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늘은 회개를 위한 기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 즉 하느님은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를 벌하신다고 믿는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하여 상을 가지고 가겠다(묵시 22,12).” “그들(악인)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46).” 그러나 상선벌악은 현세에서가 아니라 후세에서, 실제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날에 실현된다. 예수님은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마태 13,30)고’ 하셨다. 악인도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와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욥은 하느님이 인정한 땅 위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다(욥 1,8). 그런 그도 자기 가족과 자신이 받는 까닭 모를 고통을 겪으며 태어난 날을 저주할 정도로(욥 3,1) 괴로워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래도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을 거라고 추궁하다시피 했지만 욥은 찾을 수 없었다. 우리도 역시 무죄하고 의로운 이가 왜 마치 벌을 받는 거처럼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욥이 답답한 우리 마음을 대변해 주는 거 같다. 그런 식으로 친구들과 길고 많은 대화를 나눈 뒤에야 드디어 하느님이 입을 여셨다. 한 마디로 천지창조의 원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네가 다 아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어 만드실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상징적인 질문(욥 38,4-7)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특히 정의에 대한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다. 사실 하느님은 순교자들을 모진 고문과 불의한 죽음에서 구하지 않으셨다. 또한 조선은 범법자들을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회유하려고 했음을 기억한다. 그 죄는 마음 안에 있고, 하늘나라도 그곳에 함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를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 죄를 없애주려고 그러셨다고 믿을 뿐이다. 좋은 일만 하시고 옳은 말만 하셨는데 말이다. 그 보상을 받은 적도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신 적도 없다. 게다가 그런 변을 겪을 줄 아시고도 그 길을 피해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역정을 내시며 슬퍼하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그렇다, 예수님이 하신 설교와 기적의 목적은 회개였다. 사람들이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자 화내고 슬퍼하셨다. 가장 의로운 욥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슬퍼했고, 예수님은 당신의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을 슬퍼하셨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는 것만 배웠지, 약해져서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배워 익히지 못했다. 욥은 끝에 가서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은 후에야 그걸 알게 된 거 같다. 예수님은 그걸 벌써 알고 이미 여기서 그렇게 사셨다. 그게 뭔지는 그렇게 살아봐야만 알 수 있다. 먹어봐야 그 맛을 알고, 직접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거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은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때이고, 깨어있는 하루하루가 회개를 위한 은혜로운 기회이다. 내가 행한 선하고 의로운 행위에 대해 여기서 보상을 받는다면 하느님에게 받을 상이 없다. 아무리 큰 죄도 뉘우치고 돌아오면 용서받아 하느님 기억에서 지워지고,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선행까지 하느님은 다 기억하시고 후한 상을 주신다(마태 6,2-4). 거기에 더해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선하신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란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완전한 분이시다(마태 5,45,48). 그 길에서 많은 수고와 상처받음은 필연적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고되다. 그러니 우리가 받을 상이 얼마나 크겠나.
예수님, 그가 하느님 법을 명백하게 어기는 게 아니라면 그와 말다툼하지 않고 제 정당성을 밝히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모욕과 욕을 받아 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야 하늘나라를 위해 약해지고, 이리 떼 속에서 양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 익힙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아프고 고단한 이 하늘나라 시민 생활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