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시에게 가는 길 Ⅰ,Ⅱ)으로 시를 읽을 준비를 마쳤다고 치고, 서정주의 「영산홍」과 조지훈의 「낙화」를 만나보기로 하자. 윤동주의 시가 그러했듯이 두 시 모두 그 문면의 뜻으로만 보면 참 쉬운 시이다. 그러나 외형상 성글게 짜여진 그 문자 기호들 속으로,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지침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느낌과 마음을 들이밀면, 거기 새로운 풍경이 살아서 떠오를 것이다.
서정주의 「영산홍」 새겨 읽기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 「영산홍」 전문
단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 속에는 넓고도 깊은 세상이 서려있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집이리라. 읍내에 본가가 있는 면사무소 주사쯤이나 됨직한 바깥사람은 며칠째 들러지를 않는다. 집 안팎을 정갈하게 가다듬어 두고 딱히 오늘이라고 내일이라고 기약도 없는 사람을 기다리던 소실댁은 늦은 봄 긴 낮에 설핏 낮잠이 든 것인데, 울 옆의 ‘영상홍’은 곱기도 고와서 서러울 지경. 게다가 불쑥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갈 남정네를 기다려, 윤이 나도록 닦아놓았을 저 툇마루 위의 놋요강이라니! 시인은 더 긴말을 붙이지 않고, 그 오두막 산 너머에는 바다가 있고, 사리 때인 그 바다에는 소금기에 절은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가 산다고만 귀뜸할 뿐이다.
우선 이 짧은 시 속에, 산자락 오두막집 울 밑에서 시작하여 산 너머 바다, 그 바다의 갈매기에 까지 이르는 넓은 풍경이 숨 쉬고 있다. 그런데 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여러 사물들이 서로 참 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그 각각의 사물들에 정서적 통일성을 부여한 것이라 해도 좋고, 그 사물이 본디 가지고 있던 내적 연관을 시인 특유의 총명으로 봐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풍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어떠한가. 바다가 가까운 농촌의 늦은 봄 텅 빈 고요와 ‘소실댁’이 환기하는 적막함과 그 ‘낮잠’의 체념 섞인 쓸쓸한 나른함은 어떤가. 사람을 기다리는 저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의 숙명적인 막막함과 안쓰러움과 사는 일의 쓰디씀은 또 어떤가. 그런 저른 것들이 겹쳐지면서 여러분도 가슴이 아릿한지.
이처럼 시를 관통하는 정서의 줄기와 읽는 이의 마음이 웬만큼 일치된 뒤에는 어렵지 않게 부분 부분의 표현들이며 이미지, 운율의 구사가 얼마나 탁월한지 실감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는/-고//-든/-댁//-에/-강//-는/-때//-서/-기>의 어미들은 우리말 음운이 가지는 느낌과 시 전체의 분위기 간의 절묘한 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3연의 표현은 ‘과연 이래서 서정주’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목일 것이다. 어떤 기다란 설명이, 다른 어떤 표현이 이 ‘놋요강’ 하나가 감당해내고 있는 그 착잡한 정서적 함축과 선명함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이 연으로 해서 시 전체는 생명을 얻고 있으며, 다른 연들의 나지막함에 뒤받쳐져 이 연이 또 눈부셔지는 것이다.
이런 시를 만나면 우리는 차라리 그 시 속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한 두어 달쯤 살다가 나왔으면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세상살이를 보는 우리의 눈이 좀 더 깊고 그윽해질 터이다.
조지훈의 「낙화」 새겨 읽기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오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전문
조지훈의 「낙화」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꽃이 지는 산사(山寺)의 새벽에 홀로 깨어 앉아 있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정성스레 읽다 보면 시 속의 마음에 물들어 결국 그렇게 될 터이지만, 「낙화」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서의 색조는 서정주의 「영산홍」과 다르다. 서정주가 세속적 삶의 애환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보아낸다면, 조지훈은 숨은 선비의 고결함, 고전적인 전아함과 기품 속에서 아름다움을 취한다. 두 시를 비교해 보아도 그런 점은 쉬 느낄 수 있는데, 실제로 두 시인의 시세계 전반이 그러하다.
첫 행에 서린 시의 화자(話者)―시인 자신이라 해도 무방하다―의 숨결을 가만히 만져보면, 세속을 초탈한 말 그대로의 달관이 아니라, 다스려지지 못한 울분을 짐짓 달관의 말투에 기대어 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서린 그 한은 마침내 제어되지 못하고 마지막 연에 이르러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로 터져 나오고 만다. 바로 이런 대목, 「승무」, ‘「고사(古寺)」 등 조지훈 시의 겉을 이루고 있는 예스러움의 이면에 실은 뿌리를 달리하는 현실적 실의와 내면의 갈등이 서려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아마도 그러한 번뇌를 다스리기 위해 더욱 의도적으로 예스러운 어법의 질서 속으로 자신의 시와 삶을 몰아붙였는지도 모른다. 이 시도 자신의 답답한 심사를 한시(漢詩)풍의 절제된 리듬을 빌려 토로한 것이다.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한 구절로 날이 밝아오는 모습을 잡아내는 솜씨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에서 과시되는 일품의 언어 조탁은 그것만으로도 우리 시사에 기록되어 마땅한 것이지만, 이 시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의 대목이 아닌가 한다. 무슨 일인가로 좌절한 이 결백한 선비는 저 ‘꽃이 짐’ 앞에서 안타까워 가슴만 미어질 뿐 어찌해볼 길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는 간신히 촛불을 끄는 것으로서 ‘꽃의 짐’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인데, 이 결백함은 눈물겨운 바 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예민한 미적 균형이자 윤리감각인 것이다.
시는 어떻게 읽어야 온전하게 읽는 것이 될까? 시라고 불리는 예술의 형식이 인간의 삶과 함께하기 시작한 지는, 공자가 모아 엮었다는 『시경』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등의 이름을 떠올려 보더라도 수천 년이 족히 넘는 것을 알 수 있는 터이며, 그러니 동서고금의 내로라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시에 대해 한마디씩은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남겨진 말씀들이 전혀 터무니없거나 한 것이 아니고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나 저마다 일말의 진리를 간직한 것이고 보니, 시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을 구하는 노릇이 쉬울 듯 하면서도 몹시 헷갈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나 내키는 대로 써놓고 시라고 우기면 뭐할 수도 없는, 오히려 시가 무엇인가 정색을 하고 묻는 게 ‘촌스러운’ 짓거리가 되는 딱한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사정이 없지 않고, 또 시경의 가장 오래된 판본에 붙여진 해설에도 ‘시는 마음/ 뜻이 움직이는 바가 말로 핀 것’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멋대로 써갈기기’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은 ‘자유’의 뜻을 ‘도둑질도 살인도 내 마음대로’쯤의 뜻으로 푸는 것만큼이나 딱한 억지일 것이다.
시읽기 역시 다르지 않다.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작동하지 않으면, 낱말들의 겉 뜻풀이 이상의 시 읽기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데, 이때에도 ‘자유’를 ‘코에 걸건 귀에 걸건 내 멋대로’쯤의 의미로 우긴다면 시 읽기의 허울 아래 오히려 시를 폭행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시는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나는 거듭 시에 대해 공경스러우라고 말씀드린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겸허와 공경인 것이며, 풀과 돌, 나무, 벌레들에 대한 공경에 통하는 것이며, 실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공경인 것이다. 시에 대한 기술적인 분석과 설명의 지혜는 아마도 그것이 충실할 때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 ‘시를 어루만지다(김사인, 도서출판 b,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09.01.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