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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Protagoras) / 플라톤(Platon, 427년∼347년)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 30대 중반의 시기
-히포크라테스 : 그리스에서는 흔한 이름에 속해서 달리 알려진 바 없다.
-프로타고라스 : 유명한 소피스트로 소크라테스보다 20살 정도 연상으로 추정하고, 페리클레스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과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등의 말로 유명하다.
-칼리아스 :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한 히포니코스의 아들로, 소피스트들의 후원과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한다. 많은 희극 작가들의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알키비아데스 : 뛰어난 외모와 언변으로 아테네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아테네의 장군으로 복역하다가 헤르메스 상 훼손 사건과 엘레우시스교와 관련한 신성모독 사건에 연루되자,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스파르타 왕의 부인을 유혹한 일이 발각되자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한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장군을 하기도 하지만, BC404년에 암살당한다.
-크리티아스 : 플라톤의 외가 쪽 친척이며, 아테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지고나서 등장한 30인 과두정의 핵심 인물이다. BC403년 민주정 복권 세력과의 전투 중에 사망한다.
-프로디코스 :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거나 몇 살 어린 것으로 추정되나 소크라테스는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피아스 : 소피스트들이 다양한 전공이 있었다는 증거로 거론되는 인물로 산수, 기하, 천문학, 음악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자연적인 것(physis)와 관습적인 것(nomos)의 대비가 소피스트들의 중요한 주제였는데, 그는 자연적인 것을 지지하는 인물로 분류된다.
1. 소크라테스와 동료의 대화와 회상
(1)‘소피스트’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찾아가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먼저 ‘그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묻는다. 그는 ‘소피스트’이며, ‘지혜로운 것들을 아는 자’, ‘말하는 데 능통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영혼을 양육하는 배움’이라는 상품들을 파는 무역상이나 행상의 일종과 같기 때문에, 그들이 팔려고 내놓은 것들을 찬미하면서 속이려 할 수 있기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2) 프로타고라스가 묵고 있는 칼리아스 집 방문
2. 프로타고라스와의 대화와 연설
(1) 프로타고라스 자신에 대한 규정과 소크라테스의 반론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은 소피스트이며, 자신과 함께 지내면 나날이 더 나은 사람으로 진전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집안일이나 나랏일-즉, 시민적 기술-에 관련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잘 경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배움의 진전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시민적 기술이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대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민회에서 그 분야의 전문기술자의 조언을 들으면 되지만, 나라 경영에 관련해서 숙고할 일이 있으면, 출신, 가문, 분야 등 배경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조언을 한다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반증이다. 또한 사적으로도 페리클레스와 같이 자기 자신은 뛰어나지만 자기 가족이든 다른 사람이든 어느 누구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사람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2) 프로타고라스의 해명 연설
-옛날이야기(모든 인간이 시민적 덕을 가지고 있는 이유): 인간과 동․식물을 창조할 때 에피메테우스는 각각에 맞는 능력과 기능을 주어 만들었으나, 인간들에게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사용해버린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인간들을 보고,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에게서 기술적 지혜와 불을 훔쳐서 그들에게 주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말과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발명하는 등 생존수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동물에 비해 부족한 능력과 기능과 아직 시민적 기술을 갖지 못한 인간들은 나라를 만들지도 못하고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여 있었다. 이런 염려에 제우스는 인간종족이 나라의 질서와 우정의 결속으로 함께 모일 수 있도록 모든 인간 각자에게 염치(분별)와 정의를 주었다. 그러므로 시민적 덕은 정의와 분별을 거쳐 나온 것인데, 이 경우 모든 사람들이 다 용인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있을 수 없게 된다.
-덕이 교육될 수 있다는 이유: 못생겼다거나 키가 작다 등과 같이 천성적으로나 운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쁜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런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화내거나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측은하게 여긴다. 하지만 부정의, 불경 등과 같이 시민적 덕에 반대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화를 내거나 징계한다. 이성적으로 징계하는 것은 과거의 부정의한 행동 때문에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정의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 즉 예방을 위해서 징계를 한다. 다시 말해 이런 행동은 덕이 교육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들이 교사한테 달려 있는 다른 분야는 자기 아들들에게 가르쳐 지혜롭게 만들면서 그 자신의 뛰어난 분야인 덕은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 만약 아울로스 연주 나라에 꼭 필요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아울로스 연주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 경우 변변찮은 연주자의 아들이 뛰어난 연주자의 아들보다 반드시 더 뛰어난 연주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명성을 날리고, 없으면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문외한들에 비하면, 충분히 괜찮은 연주자일 것이다. 이렇듯 상당한 덕을 갖춘 시민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뛰어난 덕을 가졌어도 상대적으로 탁월함이 쉽게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아직 그 아들들은 아직 젊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3) 소크라테스의 남은 의문
-덕은 하나의 어떤 것이고, 정의와 분별, 경건은 덕의 부분인가?: 얼굴에 눈, 코, 입 등의 부분이 있는 것처럼, 덕은 하나이고 정의와 분별, 경건은 덕의 부분들이다는 프로타고라스의 대답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누군가 하나를 얻기만 하면 모든 것을 갖는 것이 필연적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사람들이 다른 부분을 갖는 경우도 있는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의 한부분은 있으면서 다른 부분은 없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면서, 눈과 귀가 같지 않고 그 기능도 동일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한다.
3. 덕의 단일성 논증-소크라테스
(1) 경건과 정의의 유사성 논증
-소크라테스: 정의는 정의로운 종류의 것이다. 경건은 경건한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덕은 하나이고 각기 다른 종류와 기능을 가진 부분들이 있다는 말에 의하면, 경건은 정의로운 종류의 것이 아니라 정의롭지 않은 종류의 것이고, 정의도 경건한 종류의 것도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경건은 부정의한 것이고, 정의는 불경한 것이 된다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프로타고라스의 반론: 무엇이든 어떤 것과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닮아 있고, 서로 가장 반대되어 보이는 하양과 검정도 닮은 구석이 있고, 딱딱함과 부드러움도 그렇다. 이런 방식으로는 모든 것이 서로 비슷하다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조금 있다고 해서 ‘비슷한 것들’일라고 부르고, 비슷하지 않은 점이 아주 조금 있다고 해서 ‘비슷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2) 지혜와 분별의 동일성 논증
-소크라테스: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 고음과 저음은 반대되는 것이다. 즉, 반대되는 것들 각각에 하나의 반대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지혜는 어리석음과 반대되는 것이며, 또한 어리석음과 분별은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의 반대되는 것은 지혜와 분별 두 가지가 되어 모순이 발생한다. 아니면 지혜와 분별이 하나이다.
(3) 정의와 분별의 동일성 논증
-소크라테스: 부정의하게 처신하면서, 부정의하게 처신하는 바로 그 점에서 분별 있게 처신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만약 있다고 한다면,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분별 있게 처신한다는 것은 생각을 잘한다는 것이고, 생각을 잘 한다는 것은 부정의하게 처신하는 바로 그 점에서, 잘 숙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정의하게 처신하면서 분별 있게-즉 잘 숙고한다는 것은잘못 행동하는 경우이지, 잘 행동하는 경우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좋음의 다양성과 상대성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이득이 되지 않아도 좋은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예컨대, 먹을 것이나 마실 것, 약과 그 밖의 수많은 것들이 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어떤 것은 이득이 된다. 또 어떤 것들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나, 짐승들에게는 이득이 되고, 어떤 것은 특정 짐승, 식물에게만 이득이 되거나 해가 되는 것도 있다. 따라서 좋음이란 다채롭고 온갖 종류로 다양한 것이어서 그 대상과 쓰임에 따라 이득이 되거나 해가 될 수 있다.
(1) 프로타고라스 주장
- ‘진실로 좋은 사람이 되기란 어려우니’라고 하면서, 뒤에 가서는 ‘탁월하기가 어렵다’라는 피타코스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기모순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고, 그런 시는 잘된 시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소크라테스의 해석
-예비적 해석: ‘되기’와 ‘있기’는 다른 것이기에, 피타코스와 시모니데스는 자기모순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 되기는 어렵지만, 그것에 도달하고 나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쉽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타고라스도 시모니데스가 ‘어렵다’라는 말을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쉽지 않고 많은 수고를 들여야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궤변적 재해석: 스파르타인들은 지혜롭지만 우매한 척한다. 그 지혜는 짧은 경구를 능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그리스 7현인들이 스파르타의 지혜를 선망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시모니데스는 피타코스의 경구를 논파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경구를 사용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는 시모니데스의 시 거의 전부를 인용하면서, 터무니없는 해석을 한다.
5. 지혜와 용기의 동일성 논증
(1)지난 논의 상기와 재검토
-프로타고라스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자신을 소피스트라 붙이기도 했고, 교양과 덕의 교사임을 공언하면서 그에 대한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혜와 분별과 용기와 경건은 하나의 것에 다섯 개의 이름인가, 아니면 각각의 고유한 본성과 기능이 있는가의 질문에 덕은 하나이지만 각각은 덕의 부분들이며 각각 고유한 본성과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덕의 부분들 중 넷은 서로 유사하지만, ‘용기’만은 그것들과 아주 많이 다르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용기 있는 사람들이 대담하고, 덕은 훌륭한 것이다. 그리고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킨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가장 대담한 것이고, 가장 대담하기에 가장 용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가 용기이다’가 될 것이다.
-프로타고라스: 용기 있는 사람이 대담하지만, 대담한 사람이 용기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용기와 대담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킨다는 것으로부터 용기가 대담함을 증진시킨다는 것까지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담함은 인간에게 기술로부터도 생기고, 화나 광기로부터도 나오지만, 용기는 타고난 영혼의 상태와 좋은 양육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2) 가상의 대중들을 상대로 한 논의
-즐거움과 좋음은 다르다: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좋은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즐거운 것들 중에도 좋지 않은 것이 있고, 고통스러운 것들 중에서도 나쁘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 외에도 어느 쪽도 아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도 있다.
-앎은 강하고 지배적인 것이다: 대중들은 앎이 강력하거나 주도하는 것이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경우에도 때로는 화, 즐거움, 괴로움, 사랑, 두려움 등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앎이 훌륭한 것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성격의 것이어서 현명함이 인간을 구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가상의 대중들: 먹을 것이나 마실 것, 혹은 성적 쾌락이 즐거워 종종 그것에 굴복하고, 그래서 해로운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신체단련, 군사훈련, 의사의 치료 등 그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가장 좋은 것이나 고통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져서 혹은 굴복당해서 라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즐거움/괴로움에 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소크라테스: 그 의미는 당장의 즐거움/괴로움 그 자체를 산출한다는 점에서 좋은/나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생겨나는 즐거움/괴로움, 그 밖의 것들 때문에 좋은/나쁜 것이다. 즉, 그것들이 명백하게 나쁜/좋은 것인 이유는 그것이 고통/즐거움을 결과로 가져오고, 다른 즐거움을 빼앗아가기/괴로움의 해방과 회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대중들은 즐거움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좇고, 괴로움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피한다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즐거움 자체도 나쁘다고 말할 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을 빼앗아가거나 그것 안에 있는 즐거움보다 더 큰 괴로움을 초래하는 그런 때이고, 반대로 괴로움 자체를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때는 그 안에 있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을 해방시켜주거나 그 괴로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초래하는 그런 때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된다. 즉, 어떤 행위(선택)가 나쁜 줄 알면서도, 또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도, 좋은 것들에 져서 나쁜 것을 한다는 불합리한 이야기가 된다.
-소크라테스: ‘진다’는 말은 한쪽이 더 크고 다른 한쪽은 더 작다거나 한쪽은 더 많고 다른 한쪽은 더 적다는 점에서 좋은 것이 나쁜 것만 한 가치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의 차이는 ‘측정기술’에 달려있고, 기술은 이라는 것은 ‘앎’이라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선택)를 할 때 관련된 모든 종류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아서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괴로움을 최소화하면 된다. 그런데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측정기술이 없는 경우, 가까이 있는 것은 더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더 작게 보이는 일종의 인식의 착시 현상-앎의 결여, 무지 때문에 잘못 행동하게 된 것이다.
-결론: 즐거운 것은 좋은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나쁜 것이다. 훌륭한 것은 좋은 것이고 이득이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지는 것은 무지 때문이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은 지혜 때문이다. 무지란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거짓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지혜와 용기의 동일성 논증
-소크라테스: 두려움/무서움은 나쁜 것의 예견이다. 무언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기꺼이 그것을 향해 가거나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용기는 나머지 덕들과 아주 많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용기 있는 사람은 무서운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대한 앎이 있기에 대담하고 과감하다. 비겁한 사람은 전쟁에 가는 것이 훌륭하고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그리로 가지 않기를 원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무서운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대한 무지가 비겁한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맞지 않게 된다.
-뒤죽박죽이 된 상황: 처음에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과 덕은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서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소크라테스는 정의든 분별이든 용기든, 모든 것이 다 앎이라고 주장하면서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되었고, 프로타고라스는 덕이 앎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