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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25
1월4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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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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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06om7ch0j8
[예수회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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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함께! 그리고 똑바로 서서!>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35~36)
메시아를 기다리는 세례자 요한과 두 제자의 모습을 묵상해봅니다. 그들은 혼자, 따로 따로가 아니라 함께 서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습니다. 많은 경우 혼자서는 보지 못하는 것을 함께라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은 앉아있거나 졸고 있거나 드러 누워있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전례 안에서도 서 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서 있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 준비되어 있다는 것, 최고의 예우를 갖추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냥 본 것이 아니라 눈여겨본 것입니다. 공허한 눈, 흐리멍텅한 눈, 졸리는 눈이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 집중 또 집중한 깨어 있는 눈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치 소 닭 보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당연히 그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메시아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두 제자는 함께! 그리고 똑바로 서서! 그뿐만 아니라 초롱초롱한 눈으로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자신의 눈앞으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변장하신 예수님, 또 다른 예수님, 작고 가난한 얼굴로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눈앞을 지나가실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 거룩한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조만간 등장하실 메시아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가? 언제 등장하실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하는 질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동시에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의 일생 전체를 맡겼습니다. 성령의 불로 내면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즉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 한해보다 자주 우리의 내면을 말끔히 비워내면 좋겠습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곁을 지나가시는 또 다른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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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6iCUnQLp5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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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삐를 만남과 메시아를 만남의 차이>
오래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자신 있게 “나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랜 신앙생활 끝에 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든지, 하려는 일이 잘 안되게 될 때는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신앙을 가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은 아직 진정한 신앙인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속적으로 바라는 것만을 청하지는 않더라도, 메시아가 아닌 라삐만 만나려 해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듣고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동사는 ‘머무르다’ 입니다. 우리는 가지로 포도나무에 머물러야 삽니다. 그들이 주님과 머무르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랍비에서 메시아가 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왕이고 예언자이고 사제로서 나를 지켜주고 가르쳐주고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구원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점점 그분이 랍비에서 메시아가 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서바이브’는 2020년 개봉한 영화입니다. 외딴 눈 덮인 산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자살로 극심한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압도적인 죄책감, 무력감, 버림받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남자 동료와 함께 눈 덮인 외딴 산에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에게 힘과 지지의 기둥이 됩니다.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은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궁극적인 희생을 합니다.
이러한 이타적인 행위는 여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를 위한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현실에 직면한 그녀는 자신의 가치와 생명 자체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다쳐 더는 걸을 수 없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혼자 산에서 내려옵니다. 여기서 내면의 악마와 투쟁에 대한 은유인 늑대와 대결합니다. 유리 조각만으로 무장한 그녀는 늑대와 싸우고 죽이며, 이는 그녀의 우울한 생각과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유리 조각은 본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준비했던 도구였습니다. 그녀는 변화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목적의식과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었을 때 그녀를 믿어준 남자를 기리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나 때문에 죽은 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죽은 이가 필요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말로만 전한다면 그것은 라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나의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아직은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라뽀니에서 메시아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형제들에게 가서 당신을 보았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이웃이 삶의 의미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시간은 제10시입니다. ‘열’은 십계명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의 의미가 되는 순간이 그리스도와의 머묾을 통해 이뤄집니다. 저에게도 라삐로서 ‘하.사.시.’가 함께 하였다면,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메시아, 곧 내 삶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머물며 그분이 나의 삶의 이유가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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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안드레아는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친절하게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라고 설명해 줍니다. 안드레아가 생각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무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왕’을 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사울에게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사랑했던 다윗 왕,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다윗 왕,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던 다윗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가지는 권한과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의 열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주시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고,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우리는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요리하는 분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청결하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식당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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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5-42: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 세례자는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면서,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는(참조: 1,31.47-49)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하느님께서 메시아에게 주신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된다(참조: 3,27.29). 두 제자가 따른다는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며, 여기에 함께 지내는 일이 이어지는데, 단지 그날만이 아니라(39절), 그분과의 계속된 친교 안에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 제자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도가 담겨있다.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함께 지내면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오후, 네 시쯤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말한다.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예수님과의 친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40절).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절) 하면서 시몬을 예수께 데려간다. 예수께서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1-42절) 시몬도 그 친교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께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만남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만남은 그것이 짧은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는 체험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분 안에 함께 머무르는 삶이 되고 그분을 구체적으로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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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믿음은 어떻게 생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누군가를 믿게 되었나요? 첫 만남부터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주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앎’이 생깁니다. 그 앎이 좋아 더 자주 만나면 좋아하게 됩니다.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쳐 누군가를 이미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믿을 때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예수님께는 이러한 과정을 겪을 기회를 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자주 만나지도 않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도 이러한 과정을 함께하십시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가다’(직역: 오다), ‘보다’, ‘묵다’(직역: 머무르다). 제자들은 이 세 가지 행동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예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다’, ‘보다’, ‘머무르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여 주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하여 주는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어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믿음이 언제나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제자들이 보여 주는 세 가지 행동을 예수님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다른 과정이 아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기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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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두 제자 가운데 하나는 안드레아 사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40),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은, “저분이 바로 너희가 기다려온 메시아시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간 일은, 스승인 세례자 요한을 ‘버리고’ 예수님에게 넘어간(전향한) 일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두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낸 일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두 제자에게만 말했을까?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말했습니다.(요한 3,27-30) 그러나 두 제자만 세례자 요한의 말을 알아들었고, 또 그 말을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안 믿었을까? 스승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왜 제자로 남아 있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안 믿은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이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너무 커서, 또는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제자들을, 또 곁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제자들을 ‘억지로’ 예수님에게 보낼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8-39)
여기서 “무엇을 찾느냐?”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인데, “너희가 인생에서 찾는 것이 무엇이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말은,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라는 뜻이고,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와서 보아라.”는 “함께 살자.”라는 뜻이고, “나의 제자가 되어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무엇을 보았을까? 또 무슨 말씀을 들었을까? 사도 요한은 시간까지 기록했으면서도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은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과 말씀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두 제자는 예수님의 ‘일상적인 삶’을 보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을지는 함부로 짐작할 수 없습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따라갔고, 함께 지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41) <신앙생활은 ‘주님과 함께 사는(지내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또 무슨 특별한 기적이나 계시가 없어도,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은총이라는 것을 믿고, 함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신앙입니다.>
그 일에서,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유대인들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3-25) 유대인들의 요구는,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하는 말들을 들었다면, 또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면 나를 믿어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는데, 그러나 여러 가지 비유적인 표현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통해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했고, 예수님의 기적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안 믿으려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합니다. 보지 않으면 못 보게 되고, 듣지 않으면 못 듣게 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바로 알아들었고, 또 알아보았고, 그래서 금방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사도들은 어떤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영혼의 구원을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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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이 성서 구절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자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요구에 무엇이라 말씀하지 않고 직접 “와서 보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진정 메시아이심을 여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쭈었으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똑같이 물으시자, 예수님께 가서 묻는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곧, 이 물음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믿는다면, 바로 ‘너희가 찾는 메시아이고, 믿지 않으면, 메시아가 아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단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각기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맡겨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따르라는 강요 같은 부르심이 아니라, 당신에게 와서 직접 보고, 느껴서 따를 만 한지를... 자신의 인생, 자유, 목숨을 걸 수 있는지 스스로 결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면, 충실하고 굳건하게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학식 있고 똑똑한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소박하게 당신을 따를 사람을 부르는 것입니다.
곧, 어떠한 이익이나 목적을 얻기 위한 응답이 아니라, 진지한 부르심에 대한 가식 없는 응답, 엄마의 부르심을 듣고 ‘네’ 하고 달려가는 아이의 응답 같은 그런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와서 보아라.”라는 말씀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베드로의 부르심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평생을 고기잡이로 보낸 뱃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는 솔직함과 굳건함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따르는 것을 변치 않고 충실하게 지킬 믿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이런 베드로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첫 대면에서 ‘게파 곧 반석’ 이란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어떤 역할, 일에 대한 부르심이라 하더라도.. 강요나 압박이 아니라, 불림 받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성서 구절을 묵상하는 내내,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유롭게 우리를 부르시고, 자유롭게 응답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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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뒤따라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며 어떠한 일상을 지내고 계신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따르고자 할 때 그분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원의가 생깁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거나 성당에 가서 봉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분을 만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분의 축복을 가득 받고 싶어서 성당에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따르려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분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 아이가 건강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은 삶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입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상의 종말에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천지 창조 이전부터 사랑하셨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만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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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이냐시오 신부님]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우쳐 주는 작은 목소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어긋난 우리를 바로 잡아주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삶의 진리를 새롭게 체험하게도 합니다.
제가 얼마 전 경험한 일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본당 관할구역에 있는 한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그날도 몇 명의 신자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양로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께서 매달 찾아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조그마한 선물이라며 포도주 한 병을 내놓으셨습니다. 날씨도 더웠고, 저는 제가 할머니들을 위해서 뭔가 해드려야 한다는 입장만을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포도주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자세히 포도주를 보니 그 포도주는 국산으로 지하철 티켓 두 장 값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참 싼 포도주도 있구나 했는데 사제관 식사를 도와주시는 자매님께서 옆에서 듣고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네요."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좋은 선물, 값비싼 선물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저는 그 한마디의 말씀에 큰 방망이로 머리를 맞는 듯 큰 충격을 받았고, 그동안의 삶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것, 좋은 성과,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 보니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보는 눈과 귀가 멀었나 봅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 포도주는 지금 제 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전합니다. 어부인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부로서 어디서 고기잡기가 좋은지 더 잘 아는 베드로,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지쳐 있었던 베드로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더 해보겠노라며 다시 그물질을 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베드로가 왜 처음 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호수로 나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복음서가 전하듯 색다른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호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겼다는 사실입니다. 외면해버려도 상관이 없을 법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기에 그는 놀라운 결실을 맛볼 수 있었고, 고기낚는 어부로서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지만 그래서 소홀할 수 있는, 지나쳐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외면하고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작은 그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잊고 살았던 진실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시장 사람의 성실과 정화원들의 정성된 빗질로 유지되는 깨끗한 거리.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어린아이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웃이 건네는 인사와 미소. 우리 주위엔 나를 가르치는 작은 목소리를 많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주위에서 함께 하는 사랑을 담은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작은 목소리가 주는 작은 감동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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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와서 보아라.”(1,39)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일찍부터 동서양의 위대한 인류의 선각자들, 그리고 근대에 와서 테카르트와 파스칼 그리고 우리 시대엔 촘스키와 에릭 호퍼 등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학문 분야가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 이에 관한 서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될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인간 이해는 인간이란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이다, 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하느님의 모상성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신앙 혹 영적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저너머 beyond 어떤 그 무엇’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관해 답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복음은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추구하는 인간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너희가 누구를 찾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첫 만남에서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도입부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1,36)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이는 길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 가를 존재로 가르쳐 준 것입니다. 참으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을 알고 참된 스승이었기에 기꺼이 자기 제자들에게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도록 빗겨 선 것입니다. 그의 초연한 빈 마음과 집착하지 않은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로써 두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는 섬기던 스승을 떠나 다른 길을 걷는 행위이며 실존의 놀라운 선택입니다. 어제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을 향해 새롭게 변화를 받아들인 결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뒤따라온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1,38)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곧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묻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찾고 있는 것에 대해 이미 답을 하신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해서 나는 너희가 추구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너희에게 줄 수 있다, 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초대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15,1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또한 이를 두고 “너희가 나를 만나지 않았던들 나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성 아우구스띠노는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이미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며, 그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갈망을 채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초대한 것이며, 참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초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첫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1,38)라고 응답합니다.
이 질문은 만일 당신이 저희가 찾는 참된 것을 알고 계시면,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로써 인간 실존의 정의는 인간이란 참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이나 아직 그 무엇을 찾지 못하고 있는 존재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깊이 목마름을, 갈망을 헤아리시고서 “와서 보아라.”(1,39)라고 그들이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초대합니다. 와서 보아라, 는 이 말씀은 세대를 거쳐 참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응답이며 초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자신들이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손으로 만져 본 것”(1요1,1)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우리가 살아야 할 진리이며, 누려야 할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며 궁극적인 인류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도록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와서 보아라, 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오로지 예수와 함께 살고 머물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15,5)라고 말씀하신 까닭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와서 보시오, 라는 초대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그날 “함께 묵었다.”(1,39) 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가까이 머물 때, 그 길을 찾게 되고 진리를 만나게 되며 생명과 접하는 내적 친교와 합일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마르3,13~14참조) 함께 머묾을 통해 자신들이 찾고 있는 그 무엇을 주님께서 채워 줄 수 있다고 확신한 제자들은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났소.”(1,41)라고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와서 보아라, 는 표현은 佛家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가에서 말하는 와서 보아라, 는 의미는 곧, 참된 불법 공부는 ‘잘 듣고聞, 들은 바를 이해하여思, 이해한 것이 참인지를 현실에게 경험하여修, 이해한 바를 증득하는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교적 인간이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파스카 여정을 동참하여 생명이시며 사랑인 아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 여정을 걸으면서 인간은 진리를 얻고 진리를 통해 참 자유를 누리며,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걷다 보면 언젠가 아버지 집에 도달할 것이며 그때 우리의 탐구는 끝이 날 것이고 그곳에서 우리가 바라는 참된 그 무엇을 얻게 되고, 참된 자신을 찾게 되면서 참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샘물을 찾아 올라가려면 미끄러지면서도 자꾸 올라가야 합니다.』 (‘높은데서 사슴처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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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에픽테토스의 ‘담론’을 보면,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한 가지 원칙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건 바로 세상에는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통제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중에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요? 에픽테토스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면 비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때 그것을 했더라면. 그때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이 없는 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즉, 과거는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어떨까요? 후회로 인해 지금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다’라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남이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이 역시 비참해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평온을 비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도 이 평정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이 비참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뒤따라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묻지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며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지 알고 싶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신 분, 그분을 알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이 직접 해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주님을 찾아가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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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첫 만남 그리고 늘>
요한 1,35-42 (첫 제자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첫 만남 그리고 늘>
“와서 보아라.”(요한 1, 39)
사랑하는
사람아
나
있으니
나에게
와서
나를
보고
나와
함께하게나
사랑하는
주님
당신
계시니
당신께
가서
당신을
보고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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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새해 정초부터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지만, 전쟁과 이념 갈등이 커지고 우리 정치판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피습사건은 증오와 양극화가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잘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의 해결은 보이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쇄신을 부르짖으면서도 밥그릇 싸움이 여전한 것을 보면 희망이 절벽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믿는 이들은 더 좋은 세상을 희망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세상을 희망하면서 자기 몫을 다해야 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따르는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 2,15)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습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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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참 아름답고 멋진 스승인가?”>
-참 스승이신 주 예수님께 인도(引導)하는 자들-
아마도 우리 요셉수도원에서 가장 특징적인 상징물은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의 예수성심상일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가슴 활짝 열고 주님을 찾아오는 모든 이를 환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위로와 격려와 더불어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복음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새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예수성심상을 배경으로 한 단풍나무가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써놓은 ‘참된 겸손’이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배경의 단풍나무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어 주신다
단풍나무 배경이
전부인줄 알았다
아, 하늘과 불암산을 가린
단풍나무였구나!
소스라친 깨달음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자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주님만이 환히 드러나는 공(空)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2023.12.30
참으로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우리의 영원함 참 스승이자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고 환히 드러나게 하는 공(空)의 사랑의 사람이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해 주는 일, 또 하나는 자기를 알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라 합니다. 둘인 듯 하나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불어 자기를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스승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정말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최고의 사랑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1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것은 바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립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참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의 모범입니다. 한 눈에 참스승이신 예수님을 알아챈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외치자, 그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결국은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요한입니다.
자기를 두고 떠나는 제자들이 서운하고 예수님께 질투심이 일어날 듯 한데 요한의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고 고요합니다. 정말 비워지고 겸손해져 자기가 없이 주님만 환히 드러내는, 흡사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스승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대세의 순리이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정말 이웃에 대한 참사랑은 이웃을 참 스승인 주 예수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세례자 요한도 참으로 기뻣을 것입니다. 이들 제자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물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는 이들이 참된 구도자들입니다.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이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된 이들의 물음은 정확했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살며 배우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대답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와서 보아라.”
와서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야말로 영원한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뿐입니다. 여기서 ‘어디에 머물고 계시냐?’는 단어인 그리스어는 ‘메네인(menein)’은 ‘살다(abide)’ 또는 '계속 남다(remain)’라는 뜻으로 복음에서는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곁에 머물면서 주님과 항구한 우정관계를 맺음을 뜻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평생 정주 삶과 일치합니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초대에 응해 자랑스럽고 영예롭게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평생 주님 안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정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도를, 섬김을, 순종을, 겸손을, 침묵을, 경청을, 가난을, 정결을 배우며 이외에도 참 배울 것이 많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배움터라 우리 수도공동체를 정의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묵은 제자들은 깊은 감화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며 주님께 형을 인도하니, 바로 이것이 진짜 형제 사랑이요, 시몬 베드로에게는 운명적 사건이 되었으니 늘 갈망하던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을 만난 것이지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비로소 영혼의 참 스승이자 말씀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적갈망은 해소되어 내적안정과 평화를 누렸을 시몬 베드로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안에 정주의 머무름은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끝으로 26년 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관계를 염원(念願)하며 써놨던 ‘사랑’이란 시를 나눕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놀랍고
좋아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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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속지 말고 믿어라!>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는다고 함은 무엇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는다는 것이 실은 믿는 것입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고, 그렇기에 속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지 않거나 나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속지 말자는 것은 탁 느끼기에도 수세적이고 부정적이지요.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 모두를 의심하게 되겠지요. 좋은 것인데도 나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도 되고요. 그래서 좀처럼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의심이 심해져 불신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의처증이 중증이 되듯이 더 중증이 되고요.
그러므로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음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것? 첫째는 믿을 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은, 아무나 믿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신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이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처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사람을 그 이상의 사람으로 믿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기에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또 하느님을 믿더라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웃기는 얘기할 때 많이 하던 얘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가 ‘아, 시원하다.’했고, 그래서 아들이 들어갔다가 너무 뜨겁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했다지요.
주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오라고,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또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짐을 안 지게 해주시고 고생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믿었다가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자식처럼 주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나 주님께 왔는데 주님께도 속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하느님을 믿으면 고통을 없애주실 거라고 믿음 때문에 믿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주님의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을 잘 지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꽃길 걷게 해주겠다고 귀를 간질이는 인간에게는 속지 말고,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매고 당신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오히려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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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메시아!>
오늘 복음(요한1,35-42)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 이 말을 듣고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멋진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요 메시아이신 예수님,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요즘 갑진년 새해가 행복합니다. 합천본당으로 파견된 지가 어느덧 해가 바뀌어 4개월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이렇게 다짐하면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신자들을 더 믿고 더 사랑하자.' '이 시대의 화두인 시노달리따스를 위해 나의 욕심들을 내려놓자.'
이 다짐이 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심으로써 이 세상 안으로 오셨지만, 그 메시아는 지금도 매순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내가 메시아를 만나면, 내가 변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고, 너와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나도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말씀으로, 성체성사(미사)로, 기도로, 우리 가운데 계신 메시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정성된 마음으로 메시아를 만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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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Intdjq7nJ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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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따뜻한
말씀처럼
따뜻한
복음이
있습니다.
어중간한 삶을
살았습니다.
뜨거움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를
보게됩니다.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가장 가슴벅찬
기쁨의
순간입니다.
좋은 만남은
언제나
함께할 기쁨이
있습니다.
만남의 절정은
머무름의
절정입니다.
좋은 마음을
따라 가다 보면
좋은 마음을
만납니다.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를
깨닫게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기쁨임을
배웁니다.
기쁨이 먼저
가 닿는 곳에서
만남은 선물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남을 통하여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의 만남이며
관계의 기쁨이며
머무름의
사랑입니다.
가장 좋으신
메시아를 만나는
은총의 날입니다.
은총은
주님을 따름으로
가득한 축복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머무러고
주님과 함께
사는 오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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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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