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하느님의 어린양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어머니 한쪽 발이 이상하게 생긴 걸 발견하고 물었다. 내가 등에 업혀 다니던 때 어머니가 서울 전차에서 내리는데 내가 등에서 요란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뼈가 그렇게 된 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때 그 일을 사실만 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듣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죄송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물으니 알려주셨다. 내게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내게 새겨진 하느님 이미지는 내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는 차가운 선생님인 거 같다. 아무리 공부하고 묵상하고 눈물을 흘려도 그 이미지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하느님은 내 죄를 없애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고 오늘도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그렇게 하시는 줄 안다. 그래도 여전히 그분 앞에 서는 건 채점 답안지를 받는 거 같다.
내게 새겨진 하느님 이미지는 선생님이어도 내가 따라야 할 하느님은 나 때문에 불거진 한쪽 발을 갖고 평생 사신 어머니다. 복음은 지식과 말재주가 아니라 내 삶으로 제대로 전해진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여기서 온유한 사람은 성격이 온화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약해서 빼앗겨 가난해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느라,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처럼(루카 10,3) 살았던 이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빼앗기고 상처를 입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하늘나라를 차지했다.
어딜 가나 정글 같은 세상에서 호랑이처럼 돼야 한다고만 배웠지, 어린 양처럼 돼야 한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이 유일하다. 특히 복음을 전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인간의 폭력성은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너무 깊어서 보이지 않고, 너무 아파서 꺼내 보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또 상처받을까 봐 무서운 거다. 폭력으로 외부인의 접근을 경계한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래서 폭력은 두려움의 표현이다. 벌과 훈육은 물론 지식도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사랑이 유일한 치료제다. 내가 발견하고 묻기 전까지 아니 그러지 않았으면 끝까지 말씀하지 않았을 어머니의 사랑이다. 정글 같은 세상에는 바로 이런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은 지극히 죄송함과 지극히 감사함이다. 하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선생님 하느님 이미지를 지우는 것, 그리고 호랑이길을 버리고 어린 양을 따라가는 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예수님과 친하지 않으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친해지자고 마음먹으면 바로 내 가까이 다가오시고, 문을 열어드리자마자 바로 들어오신다.
예수님, 그 선생님 사진은 버릴 수는 없을 거 같으니 뒤집어 벽에 그냥 걸어두겠습니다. 대신 불거진 발과 십자고상을 마음에 품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는 제게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아드님을 끝까지 잘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