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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1)
필자는 얼마 전 민플러스에 연재한 글(“변혁의 시대에 진입하다!”)에서, 코로나사태가 몰고 올 앞으로의 정세 격변에 대처하고 내후년 선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기 전국적인 노동자 독자언론매체 건설이 시급함을 제기한 바 있다. 이제 그 문제와 관련하여 레닌의 정치신문에 관한 필자의 연구를 소개키로 한다. 레닌은 [이스크라]라는 전국적 노동자신문을 창간하였으며, 신문 사업을 통해 당시 분열된 러시아 노동운동을 하나로 통일시킴으로써 당 창건에 성공하였다. 비록 시대와 사회적 환경은 다를지라도, 이 같은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동일한 과제에 부딪치고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변혁진영에 있어 일정한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 이스크라 1호
1. 서문
알다시피 레닌의 주도 하에 1900년 12월에 창간된 [이스크라]는 2년 여 만의 짧은 기간 동안 통일적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그 성과에 기초하여 1903년 7월 30일부터 8월 23일까지 러시아 혁명가들은 영국 런던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26개 사회민주노동당 조직을 대표한 43명이 모였는데, 처음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밀정의 감시를 피해 나중에 장소를 런던으로 옮겨 속개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대표들은 주요 당 강령을 통과시켰으며, 국제노동운동 사상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1) 를 자신의 역사적 임무로 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정식 성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당 규약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참석자들 간에는 첨예한 이견이 발생하였다. 레닌은 당원들이 당의 강령을 인정하고 정기적인 당비 납부를 통해 물질적으로 당을 도울 뿐만 아니라, “당의 한 조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반대자들은 후자의 조건을 부가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그보다는 당이 좀 더 느슨하길 원했다.
결국 레닌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다수파가 되었으며 이후 '볼셰비키'(러시아어로 다수파라는 뜻)로 불려 지게 되었다. 반대자는 소수파로 '멘셰비키'(러시아어로 소수파라는 뜻)라 불려졌다. 이리하여 당은 창당과 함께 두 파로 갈리게 되었으며, 볼셰비키와 레닌주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 대회의 소집을 위해 레닌은 신문사업과 당 창당을 긴밀히 결합함으로써 세계 각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레닌은 '집단적 선전가‘이자 ’집단적 조직가'라는 명언으로 당 창건 과정에서의 정치신문의 역할을 요약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레닌의 신문사상은 후대에 이르러서는 보는 이에 따라 그 이해 정도나 시각이 크게 달라진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첫째, 소위 '시간문제'다. 즉, 레닌의 신문사상이 단지 1903년 러시아사회주의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당 창건’ 임무와 관련하여서만 적용되는 것인지의 여부이다. 당 창건 이후 신문의 역할에 관해서는, 비록 다른 조직 활동이나 정치 활동과 마찬가지로 신문이 당의 여러 사업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러나 더 이상 그전만큼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1903년 8월 이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활동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스크라] 이후 당의 신문 사업은 [전진], [프롤레타리아], [신생활], [별(스타)], [프라우다], [사회민주당원] 등 여러 명칭으로 계속되었다. 다른 한 편 이들 신문들은 레닌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출간되어 혁명의 각기 다른 시기에 그리고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레닌은 신문 사업을 매우 중시한 사람이었으며, 혁명에 뛰어든 후 그의 생애는 시종 신문사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그 때문에 레닌은 망명지에서 직업조사에 응할 때면 자신의 신분을 '저술가', '신문기자', '정치평론가' 등으로 기술하였다.
1900년 12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에 게재된 레닌의 글과 논평은 모두 900편에 달한다. 레닌은 이들 책과 편지에서 노동운동에 있어 신문의 중요한 역할에 관해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제1차 러시아혁명 때인 1905년 10월 말 그는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우리가 노동자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연단은 <페테르부르크 일보>“2) 라고 썼다. 1917년 3월 러시아 제2차 혁명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해외에 머물 무렵, 레닌은 "지금 중요한 일은 노동자들을 혁명적인 사회민주당 주변에 조직할 수 있는 신문을 발간하는 것"3)이라고 말하였다.
러시아혁명에 있어 레닌의 역할과 그의 당내 지위를 볼 때, 그의 말과 활동은 결코 그 개인적인 입장만이 아니라 전체 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신문은 집단적 선전가 이자 집단적 조직가”라는, 그리고 당의 활동에 있어 그 사업을 가장 중심 위치에 놓는 레닌의 신문사상은, 볼셰비키당의 창당 시기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기 전반에 걸쳐 관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레닌 정치신문 사상이 적용되는 '공간‘과 관련된 문제다. 즉 그것은 당시의 제정러시아적 조건에서만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자본주의국가에서도 보편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우리의 당면 과제>(1899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일체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정상적으로 출판되고 발행되는 당의 기관지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러시아의 기존 혁명정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스 등의 노동자들은 신문 출판 외에도 의회 활동, 선거 유세, 대중 집회, 지방사회단체 참가(농촌과 시읍), 수공업자연합회에 대한 공개적 지도(노조, 업종별 노조) 등 공개 활동의 형식과 운동방법이 다양하다.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얻기 전에 반드시 혁명적인 신문으로 이들 모두를 대체해야 하고, 이를 대신해야 한다. 혁명적 정치신문 없이는 우리는 결코 노동운동 전체를 광범위하게 조직할 수 없다."4)
이후 레닌은 또 <일보 전진, 이보 후퇴>(1904년 2-5월)에서, [이스크라]의 조직사상은 "사상적 영도를 하는 기관지의 특수한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이 정치적 노예(전제정치-역자 주) 환경 하에서, 그리고 혁명적 진격을 위한 최초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해야 할 일시적이고 특수적 필요성을 고려한 것"5)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닌의 정치신문 사상은 옛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유용한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판단 근거는 그의 여러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닌은 혁명사업과 관련한 중요한 논단을 제시할 때마다,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의 역사적 경험이나 러시아의 과거 혁명사적 경험을 중요한 근거로 자주 거론하였다. 우리는 이로부터 레닌이 역사적 경험과 실천적 검증을 매우 중시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레닌이 위의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발표할 무렵인 1903년이나 그가 사망한 1924년이든지 간에, '정치신문'에 관한 그의 사상이 '보편성'을 갖는다는 결론을 내릴 만한 경험적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섣부르게 일반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차르 전제하에 있던 러시아의 특별한 정치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1905년 이전의 지하활동 시기뿐만 아니라,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이 가져다준 비교적 느슨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신문 사업은 볼셰비키에 있어 왜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을까? 특히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공개 일간지로 발행된 [프라우다]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이미 일정하게 '표현의 자유'를 쟁취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차르정부에 의한 공식적 인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실력으로 쟁취한 측면이 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와 함께 그 무렵 신문 사업은 볼셰비키의 '두마 의원단'과 함께 당 합법사업의 양 날개를 구축하였다. [프라우다] 사업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양자의 상호 배합 효과는 당시 러시아 노동운동에 커다란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신문 사업은 당의 합법적 공간을 넓히는 수단이었는데, 또한 반대로 이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수단임을 이 시기의 역사는 잘 보여준다. 이 같은 경험은 레닌의 신문사상을 단순히 '정치적 자유가 없었던' 옛 러시아에나 적합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인식에 대해 중대한 도전인 셈이다.
본 글에서 필자가 주로 논하려는 것은 상술한 두 가지 문제이다. 즉, 하나는 레닌의 정치신문 관련한 사상이 단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까지의 당 창건 시기에만 해당되었던 것인지,6) 아니면 러시아혁명 시기 전체를 통해 관통되었던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레닌의 정치신문 사상이 당시의 제정러시아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자본주의국가에 있어서도 상당 정도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우리가 이 두 문제를 조금 만 더 들여다보면 양자 사이에 긴밀한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주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레닌의 정치신문 사상이 어떤 '보편적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이다. 즉 이 사상이 현재 시점에서도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이며, 특히 정치적 자유를 이미 어느 정도 달성한 나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한지 여부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당시 러시아혁명 시기에 신문이 당 사업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우선 검토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차르 전제통치가 비교적 완고하였던 1905년 이전에는 정치적 자유가 매우 적었다. 그에 상응하게 당 사업도 비교적 단조로웠는데 주로 비합법신문 발간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 노동자계급의 힘이 다시 분출되어 나오던 시기에 이르면 철통같은 반동 전제통치의 지배 역시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이에 상응하여 당 사업은 종전의 비밀활동 위주에서, 합법신문과 '두마 의원단' 활동까지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또한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1905년과 1917년 두 차례 혁명이 발발한 시기에는, 반동계급의 통치 질서가 거의 마비된 조건에서 비록 일시적이지만 '가장 느슨한' 정치적 환경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당은 각종 회의와 대규모 대중 집회, 가두행진을 공공연히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소비에트'라는 대중적 권력기구까지도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본문에서 소개하듯이, 그런 중에서도 정치신문은 이 같은 제 사업들 중에서도 당 사업의 가장 근간을 이루었다.
이렇게 볼 때 신문 사업은 창당 시기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전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 당시 러시아적 상황을 뛰어넘는 신문 사업이 갖는 모종의 특성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일종의 인식론상의 '양질 전환' 법칙에 비유될 수 있다. 즉 레닌 정치신문 사상의 ‘시간적 요소’를 충분히 확장할 경우, 다른 나라에 있어서의 적용성 여부와 관련된 '공간적 요소' 역시도 잘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은 레닌 정치신문 사상의 일반적 적용문제를 해명하는데 있어 필자의 기본적인 방법론이다.
1912년 8월 30일 레닌은 <과거와 현재>라는 글에서, 1894년 이래 단순한 '유인물'에서 출발한 노동자언론이 나중에 대중적 공개 일간지인 [프라우다]로까지 발전한 역사를 개괄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이 노정의 태반은 모색 중에 지나갔다. 지금 우리는 대로를 이미 찾았다. 좀 더 용기 있게 발맞추어 나아가자!"7)
레닌이 여기서 “대로를 이미 찾았다”라고 한 말의 뜻은 무엇일까? 레닌의 신문사상에 대한 전면적 검토를 한 후라야 우리는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단지 신문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전체 러시아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렛대(수단)를 발견했다는 뜻은 아닐까?
오늘날 세계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등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각자들이 생존했던 시대와는 많이 다르다. 이미 산업화를 이룬 국가들이 적지 않으며, 세계 많은 나라의 노동자계급은 인구 등 객관적인 조건에서 보자면 일찍이 사회변혁의 주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오늘날 국제노동운동은 또한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예컨대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 조건 하에서 어떻게 노동자계급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일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공장사업과 의회활동을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해야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의원단'을 감시하며 노동자계급정당이 의회주의정당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강력한 여론과 인터넷 미디어라는 새로운 현대적 환경 속에서 노동운동이 생존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가 등이다.
레닌의 신문사상은 옛 러시아혁명기 볼셰비키정당의 건설과 러시아혁명 전반을 승리로 이끈 풍부한 경험을 담고 있다. 때문에 그것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노동자언론을 어떻게 건설해야 할지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운동 전반의 발전을 어떻게 이룰지에 관해 적지 않은 시사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계속)
[본문 주석]
1)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일인독재’와는 다른 ‘계급독재’를 의미한다. 즉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가계급에 대한 독재이며, 이는 국가가 어느 계급에 의해 통치되는가를 밝히는 ‘국체(國體)’의 문제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그것이 의회제든 대통령제든 민주공화국의 어떤 구체적 형태를 취하는지―이를 ‘정체(政體)’문제라고 부른다―와 상관없이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재, 즉 ‘부르주아독재’라고 할 수 있다.
2) 《레닌전집》 제45권,인민출판사 1990년판, p131, 북경.
3) 《레닌전집》 제47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565, 북경.
4) 《레닌전집》 제4권,인민출판사 1984년판, p69, 북경. 인용문 중 경사체에 의한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5) 《레닌전집》 제8권, 인민출판사 1986판,p236, 북경.
6) 1898년 3월 13일 러시아의 서부 도시 민스크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표자대회 (당 대회)가 개최됐다. 참석자는 모두 9명이었는데, 대회는 비록 형식상 당의 성립을 선포하였지만 당시엔 당 강령과 규약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대회에서 선출된 일부 중앙위원들도 대회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기 때문에 당 창건 작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7) 《레닌전집》 제22권,인민출판사 1990년판, p75,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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