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의 실정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 되었지만,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던 반정공신들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공주로 도망가는 볼썽 사나운 일을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재위 5년에는 숭덕제 홍 타이지로 부터 습격을 받아
이번에는 강화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도 정신을 못 차린 왕은 8년 후에 또다시
홍 타이지의 습격을 받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어디 피신만 잘한 왕인가요.
청 태종 홍 타이지가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가 9년 만에
돌아왔지만 두 달만에 죽은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아비로써 의심을 받는 임금.
미운 짓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의 빈 며느리 강 씨마저
사약으로 죽여버리죠. 손자 들은 귀향 보내고.
그리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왕으로 앉혀
예송논쟁까지 불러오게 하여 죽어서도 문제를 일으켰던 인조.
조선 27명 왕 중에 무능함과 미운 짓에 일 순위지만
그는 역시 왕이었기에 평범한 우리와는 생각이 달랐다고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우리에게 변명합니다.
"조정이 가난하여 너희들의 추위를 덮어주지 못하니 나의
부덕이다. 너희들이 이 외로운 산속에서 얇은 옷에 떨고 거친 밥에 주리며,
살이 얼어 터지고 발가락이 빠지는 추위에 알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으니,
나는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듯 아프다"(남한산성 말 먼지 198쪽)
자 이쯤 되면 우리와는 생각이 확연히 다른 거죠.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십 년 만에 숙제를 하듯 남한산성을 보았습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청의 용골대가 기습적 습격으로 인조는 강화로 피신을 하지 못하고
1635년 12월 14일(음력)부터 1637년 2월 2일까지 남한산성 행궁에 있으면서
신료들과 군병들 그리고 민초들이 엄동설한을 어떻게 버텼으며
무너졌는지를 장엄한 대서사시로 절창을 합니다.
인조가 창덕궁을 떠나야 하는 '눈보라'부터 용골대와 칸(청 태종)을
아들 소현세자와 함께 보내고 김상헌도 집으로 가고 대장장이 서날쇠는
농사를 짓기 위해 맑은 똥물을 밭에 뿌리는 '성 안의 봄'까지
총 4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송파나루에서 뱃사공의 안내를 받으며
얼어붙은 강을 건너면서 물어봅니다.
청병이 오는데 왜 피난을 가지 않았냐고
어린 딸도 있고, 어디 가도 마찬가지니까 청병이 오면
이렇게 길 안내를 하면서 끼니를 해결할 거라고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죠.
어제 새벽에 임금님의 어가 길 안내를 했는데 좁쌀 한 줌도
주지 않았다고. 김상헌이 같이 가자고 하자 싫다고 합니다.
언강을 다 건너온 김상헌은 사공을 자신의 칼로 목을 벱니다.
그것이 평생 트라우마가 될지라도.
남한산성은 예판 김상헌이 이야기를 주로 끌고 갑니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자신의 열다섯 살 쌍둥이 아들과 아내를
산성 밖 처가 조안으로 피난을 보냅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김상헌은 도롱이를 걸치고
군병들이 있는 성첩을 순찰합니다.
김상헌이 입었던 도롱이에 흘러내리던 빗물은 고드름으로 변하고.
성첩에 군병들은 밤새 맞은 비로 손가락 마디가 빠져서 창을 쥘 수가 없고
언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라고 임금에게 고합니다.
임금은 종친, 사대부, 사찰의 승려, 민촌의 백성들에게서 여벌의 옷, 귀마개, 버선을 거두어
성첩에서 밤새 비 맞은 군병에게 주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는 젖은 땅에 꿇어앉아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크다고.
말먹이 마른풀을 성 밖에서 구하던 군졸들이 청병의 창에 죽었으며,
성 밖에 마른풀은 청장 용골대의 지시로 불 질러서 사흘 동안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던 마초들은 열흘만에 없어지고 민촌의
초가지붕 지푸라기가 말먹이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제는 말들이 먼저 아사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한채 죽어갔습니다.
엄동설한을 견딜 재간이 없어 성안에 있는 가마니가 모두
동원이 되어 성첩에 올라갔지만 그나마 군병들에게 충분히 돌아가지가 않았어요.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밤에만 얼음장 땅에 깔아 잠깐잠깐 사용하고
낮에는 햇볕에 뽀송하게 말기를 거듭했지만 말먹이가 없어
군병들의 신줏단지 가마니 요를 빼앗으려 합니다.
예판 김상헌은 나누어주기는 쉬워도 빼앗기는 쉽지 않다고
군병들의 인심을 걱정하며 반대하고 있어요.
결국 군병들의 가마니 요는 말들의 먹이가 되고 말었지만,
성안에 들어올 때 삼백 마리의 말은 칠십 마리로 줄었습니다.
성 밖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청장 용골대가 드디어 문서를 보냅니다.
"내가 군마를 이끌고 의주에서 성까지 왔는데 춥고 궁벽한
토굴 속으로 들어가 한사코 웅크리고 내다보지 않으니 답답하다"(웃으면서 곡하기 140쪽)
답답하다 하니 어떡할 건지 해결책을 임금은 고민합니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길을 닦아 화친을 하자고 하고
예조판서 김상헌은 화친을 하여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싸우고 맞서야 화친의 길이 열린다 고합니다.
이론상으로는 예판 김상헌이 맞지만 현실은 이판 최명길이
맞아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결국 울면서 노래하고 웃으면서
곡을 하는 화친으로 선택의 길을 닦습니다.
이판 최명길이 세습 노비였지만 천대를 견디지 못해
청으로 도망처 출세를 하였던 정명수의 안내로 청장 용골대를 만났어요.
용골대는 세자와 대신들을 자신의 군막으로 보내 칸(홍 타이지)의 조칙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에서는 칸이 삼전도에 올 때까지 예판 김상헌의 주도로
싸우면서 화친의 길을 열어갑니다.
이미 성안에 개도 닭도 모두가 호구지책으로 없어지고
밴댕이젓 한 독을 우연히 발견해 어떻게 하면 행궁과 성 안에 사람들이
골고루 먹을 수 있는 지를 임금이 고민해야 하는 상황 속에 신료들은 각서를 꾸밉니다.
성 밖으로 보내는 각서는 하고많은 당상, 당하 신료들도 아니요
군장이나 군병들도 아니요 예판 김상헌과 인연이 깊은
대장장이 서날쇠가 갖고 떠났어요.
그리고 김상헌의 조언으로 온조왕 사당에서 임금과 신료들이 모여 제를 지냅니다.
이쯤 하면 그런대로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있는 거죠.
설날 칸은 망월봉에 오고 칸의 군장들은 성을 박살 내자고
하지만 칸은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황제의 존호가 빛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칸이 왔다는 것을 조정에게 알리고 문서를 보냅니다. 아주 거만하게.
"돌구멍에 처 막혀 있지 말고 살고 싶으면 성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와,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을 해라 내가 다 들어주겠다 두려워 말고"
자 이쯤 되면 남한산성 행궁에 있는 인조 임금을 비롯하여
당상, 당하 신료들이 이른 아침 대나무 숲에 수다쟁이 참새들같이
구수회의가 잔칫집 분위기였나요?
아닙니다 모두가 침묵했고 뻔한 답서를 누가 쓰느냐로
예판 김상헌과 이판 최명길의 입씨름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는 조선 포로들이 죽음으로 길을 닦았던 망월봉 정상에 있는
홍이포가 행궁 앞마당에 포탄을 떨어뜨리고 산성 벽을 허물며
칸은 더 이상 지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강화 감찰사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배를 타고 도망가고
예판 김상헌의 형 김상용이 성첩을 지휘했지만 청병들은 군병들을 청소를 하듯 죽였고
김상용은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산화합니다. 아들에게 '너는 목숨을 귀하게 여겨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 너희들의 생명에 칼질을 하지 말며 고향에 조용히 엎드려
세상에 나오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청병은 피신하여 있던 두 명의 왕자와 빈궁, 숙의, 사녀가 삼전도로 붙잡어왔어요.
그리고... 이제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칸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던 대로 삼전도 굴욕을 치르게 됩니다.
물론 소설이기에 소설가의 상상력이 쓴 글은 맞지만
사실에 중점을 두고 쓴 소설도 맞다는 전제하에 잠시
개인적인 의견도 제시하고 싶어요.
역사하면 우리는 흔히 'E.H. 카'의 '역사란 무언인가'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인용합니다.
김훈 작가님은 남한산성에서 예판 김상헌을 통해 어차피 화친을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같습니다.
강물이 풀려 칸도 서둘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 성 밖에서
조선군이 힘을 합쳐 청병과 싸웠더라면 삼전도 굴욕까지는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 간 후로 도원수 김자점이
끔쩍도 안했다고하니 인조반정의 한계가 거기까지 인 것 같았습니다.
2022년 12월 5일
NaMu
첫댓글 인터넷 상에 이렇게 장문이 올라오면
민폐예요.
그~쵸ㅠㅠ
시간 나 실 때 큰맘 먹고 함 보세요.
블랙 코메디 같이 재미도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언제 시간나면
삼전도를 가보려고
한답니다.
저도 책을 읽고 삼전도가 어디 있나하고 다시 봤어요.
많이 서투른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제대로 평가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 시절,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인한 광해군의 실각과 반정으로 등장한 인조의 쇠락한 명에 대한 사대정치. 민족의 뿌리로 보자면 김씨성의 칸을 섬기는 후금이 더 같은 북방민족 계열임에도 오랑캐라 무시하며 자초해 불러들인 두 번의 호란. 삼전도의 치욕... 가정이 없는 역사에 굴욕으로만 남은 그 교훈을 잊지말아야 할 것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러게요. 그 당시에 살지 않았는데 어찌 정확한 사실을 알겠어요.
단지 여러 자료를 통해 유추만 해 보는거죠.
근데말예요.
인조 당시를 잘 진단 하신 것 같습니다.
역사 시험 100점 맞았죠👍
작가 김훈의 신작 장편『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이다. 그해 겨울은 치떨리도록 모질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 공부를 더 합니다.
위 '남한산성'소설은 2007년에 발표했군요.
이씨조선(1392년 ~ 1910년} 역사에서 훌륭한 왕도 있었지만 찌질이 왕도 있을 터.
찌질이 왕 가운데 한 사람인 인조.
삼전도 지금은 서울 송파구 삼전동 일대.
삼전도공원에 있던 삼전도비(정식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는 지금은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지요.
석촌호수 서호와 동호을를 가르는 송파대로 아래 서호 쪽으로 위치.
잠실지역에서 사는 저는 10여분이면 위 삼전도비를 볼 수 있지요.
지하전철 잠실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금방이면 빗돌을 볼 수 있음.
저는
남한산성으로 자주 등산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아쉬움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 다시 더 생각합니다.
덕분에 저도 글감을 떠올립니다.
사실은.... 저도 남한산성 산행을 하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보고 글을 쓸려고 계획을 세웠는데요
남한산성 산행 할 기회가 없어서요
이렇게 퀑대신 닭이라고 어설픈 글만 쓰게 되었어요ㅠㅠ
화친이냐 싸움이냐를 고르란 거지요?
전쟁이나 외교나
저는 이득이 많은 걸 택하겠습니다.
그 때 상황을 몰라 어느 쪽이라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김훈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았습니다.
'빗물이 고드름이 되었다'
얼마나 추웠을까 라는 측은지심이 생기니
김훈님은 소설가로서 설득력이 많은 분 같아요.
일본의 쇄락을 보면서
우리가 쇄국을 하지 않았으면
일본보다 훨씬 발전을 많이 했을거라고
오늘 아침에 영감하고 이야기했네요.
일본은 오랫동안
늙은 정치인들이 국정을 장악한 터러
침체에서 좀처럼 못 벗어날 것 같아요.
우리도 젊은 사람을 각 처에 많이
썼으면 싶습니다.
김훈 작가 넘넘 잘 써요.
제가 소설가 글 쪼금은 봤는데요.
늦갂이 소설가로 데뷔 해서 이만큼 잘 쓰는
작가도 드물어요.
칼의 노래 강추예요^^
표현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우리는 흔히 최명희씨의 혼불에 표현력의
극찬을 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칼의 노래가
더 좋았어요.
김훈의 장편소설을 잘 읽어 내신 것 같습니다.
불과 400여년도 안된 역사이지만,
삼전도의 굴욕은 우리 역사에 없었으면 합니다.
어찌되었던, 국민이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어야
잘 사는 나라이고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 국가입니다.
군신의 자리가 믿음이 있어 충성하여야 국력이 강합니다.
글과는 상관 없는 댓글인 것 같지만,
요즘 어린이들의 의식을 적어 볼까 합니다.
제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운동회에서
청백으로 나뉘어 놋다리 밟기를 했지요.
놋다리 밟기는 전래 민속놀이 이지요.
왕이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어린 학생들이 허리를 굽혀,
왕후와 공주가 무사히 내를 건너기 위함인데
어떤 학생은 왕후와 공주가 지나는 찰나에
일어 서 버렸다네요.
왜 내가 하녀이며, 공주의 발에 밟히기 싫다나요.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경제대국이 되고
국민들의 예술분야나 스포츠에서도 많이 높아진 수준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거짓말 잘하는 인간은 추출되어야 합니다.
글은 할 수없이 의무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도
쓰고 싶다는 열정은 식어서요.
잘 안쓰는데 5060카페에 오니까 글을 넘 잘 쓰시는
님들이 많아서요 넘 좋은 자극제가 되었어요.
그냥....어설픈 글 함 써봤는데
잘 한 짓인가요 선배님^^
여러가지로 감사드려요.
@나무랑
물론 잘 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글을 많이 써야 합니다.
물론 책도 많이 읽어야 겠지만,
젊었을 때이고...
지금은 글을 씀으로 해서
자기 표현과 잊어가는 단어들을 찾을 수 있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운동이 됩니다.
특히 카페에서는,
남의 글을 읽고, 내 표현도 해보고
서로의 소통을 함으로써
노년에도 젊었을 때 가진 능력을
조금이라도 표현을 해 봅니다.
능력있는 노년을 가져 봅시다.
행복해 질 것입니다.
나무랑님은 너무 잘 하고 계시지요.
김훈의 소설은 당시의 실존 인물을 소설속 등장 인물에서 바꿔치기하는 허구가 너무나 많습니다.
소설이어서 구성이 하구라 할지라도,어느 장소에서 어떤 장수가 싸웟다는역사적 팩트까지 왜곡해서는 안되지요.
장안의 집과 백성이 거의 불타죽고, 백성의 거의 10분의 1인 50만명이 끌려가 심양에서 노예시장까지 열렸던 병자호란.
지금이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처단을 햇어야 할 임금이었지요.
오직 명분에만 집착해 수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목숨과 사직을 보전키 위해 치욕의 항복을 했던 인조...
재위 80년간 단헌번의 전쟁도 일으키지 않고 훌륭한 외교술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던
고구려 장수왕의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을 일으키는 지도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소설이니까요.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쓴다는게
소설가로써는 이보다 위험한 작업은 없을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설픈 글을 올린거는요.
누구도 따라 올 수없는 김훈 작가님이 표현력에 푹
빠져서요.
비록 사대부가 세운 조선이라 하더라도 왕이
자신의 친위부대가 있었다면 운신의 폭이 넓어졌겠죠.
정조의 장용영처럼^^
저는 영화를 감상하였지요.
인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우매한 임금으로 각인되어 있어서
사실관계를 떠나서 매우 아쉽기만 합니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내우외한으로 하루도
평안한 임금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지요.
그런 모든 걸 교훈 삼아 희망찬..
미래의 대한민국을 기원해 봅니다.
또 자세한 설명..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영화로 보셨군요.
전 영화는 못 봤어요.
고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인들은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아직은 많이 서투른데 잘 봐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도 수년전 영화를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불쌍한 민초들 때문이었지요..
초등학교때부터 국사를 배운 첫학번이며 지금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무능한 군주는 수천,수만의 민초들을 힘들게 합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게요 말예요.
무능한 군주시대 사는 것도
팔자려니 해야하나봐요.
능력 없어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으면 마음이라도 제대로 갖추시던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을 것은 추측이라고 해도
남편 잃은 며느리를 죽이고 어린 손자들을 귀양 보내 병사하게 하는
못나고 잔인한 인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소름 인물입니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 나무랑님 재미있는 다른 이야기들도 자주 글 남겨주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가 있는 동안 서양문물을 많이
봤을거구요. 또 청 관리들 하고 친분도 생겼잖아요.
그런데요. 인조는 삼전도에서 임금으로써 치욕적인
모욕을 당해 청이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싫었겠어요.
거기다 가장 중요한건 송시열이란 재수없는 자기가
송자라고하는 인간이 있었는데 그 인간이 봉림대군의
사부였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밑그림이 그려지죠.
그러다보니 눈에 가시 소현세자가 세력을 키우기전에
화근을 없앨려고 그런건 아닌가 싶어요.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만일에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청과도 조금더 유연하게
대처하여 일본이 메이지 시대 성장했던 것처럼 성장하여 어쩌면
우리가 일제 강점기같은 건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하구요.
@나무랑 맞습니다.
나무랑님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예리하십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일본을 능가하는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었을 겁니다.
병자호란의 여파가 결국 일제의 통치를 불러온 거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나무랑님 덕분에 김훈의 남한산성 다시 되새기게 합니다. 인조왕 선조와 함께 저도 싫어하는 왕입니다.
그러게요 어차피 왕은 정치가인데
정치인들은 정치를 잘 해야 후세에도
욕을 안 먹어요.
오늘은 2022. 12. 6.
오후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있는 석촌호수 서호로 나갔다.
숲길을 걷다가 뛰면서 송파대로 북편에 위치한 '대청황제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으로 갔다.
커다란 빗돌. 용갓석이다. 빗돌을 받치는 좌대는 두 개. 큰 좌대에 올려져 있고, 작은 좌대에는 아무런 빗돌도 없다.
청태종이 1639년 요구해서 더 큰 좌대에 빗돌을 세웠고...
훗날 이게 치욕스러워서 송파나루터 삼전도에 내던졌다가.. 일제가 꺼내서 다시 세우고....
지금은 석촌호수 동호/서호로 가르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
비각은 초라하게 꾸몄다.
이 빗돌은 중국인한테는 아주 자랑스러울 게다. 이따금 중국인들이 와서 이 빗돌을 본다.
지하전철 잠실역에서 나오면 바로 인근에 위치하기에...
롯데월드/롯데타워 건물도 바로 인근에 있기에 중국인들이 더 쉽게 구경하러 올 터.
조선조 3대 쪼다왕. 선조, 인조. 고종
외적침략을 당했던 못난 것들.... 결국에는 나라를 빼앗겨서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식민지가 되었고...
여기에는 자랑스러운 을사5적과 친일파들이 득실벅실할 게다.
한일합방 조약서가 옳다고 지지했던 양반들의 명단이 700여 명. 일본으로부터 극진한 대접받고..
모두가 다 잘하고 살 수는 없지만,
역사의 뒷면은 서글프기 한량 없는 것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되면 석촌호수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서 우리에 시름을 잊으라고합니다. 아직은 많이 서투른데 잘 봐주시고 이렇게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영화도 보셨군요.
책하고 영화하고 비슷했나요?
김훈 작가님의 글은 표현력이 넘넘 좋아서요
그걸 어떻게 영화로 담았을지 궁금해서요.
저는 영화는 못 봤어요.
전쟁은 어떤 전쟁이 되었던지
가장 나약한 계층부터 무너지게 되있으니까요.
그게 늘 우리를 가슴 아프게하는 것같습니다.
@나무랑 영화에서는 인조실정 부각보다
전쟁의 시작과ㅈ과정
민초의 고단한 삶
거기서 수도를 버리고 가는 군왕의
처사결정을 두고
신하들 논쟁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는데
거기서 두 신하 이병헌과 김윤식의 열연이 더 돋보이게 만들었더라구요
대단하십니다~
전 뭐 영화고 책이고 아직 못봤으니~
도대체 그놈의 산성은 언제 만들었나~ 찾아보니
신라시대에 쌓았다네요~ ㅎ
성 아래 광주쪽으로 내려가다 닭 백숙 잘하는 집만
알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