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의 이름은 현재 남아 있는 1507, 1508년의 두 자료에 초르치 다 카스텔프랑코(베네치아의 방언), 즉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조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르조네(또는 초르촌)라는 이름은 1528년 그리마니 컬렉션의 작품 목록에 처음 나온다. 이 이름은 '키가 큰 조르조' 또는 '몸집이 큰 조르조'라는 뜻으로 그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미남이고 호색적이었다.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 후원자인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와 그녀의 대리인인 베네치아의 타데오 알바노 사이에 오고 간 1510년 10월 25일 편지에는 조르조네가 그무렵 베네치아에 널리 퍼져 있던 흑사병에 걸려 바로 얼마 전에 죽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를 다룬 기록 중 가장 최초의 것은 바사리가 쓴 전기이다. 그것은 조르조네의 평범한 태생, 고상한 정신,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특징은 바사리가 조르조네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시적인 특성을 기초로 나름대로 상상한 결과임이 확실하다. 청년 조르조네가 1490년경 베네치아에 가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인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르조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과 색채, 분위기는 확실히 벨리니의 후기 양식과 비슷하다. 1507년 베네치아에 있는 두칼레 궁의 접견실에 걸기 위해 주문받은 그림은 그후 더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성되지 못한 것 같다. 조르조네의 주요한 공공 작품으로는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독일 대사관)의 외벽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는데, 그는 운하를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의 정면에 인물상들을 그렸다. 거리쪽의 프레스코들은 젊은 티치아노가 그렸는데 아마 조르조네의 감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08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부분적으로 흐릿한 인물 윤곽선만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몇 가지 특별한 자료에 기록된 작품들을 제외하고, 1520~43년 베네치아의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의 미술 컬렉션에 대한 기록에 조르조네의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12점의 그림과 1점의 소묘 중 5점이 남아 있는데, 〈폭풍〉·〈3명의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s〉·〈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화살을 든 소년 Boy with an Arrow〉·〈피리를 가진 양치기 Shepherd with a Flute〉 등이 그것이다. 〈폭풍〉은 르네상스기 풍경화에서 하나의 이정표로서 폭풍우가 막 몰아치기 직전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르네상스의 저술가 피에트로 벰보와 자코포 산나차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또한 르네상스기의 중요한 철학자인 피에트로 폼포나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베네치아와 파도바의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자연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