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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 거울과 도마복음 제10장》
오늘 내용은 불교 쪽이나 기독교 쪽이나 아주 재미난 내용이 나왔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는 벽돌로 거울을 만든다는 얘기와 또 하나는 예수님이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다."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던지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불을요.
벽돌로 거울을 만든다는 비유는 불자라면 누구나 다 아실만한 유명한 내용인데요.
그러나 기독교 쪽 분들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같이 공유해 보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벽돌로 거울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현재 기독교 쪽에도 아주 그리고 또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불교 쪽 수행자들이 좌선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닫고 증득을 한다고 여기듯이 기독교 쪽도 무조건 기도만 한다고 해서 성령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누구나 천국 가게요?
비유를 하면 활을 쏠 때에도 과녁을 상대로 쏴야 하는데 무조건 활시위만 당긴다고 해서 그 화살이 과녁을 향해 저절로 가지 않듯이 이것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수행을 하거나 기도를 해도 그 방향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두 종교 다 그 방향이 잘못되어있다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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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불을 던졌다"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이 한 말씀이 예수님의 모든 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법을 전하기 위해서 아주 마음이 척박하고 메마른 중동 지역 사람들의 마음에 불길을 짚여주셨고 자신 또한 그 불길 속으로 내던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불(火) 그러면 지옥불을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옥불 그러면 괴로움과 고통, 좌절, 통심, 같은 안 좋은 쪽으로 많이 상징되고 있지요.
그러나 기독교 쪽에는 불 그러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답니다.
하나는 불교와 같이 지옥불에 해당하는 괴로움과 고통, 좌절, 통심, 같은 뜻도 있지만 반대로 불길처럼 일어선다는 뜻도 가지고 있답니다.
그 이유는 어느 나라나 환경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 등으로 인해 같은 현상을 놓고도 뜻을 달리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요.
인도는 다들 아시다시피 많은 것들이 풍부한 환경이지만 중동 지역은 밤에 불이 없으면 얼어 죽기 십상이기 때문에 불이라는 물건은 아주 중요한 물건인데요.
아무튼 오늘 내용은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면 함께 같이 공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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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27
제목 : [마조선사]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다.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5eeqisqmFnM?si=lyfaIAnjZqcQiJHD
(본문 내용)
(1)
"마조야.."
"어허.." (한숨)
(침묵.. 후 얼른 벽돌 한 장을 들고 벽돌로 돌을 간다)
"아니? 스스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니냐?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중 아니냐?"
"아니? 벽돌은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나요?"
"그럼 넌 앉아만 있다고 부처가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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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목 : 도마복음 제 10장
(아래 하단 내용 : 3:05/54:36~)
https://m.youtube.com/watch?v=8fLKlrmCvGI&pp=iggCQAE%3D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ㅡ♡
(본문 해설)
오늘 불교 이야기는 남악 회양(南嶽 懷讓) 선사와 제자 마조도일과의 일화인데요.
마조도일이 깨닫기 전에 좌선만 하고 있으니까 벽돌과 거울을 비유로 마조를 일깨워 주고 있는 대목이랍니다.
저도 늘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데요.
불교나 기독교가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이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데 다들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지금은 몇 안 남은 수행자들 마저 무작정 좌선만 하고 있고 기독교는 무작정 구하고 갈구하는 기도만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랍니다.
불교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불교 쪽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선방에서 저 사람은 2시간을 앉아 있었네, 이 사람은 3시간을 앉아 있었네 하면서 수행의 기준을 좌선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텼느냐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것은 아주 잘못된 문화랍니다.
그야말로 벽돌로 거울을 만드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앉아 있는 것으로 결정이 난다면 앉은뱅이는 깨닫지 못할 사람들이 거의 없겠네요?
오래 앉아 있는 것으로 하면 앉은뱅이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좌선만 오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지요.(몸과 마음 쪽)
간화선도 마찬가지랍니다.
화두만 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간화선의 묘미는 화두를 통해 선으로 들어가는 수행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마음 보기와 조견오온은 싹 빠져있고 화두 하나에만 몰빵을 하고 있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답니다.
물론 화두 하나에만 몰빵을 해도 공의 자리로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기공이랍니다.
왜냐하면 비유를 하면 어린아이들도 장난감이나 만화책 같은 곳에 삼매에 빠져들 수 있으니까요.
어린아이들도 그렇잖아요?
그토록 가지고 싶던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면 밥 먹는 것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 장난감에만 푹 빠져있듯이요?
마음은 전혀 해결이 안 됐는데 화두 하나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오정처럼 좌선에서 나오면 금방 일반 사람들과 같아지는 것이고요.
수행자로 묘사된 사오정도 그렇잖아요?
선정에 들어 있을 때에는 천하무적이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중생으로 묘사된 저팔계가 조금만 꼬셔도 홀라당 넘어가서 둘 다 손발이 묶이고 그물에 매달려 있잖아요?
요즘 어른들도 그렇고요.
요즘 어른들도 천도재다 뭐다 해서 중생들이 가지고 오는 것들을 마음에 힘이 없다 보니까 홀라당 넘어가서 마음이 그런 곳에 매여있잖아요?
이러한 것들이 모두 수행을 잘 못 배워서 그런 것이고 수행을 잘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나도 해결이 안 된 상태이니까요.
그렇지 않겠어요?
좌선을 하고 있을 때에는 거룩하고 멋져 보이지만 좌선만 풀고 나면 신도들이 들고 오는 것에 욕심들을 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옛 어른들도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말씀들을 하셨던 것이고요.
제 경우는 초기에 5년 가까이를 하루도 안 거르고 여러분들이 상상을 못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의 법문들을 거의 다 들어본 경우에 속하는데요.
아마 모르긴 해도 저만큼 법문을 많이 들어본 사람도 또 없을 겁니다?
인천에 누구라는 스승의 녹음 음성까지 죄다 찾아서 들어보았고요.
그러나 그 어디에도 정확한 수행 방법은 없었답니다.
오늘 마조처럼 무작정 화두만 들고 좌선만 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지요.
화두만 간하는 것은 마치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달에 해당하는 마음과 몸(오온)도 같이 보셔야지요.
지금 한국 불교의 가르침에는 그것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도 그런 것이고요.
한국 불교는 지금 하다못해 의단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관리를 하고 그 의단을 어떤 식으로 타파를 해야 하는지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답니다.
화두를 들었을 때 몸(오온)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고 어떤 결과들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조견오온을 해봤어야 알지요?
한국 불교는 조견오온을 전혀 안 하고 있는데요?
한국 수행자들은 입으로는 조견오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조견오온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답니다.
화두타파도 마찬가지랍니다.
본인들이 화두 타파를 실제로 해본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대해서도 정확한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내용들은 그 어디에도 없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화두를 들었을 때 어떤 상태가 의단이고 그 의단이 맺혔을 때 어떤 느낌으로 어떤 방법으로 타파를 했다는 설명이 있어야 그래야 일반 수행자들도 참고를 하지요?
유명한 어른들은 화두타파를 했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얼버무리십니까?
가장 중요한 내용을요?
일반 사람들은 큰 스님 가르침이라 하니까 무작정 복종만 하고 있는 것이고요.
큰 스님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자체가 수행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화두를 여법하게 열심히 간하라는 내용은 있어도 의단이나 화두 타파 부분에서는 은근히 꼬랑지를 내리면서 슬그머니 말을 얼버무리는 법문은 뭐냐 이겁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뒷부분인데 저는 아무리 찾아서 들어보아도 그런 내용들은 없었답니다?
제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아무리 법문을 들어보아도 사성제로 하면 고성제만 가르치고 있었지 집성제와 멸성제 부분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실제로 집성제와 멸성제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대한 설명을 얼버무릴 필요가 없잖아요?
제 말이 틀리다면 지금이라도 의단이나 화두 타파에 대한 법문이 자세히 나와있는 것이 있으면 저에게도 보내봐 달라는 것이고요.
다들 이름들만 높았지 오늘 마조처럼 벽돌로 거울을 만드는 모양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누구나 다 알만한 그런 큰 스님이 보자고 해서 갔었는데요.
이분의 말씀은 첫마디가 당신께서는 간화선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위파사나는 잘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조견오온은 잘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조견오온은 잘 알고 있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예.."
하고 말았는데요.
왜냐하면 더 나가면 말다툼이 되기 십상이거든요.
그렇지 않겠어요?
큰 스님 앞에서 그것도 제자들도 많은 자리에서
"큰 스님 조견오온이 곧 위파사나랍니다."
하면 얼마나 무안해 하시겠어요?
위파사나가 곧 조견오온이거든요.
다만 한문으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조견오온은 알아도 위파사나는 모른다고 하시니 거기다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까?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조견오온을 해 봤어야 알지요?
지금 한국 불교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과도 그런 것이고요.
벽돌로 거울을 만들고 있으니 그것이 되겠어요?
오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이랍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해보십시오.
화두를 들 때에 [행주 좌와 어묵 동정] 내 몸(오온)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고 어떤 상반관계가 있는지 비교 관찰하면서 사유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본성(불성/성령)을 깨닫게 되어 있답니다.
(참고)
여러분들 혹시 간화선의 최대 장점이 뭔지 아시나요?
간화선의 최대 장점은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가 있고 앉은 자리에서 수많은 일어남 들을 관찰하고 소멸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파사나는 사실 그때그때 뭔가가 일어나 줘야 수행을 하든 말든 할 수가 있는데 반해 간화선은 앉기만 하면 온갖 번뇌 망상과 팔다리가 쑤시고 저려오니(오온) 이것이 얼마나 관찰하기가 좋은 대상들이겠습니까?
이해가 가시나요?
다른 수행들은 화가 일어나든 괴로움 등이 일어나든 뭔가가 일어나 줘야 관찰 거리가 생기지만
간화선은 화두만 들면 자동으로 여러 가지가 일어나니까 이 얼마나 좋은 수행 방법이냐 이겁니다?
화두만 들면 몸(오온)과 마음이 들끓으니 앉은 자리에서 모두 관찰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수행 그러면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랍니다.
왜냐하면 괴롭고 고통스러울수록 좋은 수행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행은 일부러 괴로움과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해가 가시나요?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수행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조견오온을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행자들은 좌선에 몸을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전혀 해결이 안 됐는데 몸이 좌선에 적응을 하다 보니까 그것이 다인 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좌선에 몸이 적응을 하니까 마음은 편해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기공이랍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 말씀도 오온이 공하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했던 것이고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몸이 편하면 마음도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몸이 좌선에 적응을 했으니 공할 수 박에요.
그러나 그것은 몸이 적응을 한 것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처음에 좌선을 하게 되면 온갖 번뇌 망상들과 손발이 저려오면서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주의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잖아요?
이런 상태가 여러분들에게는 보약 중에 보약이랍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마음들이 모이고 뭉쳐서 나중에는 의단으로 뭉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일 집(集) 자를 써서 집성제(集聖諦)라 했던 것이고요.
일단은 내 마음에 한가득히 집(集) 되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밖으로 밀어냈을 때 밑창이 빠질 수 있는 것이고요.
부처님이 알려주신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조처럼 무작정 좌선만 하는 것이 아니고요.
오죽하면 벽돌로 거울을 만들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해가 가시나요?
깨닫기 전에는 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수행 방법이 가장 좋은 수행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수행 대상이 생기니까요.
왜냐하면 내 몸(오온)과 마음이 힘들어야 의단이라는 것도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의단이라는 것이 내 마음에 크게 자리를 잡아야 그래야 그것을 화두의 힘으로 밖으로 밀어냈을 때 밑창이 빠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는 것이랍니다.
비유를 하면 변기통이 크게 막혔을 때 억지로 그 변기통을 들쑤셔서 뚫으려 할 때 나도 모르게 뻥하고 뚫리듯이 이것도 그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변기통도 쑤셔댈 때에는 짜증이 나고 조급하잖아요?
이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런 마음?
누가 옆에서 조금만 내 마음을 건드려도 금방 터질 것 같은 그런 마음?
이렇게 내 마음이 빵빵하게 답답한 것들이 가득 들어 찾을 때가 의단이라 하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내려놓고 버리기가 좋은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경허스님도 같은 조건에 있었던 거랍니다.
경허스님은 밥도 굶어가면서 잠도 안 자면서 송곳으로 허벅지를 쑤셔대면서 [여사미거마사도래] 화두에 걸려서 [콧구멍 없는 소] 이야기를 듣고 힌트를 얻어서 밑창이 빠지셨잖아요?
이 안에 모든 과정과 결과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생각을 해보십시오?
소는 코로 숨을 쉬는데 소에 코가 없으면 그 소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아니겠어요?
숨을 못 쉬면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이것이 의단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소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소를 쳐서 죽여 버리든지 아니면 소를 버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내가 살지요?
계속해서 콧구멍 없는 소를 들고 있어봐야 나만 죽을 지경이지요?
이해가 가시나요?
버릴 때에는 화두고 뭐고, 부처고 뭐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만들어서 반복 또 반복하는 과정이 수행이고 고행인 것이고요.
마치 좌변기가 답답하게 막히면 뚫고 또 막히면 또 쑤셔서 뚫어 대듯이 이것도 계속해서 의단을 만들고 버리고 또 의단을 만들고 버리고 하는 과정을 반복 또 반복하다 보면 반듯이 밑창이 빠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간화선으로 하시는 분들은 화두의 힘을 키우셔야 한답니다.
왜냐하면 간화선은 화두가 곧 의단(답답하고 꽉 찬 마음)을 깨부수고 밀어내는 망치나 도끼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나 도끼가 아무리 재질이 좋으면 뭐 하겠습니까?
크기가 작으면 힘을 못쓰는데요?
그래서 화두의 힘을 크게 키우셔야 한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담 스님이 잘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잘 듣고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4:21 / 6:16 (왼쪽 하단 진행 숫자 )
https://youtu.be/u2ro_coYmSM?si=djCsBsLisWJPZk6m
~♡~
그리고 이번에는 예수님 말씀인데요.^^
오늘 내용은 가르침이라기 보다 말씀이랍니다.
(도마복음 제10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불길처럼 활활 타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을 자신이 지키겠다는 것이고요.
이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이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은 배짱과 추진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분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물론 부처님도 그렇지만 두 분 다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거침이 없답니다.
경전들을 보면 두 분 다 내면이 엄청나게 강한 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요.
이러한 현상은 불성(성령)을 영접한 사람들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랍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는 이런 구절도 있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내용도 오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인데요?
여기서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이 불타오르기 전에 말씀인 것 같은데요.
아무튼 오늘 내용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맞는 말씀이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가르침이 중동 땅은 물론 유럽은 물론 아시아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지 않은 지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해도 예수교가 버글버글하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참 가르침은 없어지고 다들 예수님을 신으로 만들어서 토속 신앙 쪽으로 몰고 가서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전에 마을 앞 성황당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과 나무로 된 십자가에 기도를 올리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불교 쪽도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부처 형상을 앞에 놓고 빌고 또 빌고 있고요.
예수님이 계셨던 중동 지역에는 크게 세 종류의 종교가 있잖아요?
힌두교와 유대교와 예수교가 있잖아요?
힌두교의 무슬림이나 유대교는 유일신을 받드는 그런 종교라 하더라도 예수교만큼은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신들에게나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을 시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다시 예수라는 신을 만들어서 노예로 살고 있으니 하는 말이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신 분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노예근성을 못 버리고 예수라는 신에게 종속되고 있잖아요?
아무리 신도 수가 많고 여러 나라에 예수교가 퍼져나가 봐야 뭐 하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으로 표현하면 큰 물고기는 없고 다들 작은 물고기들 뿐인데요?
부처님 표현으로 하면 알곡은 없고 쭉정이들 뿐이고요.
불교 쪽도 마찬가지랍니다.
부처님께서도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다들 굽신굽신 거리면서 노예로 살고 있잖아요?
"우리 부처님" "우리 스님" 하면서 말입니다?
기독교도 별반 다르지 않답니다.
"우리 예수님" "우리 목사님" "우리 신부님" 하면서 십자가가 뭐든 해줄 것처럼 빌고 또 빌고 있잖아요?
이것이 옛날에 마을 앞 성황당에서 기도를 하고 빌고 또 비는 것과 뭐가 다르냐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들은 그 근성을 못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고 불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곧 주인이요 노예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근성을 못 버리고 다시 노예들처럼 예수님이나 부처님 밑으로 "나 좀 노예로 해주세요" 하면서 기어들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제 말은?
오늘 예수님 말씀처럼 불길이 활활 타올랐을 때 그 힘을 바탕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영접하는 데 힘을 쓰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성불이든 성령 영접이든 하시길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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