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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2. 12. 5. 월요일.
아침 하늘빛깔은 맑으나 날씨는무척이나 춥다.
<아름다운 5060카페> '수필 수상방'에는 '나무랑'님의 '삼전도 굴욕....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필 수상방 제10327호)의 제목으로 남한산성과 삼전도에 관한 글이 올랐다.
또한 소설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많은 것을 이야기 할 게다.
나한테는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기에 내 글 하나를 퍼서 여기에 올린다.
남한산성의 돌공원
추위가 조금 가시는 봄날에 나는 아내, 막내아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남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는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성곽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며, 총괄대장이 지휘하고 집무하는 곳.
‘1층 마루에는 오르지 마시오.’
팻말이 있었다. 이를 어기듯이 뒷켠으로 돌아가니 이층으로 오르는 난간(나무계단)이 굳게 닫혀서 널찍한 대청에 오르지도 못했다.
남향 앞마당 귀퉁이에 선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 리승만 대통령이 1953년 이곳을 다녀가면서 심었다는 기념식수. 이를 기리는 돌기둥 하나.
마당에는 큰 바위가 담장의 모서리를 맡고 있었다. 바위 상단에는 굵직한 서체로 쓴 글이 희미했다. 서장대(西將臺)로 새겨진 이 바위는 매바위. 전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축성 당시 동남쪽 일부를 감리하던 관리감독관 이희가 공기(工期)를 제때에 맞추지 못했으며, 또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으로 처형당했다.
이희는 자신의 누명이 억울하며, 결백을 증명할 매가 곧 날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처형당하자 매가 날아와 바위에 앉았으며, 그의 내자는 통한을 이기지 못해 한강수에 투신했다.
훗날 무고함이 밝혀지고, 그의 원혼을 달래고자 사당(청회당)을 지었다. 이날 청회당 출입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혔다.
서문(西門)으로 향했다. 성남, 잠실 등지의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성벽이 뱀꼬리처럼 구불거리며 길게 펼쳐졌다. 복원된 성벽에는 구멍이 숱하게 뚫려 있는데 이는 활과 총을 쏘는 총안구(銃眼口).
서문 앞에서 사진 한 컷을 찍었다.
잘 다듬어진 임도를 따라 천천히 남하하면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수려했다. 수령 80~90년의 아름드리 솔나무가 밀집하여서 산성에 서린 충절을 더욱 기리는 듯했다. 시원스럽고 늠름한 소나무 군락지를 눈여겨보면서 탐방했다. 사각으로 다듬은 묵직한 돌을 궤어서 정교히 쌓은 석벽은 북문. 빗장을 활짝 연 북문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석문이 주는 중압감과 위압으로 온몸이 짓눌리는 듯싶었다.
성문 밖에는 울창한 잡목 숲이 전개되었으며, 가파른 숲 속에도 비밀 통로가 나 있었다. 나는 잠시나마 눈 감으면서 수백 년 전의 당시로 돌아갔다. 군졸이 창검을 들고 성곽을 지키면서 성안팍을 드나드는 산성의 백성을 점고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두어 시간 남짓 걸었더니 시장기가 들었다. 성안의 음식집에서 짜장면과 커피로 곡기를 채우고 입가심을 한 뒤에 동문으로 향했다.
망월사, 장경사(長慶寺)로 오르려면 동문 주차장에 주차해야 할 터. 나는 동문을 지나쳐서 광주 쪽으로 내달았다. 좁디좁은 길을 곡예하듯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운전했다. 광주 쪽으로 내려가는 목적지는 남한산성 돌공원(돌예술공원). 투박하고 거칠 돌을 정(鉦)으로 쪼아서 판 석공예품으로 이름이 난 곳을 탐방하고 싶었다.
동문(東門)을 빠져나간 뒤 한참을 내려가니 오른쪽에 알맞은 크기의 주차장과 작은 잡화상 가게가 보이기에 상인에게 길을 물었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오른쪽 일방통로가 시작되는 직전에 소로가 보이며, 그 소로부터 돌공원이 시작되며, 외길 따라가다가 좌회전한 뒤에 일방통행로를 따르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왼쪽 산속에서 예사롭지 않는 돌공예품이 눈에 띄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튼 뒤에 숲속에 난 오솔길(외길)의 주행에 조심했다. 길가 양 섶에는 솟대, 인석(人石) 등이 즐비하게 설치되고, 길 따라 치장되었다.
영양탕, 오리반숙 등 기름진 먹을거리를 파는 보양식 음식점도 숲속에 군데군데 자리잡았다. 제법 깔끔한 음식점의 건물에 부속한 주차장을 지나친 뒤에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계속 올랐다. 공터 안에는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었기에 나도 한 자리를 슬쩍 차지했다.
민속예술품이 정말로 잔뜩 찼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민망스러운 성기를 당당히 내놓는 성근석(性根石), 야릇한 몸짓으로 유혹하는 색정녀(色情女)의 도발적인 자태, 풍만한 젖통을 내놓은 석녀(石女), 금세라도 교합의 클라이맥스에 달할 것 같은 요염하고 농탕한 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性을 상징하는 항아리, 옹기, 맷돌(암돌, 숫돌)로 계단을 쌓았다. 물허벅을 진 채 동이에 물을 붓는 자태를 취한 제주녀가 이색적이었다.
12지간의 동물인석(動物人石, 半人半獸)들, 괴기스러운 형상을 지닌 귀인(鬼人)과 돌장승, 벅수들의 험상궂은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이들이 꿈속에서 나타나면 기함을 지르거나 혼절할 만큼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험상궂은 표정과 위협적인 몸짓(殺傷)으로도 머릿끝이 쭈볏할 만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크고 작은 돌맹이로 아귀를 맞춰서 층층으로 쌓아 올린 선돌과 투박하고 거친 탑돌도 가득히 들어찼다. 치성들인 돌탑이 약한 바람으로도 쉽게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높게 쌓아 올렸다.
산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악스럽게 지은 무속 건물의 비좁은 마당에 선 당나무(신단수)에 울굿불굿한 헝겁이 댕기마냥 길게 늘여뜨려졌으며, 신성한 신앙의 영역인데도 음산하고도 음험한 기운이 똬리를 틀 듯이 서렸다.
갑짜기 징과 꽹가리를 두들기는 쇳소리는 푸닥거리의 소리가 분명했다. 신단수 아래로 산신령이 강신하는가, 해산구완하는 삼신할매의 손길이 바빠졌는가도 싶었다. 악귀축령을 물리치는 주술, 기자발복(起子發福)을 기원하는 염불일 것 같았으나 이런 무속과 민속에 서툰 나로서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21세기를 사는 나한테는 옛날 시골에서 숱하게 보았던 동네의 무당, 무수리의 주술주문이 다시 재현되는 듯한 외경스러운 불안감으로 섬뜩했다.
토템과 주술, 성애(性愛)가 함께 어울린 이색적인 돌조각공원은 발랄하고 발칙한 세상으로 보였다. 자칫 왜곡된 성의 늪으로 떨어질 것 같은 타임머신 속의 세상. 이런 단견은 전래의 민간신앙, 원시풍속, 무속, 발복기원하던 조상들의 순후한 유산과 전통을 배우지도 못하고 익히지도 못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시간이 나면 어둠 속에 가려진 원시문화와 성속(性俗)의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어내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지키고 싶다. 우리의 전래 원시사상, 삶, 혼, 얼, 숨결이었기에 새로운 시각(프리즘)에서 영험적인 무속민속 예술을 이해하고 싶다.
이날 내가 비역질을 한 것도 아닌데도 얼굴빛이 불콰해지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군에서 갓 제대한 막내아들이 곁에 있어서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다. 성인인 아들이 조금은 불경스럽고 외설스러운 성석(性石)을 민속예술품으로만 바라보았으면 싶다. 나는 초로의 연륜, 나잇살의 핑계로 면죄부를 받아서 꺼끄러운 금기의 성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싶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가 어느 선부터인 지가 다소 애매한 기로에서 포르노, 에로스적인 뉘앙스와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다. 이색적이고 낯선 곳에서 한국인의 은밀한 성숭배 문화, 석조문화를 관조하고 싶었다. 이들 민속신앙 문화가 풍요와 아름다움의 절정이며, 영원에 이르는 결정체(끈)로 여기고 싶다.
남한산성 안 장경사 뒤쪽 신지옹성 아래의 골짜기에 위치한 돌조각공원에 관한 글이 자칫 미풍양속을 저해하거나 성희롱적인 언어폭력이 될 수도 있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을 덧붙인다.
2009.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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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자료
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2022년 현재 삼전도 위치
위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검색.
독자를 위해서 게시했기에 용서해 주실 게다.
나는 위 위치를 훤히 안다. 잠실에서만 45년째 살고 있기에.
사진은 2장까지만 허용된다는 카페 규칙을 잘 알고 있으나 이 글에서는 3장을 올렸다.
카페 회원의 이해도를 돕기 위해서...
죄송.. 용서바랍니다.
참고자료(인터넷에서 발췌) :
남한산성 :
본성 둘레만 9.05㎞, 옹성과 외성을 포함하면 11.76㎞에 이르는 남한산성은 행궁(유사시 임금의 거처를 옮긴 궁궐)을 비롯,
남문(지화문)· 북문(전승문) ·서문(우익문)· 동문(좌익문) 등 문 4개, 연주봉옹성, 제1남옹성 등 옹성 5곳, 봉화대 2곳, 암문(연락병이 이용하는 비밀문) 16개 등을 갖추고 있다.
성내에는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지어졌던 천주사, 국청사 등 9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일제가 모두 파괴해 지금은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 등 4개만 복원되어 있다.
2022. 12 5. 송파구 잠실에서 최윤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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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1)
* 2022. 12. 6. 오늘도 석촌호수 한 바퀴를 돌다가 위 빗돌을 다시 보았다.
'대청황제공덕비'.
빗돌 상단에 크게 새겨져 있기에 읽을 수 있지만 비석에 새긴 본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12월 초. 지금보다 더 추운 1636년 12월에서 다음해인 1637년 1월에는 얼마나 추웠을까?
당시의 보온(옷 장갑 등)을 고려하면.... 왕족과 귀족들은 그렇다고 해도 일반 병졸과 백성들은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겁이 났으랴.
전쟁비축물자도 별로 없는 남한산성 안에 갇혀서... 청나라 아골타는 구태여 공격하지 않고는 에워싼 채....
결국은 인조는 항복해서 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도 섬에 나와서 맨발로 서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굽신거리면서
청의 신하가 되겠다고 읊조렸으니....
오늘은 최고 영상2도, 최저 영하 7도. 이보다는 훨씬 추웠을 그 당시의 절기를 생각하면....
답답하다. 과거의 사람들과 생활상이....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분했을까? 국난을 대비하지 못한 조선조 왕과 신하들 ....
2)
원문에 댓글 달았고, 퍼서 여기에도 올린다.
나한테는 글감이 되기에...
오늘은 2022. 12. 6. 화요일.
오후에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의 동호 서호를 가르는 송파대로 북편에 있는 '대청황제공덕비'의 비각을 찾아갔다.
초라한 비각(빗돌을 가리는 건물) 안에 든 커다란 빗돌을 보았다.
용이 꿈틀거리는 용갓석 아래는 넓적하고 큰 빗돌 상단에는 한문으로 '大淸皇帝功德碑'라고 새겨져 있고,
빗돌의 전면 후면에는 3개의 나라 글자로 써졌으나 전혀 판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게 창피해서 '삼전도비'라고 부른다.
이런 명칭은 위 빗돌에는 전혀 없다. 중국 한자로 '대청황제공덕비'라고 썼다.
지하전철 잠실역에서 내리면 롯데월드/롯데마트의 대형건물이 보이고 조금만 걸으면 위 석촌호수가 나오며, 대로변 바로 인근에 이 비석이 서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한테는 치욕의 비석일지라도 청나라/지금은 중국사람한테는 자랑스러운 빗돌일 게다.
'역사는 강자가 새롭게 고쳐 쓴다.'라고 말하는 나.
어쩌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역사는 반복할 수도 있다 ' 라고도 말한다.
2022. 12. 6. 화요일.
첫댓글
남한산성은 카폐 회원들과 여러 번 간 것 같은데
님과 같이 구석구석을 못 본 것 같습니다.
남한산성과 삼전도비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네요.
삼전도비 현장도 구경하고
비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만,
마음이 상해서,
대충으로 보았습니다.
저도 송파구에 살았거던요.^^
예.
댓글 고맙습니다.
꽁꽃님은 송파구에 사신 적이 있군요.
저는 1978년 5월 초부터 살기 시작을 해서 지금껏 잠실에서만 삽니다.
물론 퇴직한 뒤에 저만 혼자서 시골에 내려가서 그때까지 혼자서 고향을 지킨던 어머니와 몇 해 함께 살았지만 본질은 서울 송파구에서 삽니다.
제 아내, 자식 넷이 사는 곳이기에.
송파구 많이도 변했고, 변하고 있지요.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겁니다.
다리가 성성할 때에는 성남 남한산성 등지로 잘도 돌아다니면서 도보여행을 했는데...
지금은 무릎이 아프다는 둥 별별 구실을 대면서 아파트 안에서만 맴 돕니다.
저는 늘 강조하지요.
현장에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먹어보라고.
경험이 가장 확실한 지식이 될 겁니다.
지식이 쌓이면 슬기가 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도 정확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