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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43: 5
시편 43: 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영혼 (נֶפֶשׁ)
내 영혼아--
시편에서 시로 표현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늘 비유와 은유 그리고 의인화 등의 국어적인 문법을 잘 알고 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 국어를 잘 모르지만 가능한 사전을 찾아가면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혼 (נֶפֶשׁ)
히브리어 사전에서는 (네페쉬)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국어로 가장 근접하게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이 영혼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표현을 한다고 해도 그 뜻만 같다면 문제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고라자손의 시편(Psalms)입니다
시편은 시를 노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악기에 맞추어서 노래를 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것은 명확하지는 않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라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하고 보아야 하고 그러다보니까 의미적인 부분이 더 많이 포함이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사람들은 마치 실체를 대하듯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혼이라는 단어를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실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아니 실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총제적인 의미에서 영혼입니다
그러나 저는 숨 쉬는 존재, 또는 생명이라고 해도 틀리지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가지고 말씀을 한다고 해도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를 생각하면서 이 영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저 교회 안에서 단순하게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고 있고 그리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막연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영혼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면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 거의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라고 사전에서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상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נֶפֶשׁ) 네페쉬
히브리어의 단어의 뜻입니다 영혼, 숨 쉬는 존재, 생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어사전에서 보면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국가의 언어의 사전에서 이 영혼이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거의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모든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으로 알고 있는 것을 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보고 있고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고착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목사들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있고 아예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실체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실체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의미에서 실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영혼을 거의 실체로 보고 있다는 것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마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상입니다
영혼 구원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영혼에 대해서 실체로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자기 신체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영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출발이 됨으로 해서 신체의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종교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니 거의 전부가 신체의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이 영혼이라는 단어에서 출발이 되었다고 해도 틀리지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 시편에서 내 영혼아 라고 하면서 의인화를 해서 마치 실체가 있는 것으로 말씀을 하니까 사람들은 자기 영혼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실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부를 때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면 영입니다. 그리고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과 생명은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실체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입니다
한 단어의 오해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혼이라는 단어를 마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실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어의 원어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의미적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성경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영혼입니다
이 영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사사기부터 해서 요한계시록까지에서 이 영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면 그것을 실체로 받아들이고 자기 육체에 마치 이 영혼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육체의 구원을 주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7:11절을 보면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비유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비유에 대해서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그 단어만을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욥이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욥은 지금 육체와 마음의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아픕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육체는 병이 들어서 아프고 마음은 아들들이 다 죽고 또 부인이 여호와를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을 하고 떠나고 또 친구들이 와서 자기를 정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욥은 마음이 아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붙이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는 어디가 아픈가 하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욥기에서 처음으로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나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겠습니까? 가슴이 메어 하소연하고 마음이 아파 울부짖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킹제임스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입을 삼가지 아니하고 내 영의 고통 가운데서 말하리이다 내가 내 혼의 쓰라림 가운데 불평하리이다”
대표적인 4가지 번역본을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아예 영혼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번역에서는 내 영의 고통이라고 번역을 했고 내 혼의 쓰라림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글개역성경은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번역입니까?
저는 한글개역 성경이 가장 잘 번역이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영혼을 실체로 보지 않고 의미적으로 보고 있다면 욥의 고난에 대해서 그래도 가장 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한글개역성경이 아닌가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실체입니까?
사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라고 본다면 그리고 그것이 영생과 연결이 되어 있는 실체라고 본다면 새번역과 공동번역이 잘 번역이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체가 아니라 의미이기 때문에 한글개역성경이 욥의 고난에 대해서 가장 잘 번역이 되어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에 대해서 의미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자기 생명에 대해서 지금 얼마나 큰 고난 속에 있는 가를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을 하는 말씀이 바로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원망입니다
우리가 욥의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누구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자 욥이 회개를 하는 것을 그 결말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욥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그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와 마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구원을 받는 영혼이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하나님께 분함을 하소연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상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영의 고통 가운데서 말을 한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영의 의미를 안다면 그 영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혼보다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은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의 고백에서 보면 그는 스스로가 말을 하듯이 내게서 흠을 찾을만한 것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로서는 당연히 자기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에 있어서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한다고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황입니다
욥은 곧 죽을 것 같습니다. 온 몸에도 악창이 나 있고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에서 친구들과 변론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다. 그 영혼 구원은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괴로움을 원망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왜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나 살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혼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은 자기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곧 죽을 운명 앞에 있습니다. 그런 그가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한다는 말씀은 가장 잘 번역이 되어 있는 말씀이 아닌가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는 구원을 받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까 구원은 고사하고 자기 생명마저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한다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자기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았는데 그 구원을 못 받는 사람과 같은 이성적 생각이 드니까 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입니다
실제 그는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가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친구들은 와서 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실제로 자기 육체와 마음이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까 이제까지의 이성적 구원관에 대해서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이 번역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어를 보고 오류가 많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글개역 성경보다 더 잘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정말 영혼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살았고 그것에 대해서 지금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한다는 번역은 가장 잘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편6:3-4절을 보면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주님께서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야훼여! 돌아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킹제임스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의 혼도 심히 고통스러우니 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오 주여 동아오셔서 나의 혼을 구해주소서 오 주의 자비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6편입니다
우리가 다른 번역을 보면서 성경을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글개역성경에서만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왜 사람들이 한글개역성경을 사람들이 폄하를 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이 영혼이라는 단어만 찾아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한글개역성경에서만 영혼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다른 성경은 목숨, 생명, 혼 등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성경학자들이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성경을 연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있고 또 히브리어의 원어를 보고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번역에서 그것도 서로 다른 단어를 보면서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무엇에 대해서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물론 실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혼이라는 의미로 사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영혼이라는 단어를 생각을 하면서 실체로 보지 말고 의미로 본다면 쉽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입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왜 우리가 보고 있습니까? 그것을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한시라도 잊어버리는 사람은 자기 구원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성경을 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감성놀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모든 것을 다 안다 해도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번역입니다
영혼 구원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이라면 같은 단어에서 어떻게 선택을 해서 번역을 하겠습니까? 지금 대표적인 4가지 번역본이 있습니다.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오직 구원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성경을 여러분이 번역을 하고 있다면 어느 단어를 선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한글개역성경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한글개역성경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시대 인터넷을 보면 한글개역성경을 폄하하고 있는 그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사람의 이성적 지식으로 아주 조금 알고 있는 히브리어를 안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사전을 찾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만 해도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을 보고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구원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자기는 엎어져도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들이 구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가 무엇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시편6장 전체를 문법적으로 보아도 그가 영혼 구원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봅니까?
육체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렇게 보고 잇지를 않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알고 있다면 그들의 생각에 기억이 되어 있다면 시편의 말씀은 한글개역성경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6편입니다
정말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무엇을 위해서 기록했습니까? 자기 육체의 일을 위해서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입니까?
그것을 위해서 다윗이 지금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종교인에 불과하고 그저 성경을 세상의 책으로 보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난 후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풀었으면 뭐 합니까? 그래서 그것을 이 세상에 남겨 놓고 죽었으면 뭐합니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유익을 주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아니 우리가 성경을 번역해 놓은 것만 보아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하련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 하는가?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 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킹제임스번역을 보겠습니다.
“내 혼아 어찌하여 낙담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안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네 얼굴을 강건케 하시는 분이요. 내 하나님이신 그분을 내가 여전히 찬양 하리라.”
내 영혼아
같은 말씀이 3번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시편42편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시편43편5절을 끝으로 해서 3번이 반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후렴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고라 자손이 찬양을 하는 자손이라는 것은 알고 있고 그 자손이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편이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낙망
희망을 잃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라 자손의 시편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을 잃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보아야 합니다.
성전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라 자손의 시편은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구원을 받아 하늘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육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분명히 고라 자손의 시편은 육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육적으로 보기에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구원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다는 의미로 고라 자손은 시편을 기록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1:19절을 보면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히브리서2:18절을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나를 도우십니다.
무엇에 대해서 도우시는 하나님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무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다고 하니까 모든 것에 있어서 아무 것에나 다 도와 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만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 구원에 대해서만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알의 사상에 물들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도와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시편은 3번을 반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서 육체적으로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구원을 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면서 나를 도와주셔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찬송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시편42편부터 3번의 반복은 정말 구원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저 단순하게 그들의 육의 일로만 생각을 하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구원에 대해서 우리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는 살아가는 우리에게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육체적입니다
그 상황으로 볼 때는 내 영혼이 낙망하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의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 있으면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자기 영혼을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찬송을 합니까? 그저 육적인 것을 도와주심으로 해서 찬송을 합니까? 물론 이 시대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히려 찬송할 수 있다고 고라 자손의 시편과 같은 고백이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그들이 육체적으로는 도무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삶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육체적으로는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그저 이 세상의 책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분명한 이유는 바로 이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1:9절을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번역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의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번역을 할 때는 거의 다 같게 번역을 한 것을 여러분이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강조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입니다
구원을 생각하면서 번역을 한다면 당연히 영혼 구원이라는 말씀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들을 우리가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쓰기 보다는 다른 단어를 선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혼이라는 단어입니다
앞에서 히브리어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영혼이라는 단어는 의미적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실체가 아니라 자기 생명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영혼이 있습니까?
그 실체가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실체는 없습니다. 다만 비유적으로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할 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바라는 마음의 비유적인 표현이지 마치 진짜 영혼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킹제임스번역입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지만 진짜 혼이 있는 것과 같이 일관성이 있게 번역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전서1장9절의 말씀은 믿음의 결국은 구원이라는 것으로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구원이라는 그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그 뜻을 알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단어만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이라고 해서 그것의 분명한 실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 영혼이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번역의 오해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번역이 아무리 잘되어 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나라 말을 쓰고 보고 있지만 그들 역시 이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다보니까 결국에는 육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계속해서 제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영혼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고 그런 그들이 이 영혼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하면서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라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육체 속에 깃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어떻게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프쉬케 (ψυχή)
헬라어입니다 역시 비슷합니다. 영혼, 목숨, 생명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이 선택을 해서 번역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마찬가지로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이 영혼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영의 생명을 바라는 마음에서 표현이 되고 있는 히브리어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헬라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이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 해서 구원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을 하려고 하는 성경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영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을 우리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이 실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세의 일이기 때문에 이 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단지 생명이라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영에 대해서는 이미 그리스도편지에서 많은 말씀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혼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자 하는 표현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주신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