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앞섭니까, 법이 앞섭니까? 법이 왜 존재합니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정의를 실현함에는 정황 참작이라는 것이 없습니까? 그런데 판사에게는 정의 실현보다는 법의 집행이 앞서는 듯합니다. ‘준법’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법이 무력해집니다. 그리고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질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무법천지가 되겠지요. 판사는 그 최전방에서 법을 지키고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법대로,’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일반적 정서로 생각하여 때로는 잔인하다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법 집행에도 판사 나름의 정서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서부개척시대 가축 도둑은 사형입니다. 그 도적들 가운데 십대 청소년들이 가담했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동자 어른 하나와 소년 둘입니다. 그들을 잡아서 이송합니다. 연방보안관 혼자서 3명의 죄수를 데리고 사흘 길을 이동합니다. 길고도 험난한 길입니다. 도중에 주모자가 기회를 얻어 보안관에게 달려듭니다. 만약 소년들까지 합세한다면 영락없이 보안관은 끝장납니다. 그런데 도망갈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보안관이 도적을 제압하고 별 탈 없이 이송은 계속됩니다. 초죽음이 되어 목적지에 당도하여 모두 감옥에 넣습니다. 판사는 보안관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과 칭찬을 합니다.
다른 것 이야기할 필요 없습니다. 정황이 아니라 사실만 필요하고 증인은 사실만 증언하면 됩니다. 그러나 보안관은 사흘 동안 죄수를 이송하면서 경험한 상황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앞뒤 사정을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사형은 너무 과하다 싶습니다.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고 정황 참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판사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몇 번 시도합니다. 그러나 판사는 그런 증인에게 벌금까지 선고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하지만 법정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증인으로 나온 보안관이 할 말도 못하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소년들도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교수대에서 처형됩니다. 창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던 보안관이 타는 속을 달래려고 혼자 바에서 술을 따라 마십니다. 도적이 된 소년들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 무리에 껴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잘못을 크게 후회하고 있음이 여실합니다. 함께 오면서 그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칠 기회도 그냥 포기합니다. 보안관이 혼자서 죄수를 이송하는데 이들이 소극적이라도 꽤나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정상이 참작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직 미성년자들입니다. 어떻게 교수대에 매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연방보안관이 된 ‘쿠퍼’는 전직 보안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알려진 유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름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려 소를 구입하여 자기 살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다 사고를 당합니다. 소도둑으로 오인되어(사실은 누명 쓰고) 강도들에게 교수형을 당합니다. 정식 재판도 없이 자기네끼리 사적으로 처형하는 겁니다. 죽을 위기에서 지나던 보안관에게 구출을 받습니다. 감옥으로 이송되어 갇혀 있는 동안 다행히 진범 중 몇 명이 잡혀 풀려나고 판사의 눈에 들어 연방보안관 직책을 받습니다. 개인적 복수를 다짐했다가 이제 정식 법의 힘을 등에 업고 강도들을 찾아 나섭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오로지 죽이려 했던 강도들에게 복수하는 것입니다. 잡아다 교수대에 매다는 것, 마음이 거기에만 집중됩니다.
마을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는 ‘레이첼’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죄수들이 이송되어 올 때마다 반드시 감옥에 와서 죄수들을 확인합니다. 판사도 알고 죄수가 당도할 때마다 미리 알려줍니다. 처음 쿠퍼도 그 마을에 잡혀 왔을 때 감옥에서 찾아온 여인을 보았습니다. 보안관이 되어 죄수들을 잡아오면 변함없이 감옥에 와서 확인합니다. 도대체 왜, 무엇을 하는 거지? 그러다 레이첼의 도움으로 또 한 번 죽을 위기에서 살아납니다. 소년들이 처형되는 날 혼자 바에서 술 마시는데 잡으려는 강도들에게 역습을 당합니다. 레이첼이 달려와 지혈을 하고 치료 받게 하고 정성을 다해 간호하여 살려냅니다. 그 후 두 사람이 가까워집니다.
아이 하나 낳고 의사인 남편과 단란하게 살았습니다. 소풍 나간 어느 날 두 남자의 습격을 받아 남편과 아이는 살해되고 본인은 겁탈을 당했습니다. 한 여인의 삶이 뒤집어졌습니다. 그 두 놈이 잡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 쿠퍼를 만났습니다. 그 생명을 지켜주며 가까워졌습니다. 상처가 나을 무렵 같이 소풍을 나갑니다. 자기 사정을 이야기해줍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상황이지요. 복수에 혈안이 되어 있고 삶 전체가 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과거에 매여 새로 다가올 행복을 포기할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원한 맺힌 그들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고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다 접어두고 내 인생을 새로 만들 것인가?
법과 정의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원한과 복수에 대한 일념이 과연 나의 삶을 주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해봅니다. 어쩌면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집행자’(Hang‘em High)를 보았습니다. 1968년 작이네요. 젊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건 주말되세요
예, 촉촉한 주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