소앙(趙素昻)과 어머니 오영선(吳英善)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이명은 반성무(潘誠武)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 조시제(趙時濟)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9살 때 민제호(閔濟鎬)와 민필호(閔弼鎬)의 모친 이헌경(李憲卿)를 따라 고향 양주(楊州)에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30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참여하였다. 1934년 2월 반성무(潘誠武)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중국 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 입교하였다. 지형학·축성학·전술학·병기학·통신학·중병기학·정치학·각국혁명사 등의 학과교육과 체육·체조·무술·검술·야간연습·야영연습·보병조전·사격 등의 술과교육을 받고, 이듬해 4월 졸업하였다.
1938년 3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광둥분교(廣東分校) 공병과 제13기 과정을 수료하였다. 같은 해 5월 뤄양 근교의 중국 중앙군 제45사단 대위로 임명되어 참모처에서 복무하였다. 1940년 삼촌인 조시원(趙時元)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중국군을 제대한 후 시안(西安)에서 활동 중이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에 합류하였다.
군사특파단은 1939년 7월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결정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으로 화베이(華北)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기 위해 산시성(山西省)의 중국군 제2전구에 파견된 조직이었다. 군사특파단에 합류한 후 산시성의 타이위안(太原)·스좌장(石家莊)·린펀(臨汾) 등 주요 도시에 침투하여,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집활동 및 선전·첩보 공작을 전개하고 중국인 유격대와 유격전을 펼쳤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부관(副官)에 임명되었다.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에 합류하여 제5지대로 편제되었다. 이때 군사특파단 소속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이석화(李錫華)·이건우(李建祐)·이영여(李英如) 등과 제1지대 간부로 임명되어 산시성의 주요 도시로 진출하였다. 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광복군 초모(招募) 활동을 전개하는 등 창건 직후 광복군의 병력 확충에 기여하였다.
1941년 여름 조선의용대 일부 병력이 중국공산당 항일근거지로 이동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을 제시하며 광복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광복군 편제를 개편함에 따라 1942년 10월 충칭의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이후 총사령부 인사과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4년 총사령부에서 관할하던 토교대(土橋隊)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토교대는 일본군을 탈출한 사병을 포함하여 임시정부를 찾아온 한인 청년들을 수용·교육시키는 보충대 성격을 띠었다. 1945년 2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을 졸업하였고,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진급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국군에 입대하였다. 6.25전쟁 때 육군본부 정보국 통역원 등으로 참전하였다. 전역 후 광복회(光復會)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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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 직원 일동 사진(2열 왼쪽에서 세번째가 조인제)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