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06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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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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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OhmZyZHQrc ( 홍승국 이사야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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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아지고 작아지면 어느새 찾아오실 당신...>
언젠가 형제들과 한 식당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메뉴를 들고 온 여종업원이 얼마나 친절한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서서 주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메뉴판을 건넵니다.
온몸에 친절이 철철 넘쳤습니다.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문을 받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앞에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여종업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교회의 모습도 저렇게 바뀌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겸손한 모습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살길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자세가 아니라 낮은 자세로, 뻣뻣한 태도가 아니라 상냥한 태도로, 1대 다수가 아니라 1대 1로 접근하는 그런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환자는 제 고객이기도 하지만 제 스승입니다. 병원은 환자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혹은 숨질 때까지 책임져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연구는 의사의 의무이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 세상 하나뿐인 생명을 맡겨주는 환자들과 하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인 베드로 1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겸손의 덕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드로 1서 5장 5절~6절)
베드로 사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살던 시절, 자신에게 있어 늘 부족했던 겸손의 덕이 늘 가슴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수제자 배반 사건 이후, 철저하게도 무너져 내린 이후,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피눈물을 흘린 이후, 그는 비로소 참된 겸손의 덕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그토록 처절한 체험, 절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외치시니, 그 가르침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당신이 그리우면
촛불을 켭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어느새 찾아오실 당신...
(하삼두 스테파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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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강연 100도씨에 아이돌 가수에서 유명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 이야기가 나옵니다. 10여 년 전 아이돌 그룹 ‘맨사‘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돌이라는 화려함 속에 가려진 실제 그의 생활은 초라하고 궁핍했습니다. 소속사의 횡포로 수입은 거의 없었고 팬들이 선물로 주는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연예계 이면에 환멸을 느끼고 그룹을 탈퇴하여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을 했고 마침 군대 내에서 토익 시험 700점이 넘으면 외박을 보내준다는 말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 토익 시험 점수는 395점이었지만 한 시간 늦게 자고 한 시간 일찍 일어나며 시간을 쪼개 공부에 매진한 결과 차츰 점수가 올랐고 제대를 앞두고 925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의 놀림감이었지만 아이돌 연습생 때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던 것입니다.
서른이 되어 종로 영어 학원 강사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고 연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40명이 들어오는 강의실에 한 명밖에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끊임없는 질문공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엔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것에다가 가끔 노래도 불러주고 팝송도 불러주고 자신이 아이돌 그룹이었을 때의 영상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명이 다섯 명이 되었고 다섯 명이 사십 명이 되었으며 지금은 한 번에 삼백 명을 앞에 앉혀놓고 강의를 하는 유명강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도 영어를 전공 하지도 않았지만 현재 유명 어학원 인기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는 아이돌 때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무대 위에서 대중들 앞에서 노래고 춤추던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을 관객으로 생각하고 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 학생들이 만족한 표정을 지을 때 느끼는 감정은 노래를 하고 관객이 박수를 쳐 줄 때의 희열과 감동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절대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 같은 분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거지?’라는 질문도 제 스스로 던져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분은 베드로를 쫓아다니며 그를 돕고 또 그가 들은 것을 적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복음이라 전해지는 것은 성경으로 채택이 안 되고 그의 말을 듣고 적은 마르코복음은 성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글 솜씨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베드로복음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지만 매우 간결하여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러나 글 솜씨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하는 말도 잘 받아 적어서 그 뜻을 손상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베드로를 알기 이전에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갖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당신을 증거하는 사도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말씀은 그가 어부생활하며 배운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도 경영학을 좀 공부했지만 사제생활을 하면서도 그 때 배웠던 것들을 많이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경영학도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고, 본당사제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도밖으로 행진하라’라는 책으로 유명한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1958~)씨는 본래 여행사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40세에 모든 것을 접고 오지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게 한 것은 먼저 그녀가 근무했던 여행사에서의 경험들이었습니다.
지금 힘들고 실패하며 어려움을 겪고 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 안에서 무한한 잠재능력이 됩니다. 하느님은 그것들을 결코 썩혀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면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내가 가진 경험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읍시다. 그리고 그것을 끈기 있기 발전시켜 나가고 복음전파에 사용한다면 주님의 뜻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과 만난 모든 사람들,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유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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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게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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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5-18)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고,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계속 실행해야 할 명령입니다. ‘온 세상’은 ‘모든 곳’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곳은 없습니다.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아직도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곳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런 지역에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동식물에게도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은 아니고, ‘복음화 사업’은, 즉 ‘하느님 나라 건설’은 ‘모든 생명체’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교회가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들과 모든 동식물들, 모든 생명체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이 원상 복구된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모든 피조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로마 8,22) 자연을 파괴하는 것과 다른 종을 멸종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산 사람은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약속’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심판과 단죄를 받는 일이 없도록 믿고 회개하라는 경고, 또는 호소.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요한 3,17)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구원받기를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해서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라는 말씀은, 누구나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도움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고, 독에 중독되지 않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 등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일들인데, 가끔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기적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을 믿을 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 원래 계시던 곳으로 되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사도들이 직접 목격했고, 하느님 오른쪽에 계신다는 것은 스테파노 순교자가 보고 증언하긴 했지만(사도 7,56), ‘승천’과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심’은 전적으로 ‘신앙의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과학적으로(상식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라는 말은,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곳곳에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함께 계심’으로 존재 방식이 변화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아직도 여전히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함께 일하시면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이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기적’은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보증해 주는 보조 수단입니다. (필수 요소가 아니라 보조 수단이라는 것은,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꼭 기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확증해 주셨다.’라는 말도 우리 입장에서는 ‘확증해 주신다.’라고 현재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낯선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그 일 못지않게, 신앙인들이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복음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확산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지역 공동체부터 복음화를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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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말의 원형은 서울, 평양, 연변 중에 어디에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을까요?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고, 외국어와 외래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말의 원형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평양은 외국어와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하면서 우리말의 원형을 유지하려하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적인 의미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말의 원형이 잘 보존된 것은 연변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발전의 속도가 느리고, 변화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으로 복음은 슬픔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슬픔은 다시 복음이 되었고,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하느님 나라는 계속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당시 상황에 맞도록 기록한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그 중에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4복음서의 저자 중에 한명인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사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법정에 세웠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금도, 은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의 은사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이야기 했듯이 21세기의 복음은 환경과 생태계를 지키고 보존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던지려고 했던 남성들로부터 부정한 여인을 보호하고 용서하셨듯이 21세기의 복음은 성, 직업, 신분, 이념, 세대, 지역의 갈등을 해소하는 평등한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셨듯이 21세기의 복음은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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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택면 예로니모 신부님]
키프로스 태생인 마르코 복음 사가는 바르나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복음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선포할 것입니다.
흔히 마르코 복음서는 광야에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으로 상징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의 적대자인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라는 말씀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맹수의 울부짖음은 안전하게 우리 안에 쉬고 있는 양떼를 놀라게 하고 그 서슬에 놀란 양떼들이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오히려 맹수의 먹이가 되고 말겠지요.
세상의 요란한 소음이 교회 안에 안전하게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놀라게 하여 교회라는 울타리를 뛰쳐나가면 결국은 죽음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의 내용은 이방인으로서 갓 신자가되신 교우들에게 앞으로 있을 박해와 그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어떤 경우에도 악의 위협에 굴복하거나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겸손하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나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대하라고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윽박지르거나 박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으르렁거리는 소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꼬드기고 미혹하는 유혹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하여 고귀하고 고귀한 인간의 영혼을 죽음의 세상에 던져 버릴까 골몰하는 악마는 하느님께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다문화 시대, 다 종교 시대에 특별히 그 유혹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정한 종교나 신앙체계에만 구원이 있지 않다는 사고들 입니다.
상대적이고 다원주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신앙 체계를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을 마치 비인간적이고 보수적이다 못해 수구 꼴통이란 인상을 은연중 퍼뜨리고 , 반면에 신앙은 자유라는 철칙 아래 휴머니즘을 최고의 가치로 주창하면서 여러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마치 그 속에서 정수만 취하여 신앙의 모든 것을 깨달은 도사 같은 언행을 하면서 종교 상대주의, 종교 다원주의를 퍼트리는 것이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종교를 세속화하여 신앙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 변하여 종교가 하나의 세속의 기관으로 변질됩니다. 믿음의 단체를 하나의 자선단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유가 있다면 진리를 향한 자유가 있으며 정의를 이야기 하고 진리를 실천할 자유가 있을 따름입니다. 허위를 유포하고 더욱이 거짓을 선으로 위장하고 거짓을 행할 자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모든 허위와 거짓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죽음에 붙이셔서 그 죽음에서 승리하신 구세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믿음의 표지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질곡이 해방되는 참다운 생명의 힘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사자후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파견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말씀을 계속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세상 끝 날까지 전해 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 어떻게 함께 하고 계시고 교회와 더불어 일하고 계신지를 분명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 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하는 분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자유가 있고 진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축복이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간곡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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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지황 바오로 신부님]
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에는 저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으나 (로마 1, 1; 1코린 1, 1-2; 2코린 1, 1 등) 네 복음서는 익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의 저자가 원래부터 누구였는지 전혀 몰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익명으로 복음서를 엮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복음서의 저자를 밝혀내야만 했습니다. 여러 복음서를 가운데 진위를 가려내어 가짜 복음서들을 배격하고 진짜 복음서들을 옹호해야만 하였고, 또한 진짜 복음서들도 서로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가 사도 베드로의 증언과 가르침을 기반으로 해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한 교부들이 많았습니다. 이레네오와 오리제네스는 베드로 자신이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1베드 5, 13)와 동일 인물로 여겼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언급된 '마르코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12, 12. 25; 15, 37)이 바로 마르코라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동일인물로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도 사울은 이스라엘식 이름이고, 바오로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마르코는 마리아라고 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살았습니다. 마르코의 집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집회를 가졌던 곳이었고,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베드로가 찾아간 곳이기도 합니다(사도 12, 6-17).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마르코는 일찍부터 사도들과 친밀한 접촉을 가졌던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45-49)을 할 때,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를 거쳐 키프로스 섬까지 동행하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2, 24 - 13, 12)
여담입니다만, 예비신자들이 세례식을 앞두고 본인의 세례명을 정할 때 막연히 생일을 기준으로 자신의 세례명을 정하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리고는 부르기 쉬운 이름이나 이쁜 이름을 정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르코 복음사가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예언서들의 저자인 예언자들과 많은 인물들 신약의 4복음서를 집필한 복음사가들의 이름은 뒤로하고 말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인 16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사명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복음선포. 이는 비단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것도 사실입니다. ‘신부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에 대해 잘 몰라 선교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2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디모 4,2)
1독서 1베로로의 말씀을 맘속에 간직하고 살았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 5, 5ㄴ-6)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내가 배우고 들은 하느님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표정과 웃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칭찬,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과 신의를 보여준다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복음서를 타인에게 전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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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님]
<예수님의 정체>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실상, 마르코 복음을 저술한 분이 누구인지 우리로서는 현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히브리어와 아랍어 그리고 유다인들의 풍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의 풍습까지 아는 것으로 미루어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그는 폭넓고 개방적인 사람이라 민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온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믿어 다함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다인들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합니다.(마르 12,9) 그는 이방인들을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7,28; 15,39)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자들조차도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한 모습을 본 사람들을 사도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6,14)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십니까? 막상 고백하려고 하면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대로 대답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이 순간이나마 다시금 그분이 누구신지, 특별히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한 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께서도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기 위해 복음을 쓰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할 당시인 A.D. 70년경은 초월적인 예수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그러기에 앞서 믿는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주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부활하신 다음의 모습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이 세상에서 무슨 말씀과 어떤 일을 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우리가 평상시 묵상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사건과 말씀을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그분에게 나아가는데 매우 좋은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에 당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상당히 꺼리신 것 같습니다. 어쩌다 누군가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때에는 곧 함구령을 내리십니다.(1,24.34; 3,12; 5,43; 7,36; 8,26.30; 9,9)
이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경우를 경계하셨던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을 따로 불러 교육시키셨던 장면 (4,10-25; 5,37-43; 6,45-52; 7-17-23 등)이 나오는 데,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해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단견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너무도 자주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는 마치 정리된 듯이, 잘 알고 있는 듯이 뒤로 내팽개쳐 버립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부활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선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상입니다.
“어느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을 구할 것입니다.”(8,34-35)
이는 당시에 자행되고 있던 박해의 와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도록 격려하고자 하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신자들에게도 자기희생을 통한 나눔의 영성을 권고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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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가 바로 마르코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서 선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 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님의 유언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명이 아닌 다른 것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말씀선포’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사명이요 의무임을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에,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참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지요?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고 있는지요? 하여, 함께 일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하고 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복음만’으로, ‘말씀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정녕, 복음을 믿고 말씀을 따르는 일,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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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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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이 되려고 떠나는 길>
마르코 16,15-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기쁨이 되려고 떠나는 길>
기쁨이신 분께서
나의 기쁨이 되시고자
나에게 오셨듯이
나의 기쁨이 되신 분께서
그대의 기쁨이 되기 위해
그대에게 가라하시니
기쁨이신 분과 함께
그대의 기쁨이 되고자
그대에게 가겠습니다
그대에게 감과
그대에게 기쁨 됨은
오롯이 하나이어야 하니
기쁨이신 분처럼
기쁨이 되기 위해
그대에게 가고
기쁨이신 분처럼
그대에게 가서
기쁨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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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나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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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에 마르코 복음의 특징에 관하여 묵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성자께서 ‘하느님의 말씀’이시라고 선포합니다. 반면 마르코 복음은 그분의 신원이 서서히 밝혀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복음서의 후반부 1/3가량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관한 내용으로 채우기 때문에, 그 첫 번째 특징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 초반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이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실수록, 그분의 메시아 신분이 점차 공적으로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고백(마르 8,29 참조), 유다교 최고 의회 대사제 앞에서 응답(14,62 참조), 백인대장의 고백(15,39 참조)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문에 마르코 복음의 두 번째 특징은 ‘메시아 비밀’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세 번째 특징은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시고, 구원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특별한 교육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메시아 비밀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메시아 비밀 구도(예수님의 함구령과 제자들의 몰이해)에 따르면, 파스카 신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일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때 파스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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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사명!>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축일을 맞이한 마르코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고, 네 복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AD70년경) 마르코 복음을 기술한 분입니다.
오늘 복음(마르16,15-20)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선포'는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와 지금 여기에 있는 또 하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선포하신 '절대사명'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나는) 복음선포의 절대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복음선포는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요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1베드5,5-14)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1베드5,5-7)
'겸손의 덕'을 쌓고,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고합니다.
'겸손의 덕'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완성시키는
'최고의 덕'(으뜸 덕)입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서 한없이 나 자신을 낮추려고 애쓰면서, 겸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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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께서 잘 아는 신자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에 같이 사목활동을 했던 수녀님께서 병으로 다리 절단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활동에 제약을 느낄 수밖에 없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수녀님께서 의기소침해 있을까 싶어 곧바로 병문안을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가는 순간, 신부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수녀님의 표정이 너무 밝은 것입니다. 같이 병실을 쓰는 모든 사람이 수녀님의 영향을 받아서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수녀님을 위해 신자들과 함께 기도한 뒤에, 수녀님께 물었습니다.
“수녀님, 힘들지 않으세요? 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죠?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기쁜 것 같은데요?”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제 다리는 이미 하늘 나라로 갔어요. 나중에 제가 죽으면 조금 가볍게 갈 수 있겠죠? 그래서 아쉽지 않아요.”
다리 절단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으면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이 문제를 하늘 나라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삶에 만족할 수 있었고, 그 만족하는 모습에 같이 있는 사람들도 감명받아서 모두 기쁜 병실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전교가 있을까요? 자기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명을 주시며 파견하십니다. 이미 제자들을 파견했던 적이 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이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처럼, 부활 이후에 이루어질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모든 민족으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처음의 파견에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세례받는 사람은 구원받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을 향한 표징을 뒤따를 것을 약속하시지요.
이 모든 말씀을 하신 뒤에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복음 선포가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시해도 되는 말이 아닌, 반드시 지켜야 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단순히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 될까요?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수녀님처럼 자기 삶으로 그 모범을 보여줘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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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사명>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해마다 주님 부활시기에 맞이하는 축일입니다. 베드로의 제자이면서 한 때는 바오로의 제자이기도 했던 복음사가 마르코 였기에 누구보다 두분으로부터 보고 배운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최초의 복음서로 알려진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이자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여겨지는 마르코는 다른 복음사가들처럼 사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예수님 체포에 관해 적을 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나 하는 설도 있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입니다.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14,51)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58년-62년 사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설립한 후 초대 주교를 역임하였으며,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최초의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합니다. 마르코는 68년경 복음 전파를 막으려는 이교도들에게 끈에 의해 목이 묶여 도시 전체를 끌려다니며 돌팔매질을 당한후 고문 끝에 순교했다 전해 집니다.
이어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베네치아의 깃발은 마르코를 상징하는 앞발로 성서를 잡은 ‘날개 달린 사자’가 그려져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거두 절미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복음선포의 사명으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외없이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복음선포의 사명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의 행적을 보면 순교하기까지 주님의 명령인 복음선포 사명에 최선을 다했음을 봅니다. 복음선포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선포의 자리임을 봅니다. 그러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증언하는, 날마다 새롭게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가는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가 우리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을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영원한 진리 말씀입니다. 하느님곁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중재자’이자, ‘영원한 현재’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새삼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자 스승이시며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 일이 복음선포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읽던중 서울대교구 성유 축성 미사시 정순택 대주교님의 강론 머릿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사제들의 첫째 임무”라는 말마디였습니다. 어찌 사제들뿐이겠는지요. 수도자들은 물론이요 믿는 모든 이들의 첫째 임무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며 날로 우정을 깊이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함께 안으로는 제자로, 밖으로는 사도로, 관상과 활동을 동시적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베드로 1서 서간에서 베드로 사도가 복음선포의 사명 수행에 앞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참 좋은 구체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바로 겸손과 깨어 있음과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가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 대항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말씀이 은혜로워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각자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이렇게 겸손히 깨어 믿음으로 은총안에 굳건히 서서 살아갈 때 이런 삶자체가 참 좋은 복음선포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신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안으로는 당신의 ‘관상의 제자’로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서, 날마다 새롭게 아름다운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방금 부른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시편89,1ㄴ) 시편 화답송 후렴을 들으면서, 자주 흥겹게 노래 했던 시인이자 신비가였던 고故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1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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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xka4CMF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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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길다.
기억은 기록을
필요로한다.
생생한
예수님의
생애를
마르코
복음을 통해
다시 만난다.
예수님의
생애가
참된
복음이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태어난
성 마르코의
삶이다.
믿는 만큼
열리는
뜨거운
복음의
이야기이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를 다시
배우게 된다.
처음과
중간
끝, 모두
예수님을
향해 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슴을 울리는
복음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옛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간절한
이야기들을
만나는 것이다.
사람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르코
복음이다.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읽고
우리가
묵상해야 할
최초의 복음이
삶의 복음이다.
복음은 삶을
향해 있고
삶은 복음을
향해 열린다.
새로운 삶
새사람이
되는 기쁨을
만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오늘이다.
기록은 길고
기도는 깊고
기쁨은 영원하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 지를
묻게된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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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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