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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義湘大師)
1. 의상대사의 행적
의상은 경주 사람이다.
본명은 김한신金韓信, 고귀한 왕족 출신이다.
당시 골품사회의 전통으로 보면 출세가 보장된 명문가족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지성인들처럼 불가의 길을 선택했다.
29세때 狼山 기슭의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지금 황복사의 옛터에는 아담한 삼층석탑과 十二支神像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절 이름에서도 왕실과의 깊은 관련이 엿보이지만, 아마 왕실의 복을 기원하는 도량이었던 것 같다.
그가 어떠한 인연으로 원효대사와 옜?道伴을 맺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이 두분은 콘트라스트(대비)가 강하다.
원효는 자유분방하였으나 의상은 청렴결백 하였다.
원효는 육두품 출신이나, 의상은 진골이다.
원효는 多作이었으나 의상은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원효는 평생을 無碍의 달인으로 살았으나 의상은 태백산에서 後學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실제로 일본의 高山寺에 있는 〈華嚴緣起〉라는 두루마리
시화첩에 그려진, 원효는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사나이답고 기골이 장대한 모습이다.
반면에 의상은 단정하고 청아한,이를테면 미남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초상이 거의 두 분의 본래 모습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의상은 그 모습대로 일생을 청빈과 검약 속에서 단정하게 사신 분이다.
어려운 渡唐 유학 길에 원효는 되돌아 간다.
그러나 의상은 결연히 중국행을 결행한다.
그는 평생의 도반이자 스승인 중국 화엄의 2조 知嚴의 문하에 투신한다.
만11년 동안 화엄의 要旨를 논구하고, 연설하며 평생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의상에게는 海東華嚴의 初祖라는 영광된 이름이 붙어다니게 된다.
2. 선묘(善妙)와의 만남
의상이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 그가 머물던 신도의 집에서 선묘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의상에게 연정을 느꼈으나 견고한 道心 앞에서
無力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묘는 맹세했다.“저는 세세생생 스님께
목숨을 바쳐 의지하며 대승을 배워 큰 일을 이루겠어요.
그리고 후원자가 되어 필요한 물건을 대드리겠어요.”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되돌아가려할 때까지도 선묘는 의상을 기다렸다.
의상은 귀국하기 앞서 그 신도의 집을 찾아 그동안에 베풀어 준 갖가지 편의
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선묘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의상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는 의상의 소식을 듣고 선창가로 달려갔으나 그를 실은 배가 저만치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끝내 자결하고 만다.
세세생생 스님을 모실 수 있었으면 하는 그 바램은 그녀를 용으로 화현시킨다.
그 이후 의상에게는 선묘룡의 화신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뱃길을 지키는 수호신도 선묘룡이었으며, 태백산 浮石寺를 창건할 때 산적을
몰아친 것도 선묘룡이었다. 나중에 일본 땅에 화엄불교가 전래된 후로 선묘는
女神이 되어 지극한 존승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이 선묘와의 설화 속에서 의상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결코 싸늘한 성품이었기에 선묘를 멀리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의상의 선묘에 대한 연민은 그가 부석사에 선묘각을 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의상은 미타신앙의 신봉자였다.
그의 아미타여래에 대한 사모는 선묘에 대한 것과 비교할 때 마치 태양과
반딧불 같은 것이었으리라. 의상의 세속적 관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바위 같은 불심은 번뇌의 태풍 앞에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흔히 서양 사람들은 에로스니 아가페니 하는 표현들을 쓰지만, 의상에게는
오직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삶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상이 서둘러 귀국한 것은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교통도 발달되지 못했던 시대였으니만큼 그 정보는 사람이 전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는 여전히 한반도에 머물면서 신라
를 넘보고 있었다. 이제 당과의 결전이 임박한 시점에서 당나라의 대군이
신라침공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의상의 첩보를 확인한 문무왕은 곧 神印宗의 明朗으로 하여금 呪術로서 당나라
군사를 격퇴시켰다.
의상은 곧이어 화엄 十刹을 지어 ! 그 전교의 도량으로 삼았다.
부석사, 범어사, 화엄사, 해인사, 비마라사, 옥천사등이 그 화엄의 도량이었다.
특히 태백산 부석사는 의상이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다.
그곳에서 의상은 자신의 名著 「華嚴一乘法界圖」를 강론하였고, 제자들은
그 秘意를 토론하는 대학습장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문답을 정리한 錐洞記등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의상에게는 뛰어난 제자들이 열명 있어서 그들을 의상 문하의 十大德이라고
하지만,대략 그를 따르는 이들을 삼천문도라고 부른다.
즉 원효에게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의상은 실로 신라 땅에 학문불교를 정착시킨 장본인이다.
무릇 종교에는 이론과 실천의 이원적 구조가 있다.
물론 이론에만 치우친 현학적 관념론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논리의 뒷받침 없이 맹목적 신앙만을 강조하게 되면 獨善과
盲信에 빠지고 만다.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길은 종교의 이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원칙은 개인에 있어서나 국가 사회에 있어서나 모두 필요
한 덕목이라고 본다.
의상은 바로 그 학문불교, 논리적 기반을 뿌리 내리게한 인물이다.
신라인들로 하여금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 웅변으로 제시한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의상의 자세는 돋보인다. 원효와 더불어 한국
불교의 자존심을 버티게 하는 위대한 봉우리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3. 법성게(法性偈)의 철학
의상스님이 중국유학에서 얻은 것은 화엄의 大旨였다.
7세기 중국에서는 화엄교학이 일세를 풍미하였다.
지엄과 의상의 만남은 바로 화엄교학의 찬연한 발전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물론 아직 唐譯(혹은 新譯) 80권본이 나오기 이전이기 때문에 의상은 바로
晉譯에 의해서 수학하였다.
그가 이 60권본 화엄학을 섭렵한 연구 결과가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이다.
七言三十句, 전문 210자에 불과한 圖印이지만 그 담긴 뜻은 무궁무진하다.
생명의 실상에 대한 통찰이 있고 실상에 대한 논구가 있으며 반야의 근원과
실천의 의지가 담겨있다.
요컨대 이 법성게는 그의 철학적 사고와 실천의지를 압축한 悟道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백산에서 후배들을 양성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언제나 그는
이 법성게를 통해 그의 철학을 토로하였다.
법성게 대한 해설 및 토론서가 바로「法! 界圖記叢隨錄」이다.
주로 의상의 열분 제자들의 이름이 열거되지만 간혹 도반이었던 원효의
이름도 나온다.
더구나 이 법성게는 圖印이라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전체가 사면 대칭 54각으로 이루어진다.
도인 중앙‘法'자에서 시작하여‘佛'로 끝나기 때문에 오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54각은 53선지식을 상징한다. 즉 入法界品의 선재동자 구법을 표현해 본 것이다.
53다음에는 대각이기 때문에 54번을 구부렸다고 한다.
4면은 四攝과 四無量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또 길이 외길인 까닭은 여래의 一音이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끝내는 一性으로
성불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그 글자와 도인은 다 파내기 힘든 사색의 원천인듯 느껴진다.
그는 이 법성게 한편만으로도 위인의 반열에 끼일 수 있는 명성을 얻은 것이다.
4. 아미타신앙(阿彌陀 信仰)의 구현자
의상스님은 화엄 학승이었지만 동시에 미타왕생사상의 구현자였다.
그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落山寺, 浮石寺, 그 모든 곳에는 아미타신앙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특히 부석사는 九品往生의 구도에 따라 설계된 정토신앙의 본산이다.
원래 정토신앙과 화엄교학에는 유사성이 있다. 즉 우주의 근원, 法身이신 화엄
주존불 비로자나는 서방이라고 해서 그 모습을 못 나타내실 리 없다.
또 서방정토라는 개념 또한 화엄사상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나 嚴淨융합
을 사상적으로 정착시켰다는 데에 의상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즉 의상은 결코 관념적인 불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정토에 왕생하려는 悲願을 품은 채 평생을 청빈과 검약으로 보낸 수도자
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 낙산사 창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아미타부처님의 협시였던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관음신앙 또한 각별한 바가 있었다.
그의 관음신앙은 곧바로 불국토사상으로 연결된다.
즉 관음보살을 경전적 근거로서만 鎌末?것이 아니라 바로 신라의 관음이라는
자부심을 신라인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불교 또한 당시로 보면 외래종교였다.
즉 이질적인 요소가 일반인들에게는 막연한 거부반응 같은 것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즉 낙산사의 관음보살은 바로 그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라인들은「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독송하면서 관음보살을 남섬부주 어딘가
에 있는 이상적 존재로만 생각했음직 하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우리나라의 동해변에 나타나신다.
바로 의상의 지극한 발원에 응답하는 현실적 존재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그 불국토 사상이야말로 신라불교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의상의 후예들
의상 문하의 十大德 가운데 가장 주목을 모으는 인물은 역시 表訓과 眞定으로,
참다운 孝善의 선행을 보인 인물이다.
홀어머니를 두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나중에 老母의 죽음을 듣고 그 천도를 이루는 고사등은 불교적 효행의 모범이
되는 사례들이다.
불교를 향한 세속적 비판에 대한‘응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의상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에 따라 화엄십찰을 중심으로 전법의 기틀을 다졌다.
사실 교종 가운데서 이 화엄종만큼 번성을 이루었던 학파도 드물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파이건 간에 화엄의 가르침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긴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신라말엽에 이르러니 남악과 북악의 분파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려에 들어서
면 均如와 같은 위인이 출현하여 이 화엄의 대의를 더욱 현양하게 된다.
실로 의상은 이 해동화엄의 鼻祖였으며 한국지성을 대표하는 철학자였다고
보아야 한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