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34 제86차 문화답사 (4-4); 島山公園-狎鷗亭터
島山公園으로
(132) ‘건물 0914’ 외관이 독특하다.
특히 건물 앞 벽의 平面 일부를 立體的으로 만들어 사람 같은 모습이
보인다.
島山公園
서울 江南區 新沙洞에 있는 市立公園으로 1947년에 설립된 (社)島山 安昌浩先生 記念事業會가
1971년에
着工, 1973년에 開場했다. 공원 이름은 安昌浩 선생의
雅號인 ‘島山’에서 따온 것으로,
先生의 愛國心과 敎育精神을 기념하는 뜻으로 붙였다. 島山은
仁川港을 떠나 美國으로 遊學 갈 때
甲板에서 茫茫大海에 홀로 떠 있는 하와이를 바라보고 지은 雅號로, 島山은
平安南道 江西郡
西海의 섬마을에서 태어나 남달리 섬을 좋아했다고 한다. (*茫: 아득할 망)
공원 안에는 島山 安昌浩와 獨立運動家인 夫人 李惠鍊 女史의 合葬墓가 있으며, 공원
동쪽에는
島山 安昌浩 銅像이 있다. 1998년에는 지상 1층, 지하 2층(건물면적 988.66㎡) 규모의
[島山 安昌浩 記念館]을 건립했다.
(133) 島山公園 입구
(134) 島山公園 산책로
이 길을 계속 가면 島山 安昌浩 夫婦의 合葬墓가 있다는데 가보지 못했다.
島山 安昌浩
夫婦의 合葬墓는 1973년 島山의 墓는 서울 中浪區의 忘憂里 共同墓地에서,
夫人 李惠鍊 女史는 美國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遺骸를 移葬해 合葬했다.
(135) [島山氣像 紀念碑] -1973년 11월 건립
島山 安昌浩가 강조한 民主國家를
위한 國民의 五大精神: 自主精神,
眞理精神, 協同精神, 改造精神, 愛國精神.
(136) 이름 없는 작은 三層石塔
(137) 향나무
(138) 향나무 아래에 있는 標石
(139) 島山 安昌浩 記念館 -1998년 건립
島山 安昌浩의 思想과 精神을
널리 알리기 위해 誕生 120주년과 殉國 60周忌를 맞이하여
1998년 11월 지상 1층, 지하 2층으로 건립했다
지상 1층의 도산홀은 展示館·映像室·資料室로, 지하 1층의 대성홀은 事務局과
島山思想硏究會室, 지하 2층의 점진홀은 講堂으로 구성되었다.
所藏品은 島山의 遺品과
關聯資料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찍은 사진, 각반,
象牙印章과 인장집, 주머니칼, 담뱃갑, 담뱃대, 재떨이, 遺墨 3점 등의 遺品 71점과
丹齋 申采浩가 島山에게 보낸 書翰 등 19점, 興士團 등에서 활동할 때 작성한 文書 48점,
臨時政府 史料, 島山日記
등을 전시하고 있다.
(140) 銅像이 있는 [PHOTO ZONE]
압구정 터 [狎鷗亭趾]
狎鷗亭은 江南區 狎鷗亭洞에 있던 朝鮮前期의 權臣 韓明澮의 別墅로, 東湖大橋 옆 狎鷗亭
現代5차아파트 74동
뒤에 있었으며, ‘狎鷗亭’이라는 亭子의 이름은 韓明澮의 부탁을 받고
明나라 翰林學士 倪謙이 지었는데, 그 뜻은 ‘富貴功名 다 버리고 江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며
지낸다.’는 것으로, 宋나라 宰相 韓琦가 晩年에 政界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書齋를
‘狎鷗亭’이라고 했던 故事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내용은 <狎鷗亭記文>에 전하고 있는데, 權臣인
韓明澮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이곳을 지나가는 文人·有志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狎: 익숙할 압 *鷗: 갈매기 구 *澮: 봇도랑
회 *墅: 농막 서 *翰: 편지 한 *倪: 어린이
예
*謙: 겸손할 겸 *琦: 옥 이름 기)
謙齋 鄭敾이 그린 <狎鷗亭圖>에는
높은 언덕 위에 있는 亭子는 마루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으로, 素朴한 일반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敾: 기울
선)
당시 압구정나루는 江幅이 넓어 湖水와 같다고 ‘東湖’라고 부르던 곳의 남쪽 낭떠러지 언덕 밑에
있었으며, 東湖 가에 있는
名所의 한 곳이었다. 漢江물이 발 아래로 悠悠히 흐르고 강 건너
북쪽으로 漢陽都城의 여러 산과 멀리
三角山 連峰과 道峯山·水落山·佛巖山이 보이고,
東南西쪽으로 강 건너 살곶이벌과 그 뒤의 阿且 山·南漢山·淸溪山·冠岳山
등이 두루 보이는 뛰어난 터전이었다. (*悠: 멀 유)
이후 1970年代에 開發로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洞名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標石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이 정자는 中國使臣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狎鷗亭의 배 띄우기는
‘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韓明澮가 官職을 사퇴하고 狎鷗亭을 짓고 이곳에서 餘生을 보내려고 하니,
成宗 7년(1476) 王이 <狎鷗亭詩>를 下賜하며 離別했으며, 朝廷 文臣들도 次韻했는데 그 詩가
수백
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韻: 운 운)
韓明澮가 화려한 亭子 ‘狎鷗亭’을 짓고 그 경치를 감탄하는 懸板들을 걸었는데, 그 현판들 중에
다음과
같은 詩가 있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扶:
도울 부 *稷: 피 직)
自首臥江湖(자수와강호)/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臥:
누울 와)
조선의 빼어난 文章家인 梅月堂 金時習이 압구정에 놀러 가 이 懸板을 보고는 글씨를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靑春危社稷(청춘위사직)/청춘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自首汚江湖(자수오강호)/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汚:
더러울 오)
梅月堂은 ‘扶’를 ‘危’로, ‘臥’자를 ‘汚’로 고쳤는데, 그 글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럴듯하다고 했으며,
이 현판을 바라본
韓明澮는 그 현판을 떼어내고 말았다.
*韓明澮(1415~1487)
-本貫; 淸州 -號; 狎鷗亭, 四友堂 -諡號; 忠成
–출생 1415년 漢城/사망 1487년
京畿 廣州牧 彦州面 狎鷗亭里
祖父는 朝鮮의 開國功臣인 竹所 韓尙質이며 父親 韓起와 藝文館大提學
李逖의 딸인 母親
사이에서 漢城에서 태어났다. 두 딸은 章順王后(睿宗
妃)와 恭惠王后(成宗 妃)이다.
칠삭동이로 태어나 早失父母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다가 젊어서 여러 번 科擧에 落榜하고,
38세 때인 文宗 2년(1452)
蔭補(*祖上의 德으로 얻는 벼슬)로 敬德宮直을
얻었다.
친구인 校理 權擥의
주선으로 首陽大君의 무리에 가담하여 端宗 1년(1453) 癸酉靖難
때
首陽大君을 도왔으며, 靖難功臣
1등으로
司僕寺少尹에 올랐다. (*逖: 멀 적 *睿: 슬기 예
*榜: 방 붙일 방 *蔭: 그늘 음 *擥: 가질
람 *靖: 편안할 정 *僕: 종 복 *寺: 관청 시)
1455년 世祖가 卽位하자 左副承旨를 거쳐 右承旨가
되었으며, 이듬해 死六臣의 端宗復位運動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誅殺에 적극 가담하여 左承旨를
거쳐 都承旨에 올랐다. 世祖 3년(1457)
吏曹判書가 되고, 上黨君에
봉해졌으며, 兵曹判書를 거쳐, 世祖 5년(1459) 黃海·平安·咸吉·江原
四道의 體察使를 역임했다. 1461년 上黨府院君에 進封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左議政을
거쳐 領議政이 되었다가 병으로 은퇴했다. 1468년 世祖가 昇遐하고 南怡의 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翊戴功臣 1등에 오르고, 睿宗 1년(1469) 領議政에 復職했다. (*誅: 벨 주 *遐: 멀 하 *
怡: 기쁠 이 *翊: 도울 익 *戴: 일 대)
睿宗이 急逝하고 막내 사위인 成宗이 즉위하자 어린 王을 대신하여 政務를 맡아보는 院相이 되어
庶政을 결재하면서 兵曹判書를
兼任하여 그의 勢道는 絶頂에 이르렀다. 成宗 5년(1474) 몸이
쇠약했던 恭惠王后가 他界하자 韓明澮의 權勢도 墜落하기 시작하여 領議政과 兵曹判書에서
解任되고, 狎鷗亭에서 明나라 使臣을 私事롭게 접대한 일로 彈劾되어 모든 官職이 削奪되었다.
世祖의 廟庭에 配享되고, 燕山君
10년(1504) 甲子士禍 때 尹妃 賜死事件에 관련되었다고
剖棺斬屍되어 목을 잘라 漢陽
네거리에 걸었으며, 1506년 中宗反正이 일어나 伸寃되었다.
韓明澮의 墓와 死後 1년 뒤인 成宗 19년(1488)에 건립한 韓明澮先生 神道碑(충남문화재자료
332호)는 忠南 天安市 東南區 修身面에 있다. (*劾: 꾸짖을 핵 *奪: 빼앗을 탈 *賜: 줄
사
*剖: 쪼갤 부 *寃: 원통할 원)
(141) 狎鷗亭洞 현대아파트 團地
(142) 落羽松이 우거진 狎鷗亭 現代5차아파트의
街路樹
(143) 狎鷗亭 現代5차아파트 73동-74동
(144) 狎鷗亭 現代5차아파트 74동 뒤쪽
(145) 압구정 터[狎鷗亭 趾]
(146) 압구정 터[狎鷗亭 趾] 標石
압구정 터[狎鷗亭 趾]
朝鮮朝 世祖 때부터 成宗 때까지 領議政을 지낸 權臣 韓明澮가 그의 號를 따서 따서 지은
‘狎鷗亭’이라는 亭子가 있던 名所.
(147) 압구정 터[狎鷗亭 趾]
(148) 압구정 터[狎鷗亭 趾] 안내판
午餐 場
(149) 狎鷗亭路에서 보이는 狎鷗亭 現代百貨店
(150) [안동국시], 강남구 언주로
제일빌딩 2층
(151) [明鏡止水], 식당 벽에
걸어놓은 額子
*明鏡止水
‘밝은 거울과 停止된 물’이라는 뜻으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
<莊子> [德充符篇]에 나오는 말로, 魯 나라에 죄를 지어 다리를
잘린 王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이
孔子의 弟子 數만큼 많았다. 孔子의 弟子가 사람들이
모여드는 까닭을 묻자, 孔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駘: 둔마 태*)
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인막감어류수 이감어지수 유지능지중지)/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鑑: 거울 감 *唯: 오직
유)
(152) [안동국시]에서
(153) [안동국시]에서
(154) [안동국시]에서
- 끝 -
첫댓글 압구정의유래는 알고있었지만 어디인줄 모랐고 도산 공원에 안창호선생의 묘소가있는지는 고산 덕분에 오늘 처음 알았네요 등잔밑이어둡다고 늘 지나면서도 못가본곳 잘보고갑니다 해설까지 곁들여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