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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청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즈카 2,14-17
† 복음 마태 12,46-50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제 주님께서 구원을
실현시키시려고 곧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가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 요아킴과 어머니 안나에 의해 주님께 봉헌되었다는
전승에서 유래합니다. 티 한 점 없이 순수한 존재로서 주님께 봉헌되신
성모님은, 고단한 세상살이에 방황하거나 버거워하는 이들에게 늘
위로이자 희망이 되셨습니다.
순결하게 봉헌되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신앙인들의 확신은 예술에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전구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은 예술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희생적인 여인의 기도로 나타나곤
하는데, 유명한 예로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들 수 있습니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의 영혼이 결국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이가 성모님께 매달리며 올리는 기도를 통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중세 때의 기사이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음유 시인인 탄호이저가 마녀의 유혹에 빠져
관능적 쾌락과 거룩한 삶 사이에서 갈등하였으나, 애인 엘리자베트의
순수한 사랑과 그녀의 죽음에 의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탄호이저가 신성 모독과 관능적 향락을 찬양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저주받고 추방되었을 때, 애인 엘리자베트는 그를 위한 동정 성모님의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쳤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그만 병들어 죽었습니다. 탄호이저는 그녀의 관을 바라보며
“거룩한 엘리자베트,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하고 절규하며 숨을
거둡니다. 이제 동이 트며 그의 구원을 알리는 순례자들의 합창이
들려옵니다. 그녀의 진실한 기도가 그를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생의 마지막 순간에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환자의 임종을
수십 년 동안 관찰하면서 특별히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마지막 순간에 기억나는 것은 평범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어떤 순간’
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업, 일,
학위, 명예, 재산 취득 등등.... 그런데 이렇게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된
일들을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기 보다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충만하게
느꼈던 순간을 기억하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순간,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한 순간.... 이런 순간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서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힘들어 했구나 하면서 후회하는 우리가 아닌,
생의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띨 수 있는 ‘어떤 순간’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은 사소하고 쉬운 일상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때, 기분 좋은 햇살을 받으면서 자전거를 탈 때, 너무나 피곤한 오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했을 때
등등…….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순간’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문제는 그
‘어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대신 쓸데없는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소중한 ‘어떤 순간’을 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에만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성모님과 형제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반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대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족을 하찮게 여기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르기보다는 주님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할 하느님의 뜻과 함께 하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런 어떤 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거두어들인 수확물로 하루하루를 판단하지 말고 당신이 심은
씨앗으로 하루하루를 판단하라(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말 한 마디의 중요성(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이집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산만해서 단 3분도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칭찬하셨어. 의자에 앉아 있기를 1분도 못 견디던
네가 이제는 3분이나 앉아 있다고 칭찬하시던걸~ 다른 엄마들이 모두
엄마를 부러워하더구나!"
그날 아들은 평소와 달리 밥투정을 하지 않고 밥을 두 공기나 뚝딱 비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어머니가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아드님 성적이 몹시 안 좋아요. 검사를 받아보세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너를 믿고 계시더구나. 넌 결코 머리 나쁜 학생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번에 21등 했던 네 짝도 제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어머니 말이 끝나자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훨씬
착하고 의젓해진 듯했다. 아들이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아드님 성적으로는 명문고에 들어가는 건 좀 어렵겠습니다."
어머니는 교문 앞에 기다리던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라.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명문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
아들은 끝내 명문고에 들어갔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아들은
명문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아들은 대학 입학 허가 도장이 찍힌
우편물을 어머니의 손에 쥐여 드리고는 엉엉 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 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란 건 저도 잘 알아요. 어머니의 격려와
사랑이 오늘의 저를 만드셨다는 것 저도 알아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예전에 유명했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말 한 마디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예수님의 가족|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예수님의 가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마르3,2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 믿음에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서 행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지킨 분으로 참 가족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하셨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행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가 그분의 모범과 표양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4,24). 영적인 사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순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형님과 누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가족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실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새로운 가정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뉴튼수도원 11일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즈카2,14-17 마태12,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새로운 가정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어제 약속했던 대로 가난하나 사랑 많은 분이 겨울 옷을 선물했습니다.
입어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크기는 X-large, 부피는 작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벼운 옷이었습니다.
그대로 그분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혈육의 가족 이상의 정을 느꼈습니다. 이런 옷처럼 'X-large의 큰 마음에,
작고(little), 부드럽고(soft), 따뜻하고(warm), 가벼운(light)마음의 사
람이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주위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 선물했던 그분이나 저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의 주님의
누이요 형제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진정 새로운 가정의 탄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은 교회공동체를,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평화로움도 잊지 못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 고히 잠들어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흡사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한 가정의 형제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
주님을 닮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진정 죽음을 넘어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새로운 가정 공동체입니다.
주님을 중심한 새로운 가정의 모범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아마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보다 충실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주님을 모셨던 분은 없을 것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딸 시온이 상징하는바 성모님이자 주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 모두들입니다.
바로 위의 말씀은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상의 혈육 가정 공동체는 얼마나
허약한지요. 또 요즘 붕괴되고, 파괴되고 있는 가정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제가 자주 드는 직설적 예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육의 가정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목격합니다.
'돈 중심', '사람 중심'에서 '주님 중심'의 새로운 가정의 믿음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혈육의 가정이요 세상 공동체들입니다.
미래의 유일한 대안 공동체 역시 주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정의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수도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우상들이나 허무의 어둠이
도저히 깃들 수 없는 생명과 빛,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아마 세상에 이보다 견고한 이상적 공동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공동체를 당신으로 중심한
새로운 가정 공동체로 리모델링해 주시며,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루카11,28).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며칠 전에 의정부에 있는 어머님을 방문했습니다. 모처럼 집에 있던 앨범을
보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결혼사진도 보았고, 저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아버님 사진도 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의 학생 시절의
사진들도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 신학생 때,
군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았습니다. ‘아 옛날이여!’라고 할 정도로 오랜
사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 사진 속 어린 시절의 친구도
있고, 조금씩 얼굴이며, 추억들이 생각나는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4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같은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름도 변함이
없고, 혈액형도 같고, 부모님과 형제들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40년
전과 다른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과 삶의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키도 자랐고, 몸무게도 변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도우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넣는다면
컴퓨터는 같은 컴퓨터이지만 다른 컴퓨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능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악기,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전투기, 탱크, 총, 대포, 미사일, 잠수함’은 ‘내 것’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또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양심을 버리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믿는 힘이 굳건하면 됩니다. 그럼요!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믿는 힘이 굳건하면 됩니다. 그럼요!
남북통일을 기대합니까? 쉽나요? 이혼율이 높아가는 걸 보면 걱정됩니다.
함께 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걸 보면 통일도 그런 맥락 같습니다.
자기를 하느님 자리(최고자리)에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걱정입니다.
가족이라도 그렇고 동창들끼리도 그렇고 이웃이라도 그러니 한심합니다.
통일 합치 일치 등 이런 일은 점점 멀어지는 우리사회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힘이 굳건하면 됩니다. 그럼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자발적인 내어줌/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 마태 12,46-50(14.11.2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자발적인 내어줌
푸르른 생명력을 뿜어대던 잎들이 형형색색 물들어 아름다움을 회상하게
해주더니 어느새 낙엽되어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삶의 근원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이를 충만히 채워 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에
성전에 봉헌되셨다고 한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별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평생 또는 일정 기간
성전에서 다양한 일에 봉사하며 사는 이른바 ‘나자레오’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느님 공경을 배우고 공동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했지만
남녀가 함께 남녀가 숙식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독신의 의무가 없어
언제든 성전 봉사를 마치고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녀를 가지려고 하느님께 서원한 경우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굳은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또는
성전 일을 돕기 위해서 이런 봉헌된 삶을 살았다.
오늘 다음 두 가지를 깊이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에서 생각해 볼 점은 ‘자발성'이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봉사하고 성경공부하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다. 그
이유는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하고,
의무감이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겪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상 죽음을 맞는 그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말과 행동으로 전 생애 동안 하느님 뜻에 스스로 순명하셨다.
바오로 6세 교종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기쁨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우울함은 바빌론의 악과도 같은 것이라 하며 기쁘게 살 것을
권고하였다. 이 기쁨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께 기꺼이 응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견딜 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봉헌의 의미이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생명의 진리이다. 내놓은 것은 늘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헌신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봉헌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할 때 그 봉헌의 정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성해주신다. 또 하느님께서 세례와 서약, 서품 등을 통해
축성해 주시는 것은 그런 봉헌을 충만히 살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봉헌
없는 축성, 희생 없는 축성과 봉헌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인의 봉헌은
전 존재의 봉헌이어야 하며, 온전한 봉헌을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봉헌은 사랑의 결정체이자 아름다운 기도이다.
나는 어떤 봉헌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그 말씀의 힘으로
일생 동안 충만한 봉헌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으며, 나자렛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셨으며, 아드님의 갈릴래아 여정에
늘 말없이 동반하셨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셨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살아났다.
그분은 말씀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으며(마태 12,50)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은 ‘항구함’, ‘함께함’, ‘견딤과
받아들임’, ‘말씀에 자신을 내맡김’ 등을 통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의 전 여정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셨다.
나의 일상은 항구하게 이런 자헌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뽑으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 안에는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동정녀 인사2-3절)라고 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성모님을 기린다. 오늘 나의 삶과 시간과 만남이
하느님께 봉헌되어 은총과 선이 가득한 축성의 날로 기억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떠나가는 존재의 이유
2014년 가해 11월21일 금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떠나가는 존재의 이유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명을 완수할 장소인 예루살렘 성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될 장소, 진저리쳐지게 채찍질 당할 장소, 끔찍한
십자가형에 처할 두려운 곳이기에 서러워서 눈물 흘리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성도 예루살렘의 멸망이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멸이 안쓰러워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당신 자신보다는 당신 양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입니다.
인간은 보통 언제 웁니까? 사랑이 떠나갈 때 서럽게 웁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 눈물 흘립니다. 내가 베푼 호의가 배은망덕으로 돌아올
때 웁니다. 내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할 때 눈물 흘립니다.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던 성모님께서도 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분 울음의
특징은 소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무리 무염시태 잉태라고 하지만 자신의 태중에
머물렀던 열 달이나 머물렀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갓난아기 때는 불철주야,
애지중지, 노심초사하면서 정성껏 길렀습니다. 소년 시절 무럭무럭
성장하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채워주며 어찌 모자간의 정이 싹트지
않았겠습니까?
성모님에게서 예수님은 삶의 이유였고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존재의 이유가 떠나갔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떠남의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더 큰 사명 수행을 위해 출가하는 예수님을 아프지만 기꺼이
떠나보냈습니다. 그 떠나보냄은 한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신 안부가 너무 궁금해 먼 길을 찾아오신 성모님이셨습니다. 문밖으로
나와서 인사라도 하는 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장 48~50절)
더 큰 선을 추구하기 위해,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눈물을 머금고 단절해버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 내가 애써 키운 아들이지만 인류 구원 사업의 완결을 위해
기꺼이 세상에 내어놓은 성모님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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