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첫 토요일 성모 신심) 평화를 일구는 일꾼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 매 처에서 바치는 기도다. 하느님은 아드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머리를 깊이 숙여 감사하고 그 수난과 죽음을 견디고 이겨내 주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송한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분은 평화의 군왕이 되시고 우리는 끝없이 그 평화를 누리게 됐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이사 9,5-6).”
이런 우리 믿음과 달리 세상은 실제 전쟁으로 고통받고, 서로 무력시위를 하는 바람에 전쟁에 대한 위협으로 긴장되고 마음은 어두워진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외침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고 안타까워 한숨이 절로 나온다. 힘을 키우는 그 비용을 복지와 환경보전에 사용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에 하늘나라를 맛보았을 거다. 서로 싸울 마음이 없음을 확인하고 약속할 때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건 어린이도 알 거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는다. 내가 너를 해칠 마음이 조금도 없고 그도 나를 해칠 마음이 전혀 없음을 서로 알 때 우리는 평화롭다.
평화를 이루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다. 초인적인 인내와 용기 있는 개방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과 비슷하다.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또 일어나고 있는 건지 조금씩 알아간다. 미움이 오해에서 비롯됐고,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서 서로 인내해야 함을 알게 된다. 말이 쉽지 이 과정은 그 첫 만남부터 쉽지 않다.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남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쪽이 인내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면 가능하다.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은 자기 내면을 향해 무질서한 무의식 안으로 주님과 함께 들어가는 과정인 거 같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거처럼 성찰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무장해제 시켜 자신도 보기 어려운 자기 속내를 보고 알아간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이래서 그랬구나.’ 그리고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너는 그렇구나.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알게 된다. 그러면 미움은 연민으로 바뀔 거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다고(이사 9,5)” 기뻐하라고 했다. 지독히 가부장적인 표현이라서 듣기는 불편해도 그 의미는 분명하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뜻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이루는 일꾼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 자녀라고 불려야 한다. 맏아들, 큰오빠, 큰형인 예수님이 그러셨던 거처럼 자신이 속해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만남과 대화 그리고 인내라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된다.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평화는 하느님 뜻이다. 평화를 이루려면 초인적인 인내와 천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범인 성모님도 잘 모르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열두 살 어린 아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셨고, 십자가 아래에서는 하느님 구원에 대한 무지의 고통 속에서 통곡하셨을 거다. 그래서 그분은 평화를 일구는 일꾼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답답하고,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묵주를 집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 없는 성모님은 없다. 아들 없는 엄마가 없는 것과 같다. 성모님 계신 곳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고, 성모님을 찾는 이는 언제나 위로받고 예수님을 만난다. 그렇게 저렇게, 엎치락뒤치락, 넘어졌다 일어나며 평화를 찾아가고 평화를 이루어간다.
예수님, 십자가는 우연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점점 깨달아갑니다. 죽음 없는 부활 없고, 수고와 인내 없는 평화도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도와주시고 함께해주셔야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길의 인도자이시니 언제나 제 발을 십자가의 길, 주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