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속보, 연예오락] 2003년 01월 22일 (수) 09:12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을 빠져나와 시내쪽으로 조금 들어가다보면
오른쪽에 명성황후 생가가 있다. 생가 한쪽에 공원과 함께 조성된 이곳 기념관에는 파란의 역사를 살다간 명성황후의 일대기를 몇 점의
사료들과 함께 멀티미디어 장비를 이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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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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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안동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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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전시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이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그 칼의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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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입구에 도자기로 조형된 명성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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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안동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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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귀를 읽으면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을 보는 순간 눈썹이 파리하게 떨리는 건 기자만의 느낌일까? 김진명의 역사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과 드라마와 오페라로 재구성된 그때의 그 사건을 가슴 속에
그려보며 눈물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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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의 비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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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안동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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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황후의 머리에 정갈하게 꽃혀 있던 그녀의 비녀와 그녀를 시해했던 날선 칼만이 우리 눈 앞에 있는가, 그때의 역사 또한 그녀의 시신과
함께 처참하게 능욕당하고 난자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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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물로 재현한 명성황후의 국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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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안동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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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의하면, 문제의 이 칼은 그날의 새벽 48명의 일본 낭인중의 하나로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토우 카츠아키의 칼이라고 한다. 그 낭인은 그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평결을 받은
뒤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번민을 하다가 이
칼을 쿠시다(櫛田) 신사에 기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울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두 딸들을 무참히 깔아뭉개고 무죄평결을 받아 자기 나라로 유유히 돌아간 두 병사와, 아시아를 환란에 빠트린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총리가 참배하는 뉴스의 장면 장면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얘기하는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한 굴욕의 역사가 재연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