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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 명소.,풍도.
풍도.,진달래석.
풍도.,일출
풍도 복수초.
풍도바람꽃
풍도노루귀.
풍도대극.
야생화 천국'.,풍도.
안산시 유인도는 풍도· 육도, 그리고
연륙도인 대부도·선감도·불도·탄도 등이며,
등록되지 않은 무인도 3개 & 9개 무인도가 있다.
.................안산시 섬들...................
'거북햄섬 개섬 고두메기섬 구봉도 누에섬
대부도 말육도 메추리섬 물우녀섬 미육도
방아머리섬 변도 불도 선감도 쌀섬 외지섬
육도 작은가리섬 잠루섬 종육도 중육도 쪽박섬
큰가리섬 큰햄섬 탄도 터미섬 풍도 할미섬' 32 섬 중
남아있는 섬들은
거북햄섬 대부도 말육도
물우물섬 미육도 변도 육도
종육도 중육도 큰가리섬. 큰햄섬 풍도.
....................................................
대부도 가는 길은 섬과 섬을 잇는 드라이브 코스.
탄도, 불도,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감도를 비롯하여
풍도와 형제처럼 어깨를 맞대고 떠 있는.,육도(六島).
당진 도비도항에서
낚시배로 10분 거리.
6섬으로 이뤄진.,육도.
'전곡항 마리나 클럽하우스&
요트정박소'는 이국적인 풍경.
전곡항에서 요트로.,한시간 소요.
피서철 캠핑카로 대부도 여행 후,
그곳에서 가족단위 요트 여행지로
육도를 찾는 관광객 수도 늘고 있다.
......................육도(六島).....................
'고려~조선'시대 봉수대가 위치한.,유인도.
안산시 대부도 남서쪽 20㎞에 위치한.,육도.
북위 37°04′40″ 동경 126°27′50″.,'미육도'에 위치.
풍도에 속한 섬으로 풍도에서 뱃길 20분 거리에 있는
끝눅섬· 가운데눅섬· 육도 ·질마섬· 정초리섬 ·물우녀.,6섬.
'6섬' 미육도 중 가운데 있는 가장 큰섬.,육도(68m).
면적 0.13㎢, 섬 둘레 3.0㎞로 풍도에 비해 매우 작다.
끝눅섬[末六島]은 6섬 중 가장 북쪽에 있는.,무인도.
가운데눅섬(中六島)은 끝눅섬 남쪽에 위치한.,무인도.
질마섬은 육도 남쪽 섬으로 소의 질마 모양을 한.,무인도.
정초리섬(정철이)은 질마섬 남쪽.,뾰족섬.
'정의 끝처럼 뾰족하다.'고하여., 정초리섬.
물우녀(尾六島)는 바위 두 개가 서 있는., ‘여’.
썰물 때 나타나고, 밀물 때 잠기는 바위.,여.
배가 다니는 물길 위에 있는 '여'라는 뜻.,암초.
'조그만 섬 6개가 모여 있다.'고 하여., 육도(六島).
육도 북쪽섬 끝눅섬에서 보면,
6섬이 하나의 섬처럼 보여., 육도.
서해 해양성 기후를 강하게 받는 곳.
여름철 열대성 저기압에 의한 풍수해,
겨울철 강한 북서계절풍으로 영향으로
서해 해양성기후 바람에 의한 피해가 크다.
육도 지형은 비교적 높은 봉우리가
섬 북쪽과 남쪽 외곽부에 있고 이보다
낮고 작은 봉우리들이 섬의 서쪽에 있어서,
서쪽 바다에서 보면, 물위에 뜬 종이배 같다.
육도 중앙부는 봉우리들로 삼면이 감싸고
동쪽이 트여있는.,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육도에는 지하수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두 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섬 중앙부로 이전에 논이 있던 자리인데,
호수나 연못처럼 지상에 드러난 물은 많지 않으나
곳곳에 '갈대·부들·미나리·버드나무' 습생식물 군락지.
습생식물 군락지 또 다른 곳은
마을 앞 자갈해안 북쪽 끝 부분으로
육지쪽 둘레 5백m 습지에 갈대 군락지.
대부도 탄도선착장에서 뱃길로 40분 소요.
육도는 풍도에서 4.5㎞에 있고, 뱃길로 20분 소요
육도는 풍도와 달리 완만해 농경, 주거(住居)에 적합.
섬 중앙부 주거지가 대부분, 한때는 논농사도 지었던 섬.
육도는 풍도에 비해 많은 주민이 살고 있지 못한데,
섬도 작고 산도 작아 지하수가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풍도와 같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다는 점에서 휴양지로 적합.
육도 주민 대부분, 그물과 통발로
우럭· 놀래미· 꽃게·낙지· 실치· 멸치 등
수산물을 잡고 굴, 바지락을 채취하며 생활.
...........................................................
미육도(尾六島)는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무인도.
육도 남동쪽 2㎞ 지점과 중육도 남동쪽 1.4km 부근.
미육도(18,000㎡) 주변에는.,조그만 6 섬이 모여 있다.
6섬 중 아래쪽에 꼬리처럼 떨어져 있어.,미육도.
섬 모양이 정 끝처럼 뾰족하여.,정초리섬(정철이섬).
육도 주민들이 굴과 바지락 채취를 위해 11월 초
인근 도리도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구정 전날에야
돌아오는 생활방식을 무려 백년간 고수해 온.,풍도.
'육도~ 도리도 ~ 풍도'.,생활방식.
조선시대 교육기관이 없었던.,풍도.
1921년, 대청면.,대청초등학교이 최초.
그뒤 각 면마다 초등학교.
1922년 대부면 대부초등학교,
1933년 덕적면에 덕적초등학교
1933년 대부면에 풍도초등학교 설립.
그뒤, 1934년, 영흥면에 영흥초등학교,
1935년, 송림면(현재,연평도) 송림초등학교.
그뒤로, 각급 학교가 설립된.,옹진군 도서지역.
'육도'의 주민들이
풍도에 정착한 시기는
1933년 풍도초등학교 설립.
일제강점기 전후로 추정된다.
'1910년 10월 1일 한일병합 조약체결 후.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던 일제강점기부터
풍도의 독특한 생활방식은 시작된 것일까?'
'1914년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楓)자’.,풍도(楓島).
1914년 부천군 편입되면서부터 현재의.,풍도(豊島).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 때 시작된걸까?'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그당시
풍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
대부도는 갯벌에 맛조개·동죽·고둥·소라 등
망둥이·넙치·우럭·노래미 등을 바다낚시 명소.
'고려 말~조선' 시대 군마를 기르던 국영방목장.
.
대부도에 연육되어 있는., '불도'와 '탄도'는
원래, 밤바다 뱃길에 횟불을 밝히던.,'등대 섬'
횟불에 불을 붙여 높이 올려 태우던 섬들이었다.
그리하여,
섬의 지명도
'불도 & 탄도'
불도는 대부도에 속한 유인도, 현재 방조제로 연륙.
불탄도리, 부침이 등 마을 중에서 불탄도리가 그곳.
1864년 김정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불도(佛島)
한 어부의 그물에 작은 부처가 걸려 나왔다는.,전설의 고향.
탄도는 원래 참나무가 무성하여
숯을 많이 산출하므로.,탄도(炭島).
그 이전까지는
서해 유인도에서
등대 역활한 한 곳은
선착장 인근 당산 위 당집.
무녀가 거주하는
한칸 남짓한.,당집.
당집에 등잔 불빛이
밤바다 뱃길을 알리는
등대의 역활을 했으리라.
별빛도 없고 달빛도 없는 날에
칠흑 같은 어둠 속 밤바다에서.,
뱃길 잃은 어부에게는.,구원의 빛.
유인등대와 무인등대는
청일전쟁 격전지 중심으로
등대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입파도 부도 도리도 선미도 등.
'안산시'의 섬들은
원래, 육지였던 지역.
서해 바다에 침수하여 생긴 섬들로,
대개, 대륙붕 위에 발달되어 있으며
지질도 대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복잡한 해안과 낮은 수심으로
파고와 파랑이 적어 갯벌이 잘 발달.
겨울에 한랭한 북서계절풍 영향을 받는다.
겨울 -2~8℃, 여름 25℃ 정도의 기온.
동해안 지역보다 기온이 낮은 편이다.
.....................풍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한 섬.
인천광역시 남서쪽 41㎞, 대부도 남서쪽 17㎞.
섬 주위에는 승봉도·대난지도·대이작도 등이 있다.
동경 126°17′, 북위 37°08′,
안산시에서는 44.5㎞ 지점.
면적 1.84㎢이고, 해안선길이는 5.5㎞.
충남 당진군 석문면이 가장 가까운 육지.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여.,풍도(豊島)
1914년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楓)자’.,풍도(楓島).
1914년 부천군 편입되면서부터 현재의.,풍도(豊島).
타원형 섬이며, 해안선이 단조롭고 산지(176m)가 많다.
동북쪽과 서북쪽에
약간 완경사지가 형성.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1월 기온 -2.6℃, 8월 25.7℃, 연강수량 1,541㎜.
본래 남양군 대부면,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에는 옹진군에 이속되었으며
1994년 9월에 경기도 안산시에 편입.
2011년 풍도동 인구는 95세대 169명 거주.
취락은 섬의 동북쪽 해안가에 집중해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02㎢, 임야 1.18㎢.
섬의 주요 농산물로는 쌀·콩·감자·땅콩 등이 생산된다.
조기· 민어·새우·갈치·꽃게 어장.
섬에서는 바지락· 굴 양식이 활발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
인천에서 풍도로 여객선이 운항
풍도에는 은행나무 전설이 전해온다.
661년(신라, 문무왕 1)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돌아가던 중 이 섬에 머물며 심었다고 한다.
소정방이 풍도 경관에 반해 머물렀다고 전해오는 전설.
조선 중기에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한양에서 공주로 파천할 때 심었다는.,전설.
..........................................................
'소정방' 전설은 661년 풍도가
항로 상에 기착점 임을 대변한다.
당진~풍도~덕적도~산동반도 장안.
소정방 14만 대군이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 정벌 후, '귀향지' 풍도.
'인조' 전설은 1624년(인조 2) 1월~2월 15일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한양에서 공주로 파천할때
풍도까지 배를 타고 들어왔던 항로였음을 대변한다.
조선 역사 상에서 국내의 반란으로
왕이 도성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
집권층, 백성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내란.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이괄 등의 수급(首級)이
공주 행재(行在)에 이른 뒤
인조는 2월 22일 한양으로 환도.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 아들 윤(潤) 등이
후금으로 가서 국내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후,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병자호란.
청 태종이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나간 항로 기착점.,풍도.
그로부터, 풍도는 청 함대와 군사가 주둔한 곳이 아닐까?
동아시아 해상 패권장악을 위한 요충지.,풍도.
청인들이 망을 보던 산이라 하여 호망산(胡望山).
후대로 오면서 변음이 되어 후망산이 되었다고 한다.
풍도 곳곳에는 아직도 중국어 지명 흔적들.
'북배, 북배딴목, 목금이, 호망산(胡望山) 등.'
풍도앞바다는
아득한 옛날에
'서해.,덕적군도'
창조여신 망구할매가
헤엄쳤다는.,전설의 고향.
'서해바다 창조여신' 망구할매는 큰 거인.
서해를 걸어다녀도 바다가 무릎에 잠길 정도.
망구할매는 바다를 걸어 이섬 저섬 다녔다고 한다.
망구할매가 '풍도골'로 가서 헤엄치며 놀았는데,
밑 터진 단속곳 고쟁이 속에 새우가 가득찼다는 곳.
망구할매가 고쟁이 속 새우를 풀었다는 곳.,덕적군도.
.
'선단여'는 '망구할매'가
오줌 눌때.,봇돌이었던 곳.
선단여 오줌이 바다물이 되어
서해 섬들이 되었다는.,덕적군도.
그로부터, 덕적군도에 새우가 들고
서해 바다물이 짜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한강 마포나루에서
덕적군도를 오가던 새우젓 배들.
기나 긴 뱃길에서 새우젓이 된걸까?
조선 후기까지 마포나루는
서강에서 대표적인 나루터.
한강 서쪽 서강에는.,서호(西湖)
한강 동쪽 동강에는.,동호(東湖)
바다호수에 갈매기가 날았다는 곳.
현재, 동호대교 건너 압구정(鴨鷗亭).
동호에 청동오리와 갈매기가 날던 곳.
마포나루에서 덕적군도는.,머나 먼 뱃길.
.........................
.........................
망구할매 전설에 의하면.
풍도는 섬이 아닌.,풍도골.
섬 형태 육계도였던 곳 같다.
'육계사주 발달로
육지와 연결된.,섬.'
그후, 풍도골은 큰물길에 패여
아산만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듯.
큰물길을 따라 바람도 강했을.,풍도.
.
풍도해역은
인천앞바다에서는
수심이 가장 깊은.,큰물길.
옛부터 큰배들의 항로.,풍도해역
'고려 말, ~조선'시대 군함,조운선.
'개성· 인천· 아산만'으로 갈 때.,항로.
고구려에서 남하한 소서노가 요충지로 여긴 곳.
백제 개국 초., 소이작도 대이작도 & 아산만 풍도.
몇년 전부터 야생화 천국으로 입소문 난.,풍도.
봄이면, 야생화 천국, 달래, 두릅 등 봄나물 산지.
초여름에는 더덕이며, 둥글레 등 약초가 많다는 섬.
특히 봄이면 노란 복수초가 무리지어 피어나고
노루귀, 변산 바람꽃, 꿩의 바람꽃, 대극, 중의무릇.
야생화가 지천이라 야생화 동호회에서 많이 찾는 섬.
풍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바람과 파도가 매우 강한 외딴 섬이다.
섬에는 이름과 달리 풍족한 것이 없는 편.
섬에는 야생화 군락지가 많아
풍도를 풍족하게 만드는 정도.
.
논은 아예 없고 밭이 조금 있는 정도.
풍족한게 있다면, 새까만 돌맹이들 뿐.
선착장 돌들과 담장들을 보면, 수석 산지.
풍도(豊島)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인천항 또는 안산 방아머리선착장' 여객선 이용.
최근, 충남에서처럼 낚싯배를 빌려.,단체여행 방법.
바다낚시 명소로 많이 알려진., 풍도.
백팩킹 동호인들이 즐겨찾는.,외딴 섬.
입소문을 타고 차츰 널리 알려지고 있다.
2016년 1월 25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생활용수 제한급수 주민불편' 완전해소.
안산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여객선 타고 1시간30분.
'면적 1.84㎢, 해안선길이 5㎞' 풍도를 만날 수 있다.
선착장에 도착하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섬마을 풍경.
풍도 섬마을에서
처음 보이는 건물은
1933년 일제 때, 문을 연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
그러나, 풍도분교는
학생 4명에 불과하다.
80년 넘는 역사를 품고있는 풍도분교.
일제강점기에는 어린이가 많았던걸까?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여.,풍도(豊島)
'1894~1895' 청일전쟁 시발점 풍도해전 격전지.
1914년 이전에는 ‘단풍나무 풍(楓)자’.,풍도(楓島).
1914년 부천군 편입되면서부터 현재의.,풍도(豊島).
풍도분교 지나, 물고기와 문어, 조개 등이
그려진 담벼락과 의자, 나이 지긋한 섬 주민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가고 고령화된.,섬 주민들.
대부파출소 풍도분소,
한전 풍도내연발전소,
풍도반석교회 등이 있다.
해안선 따라 슈퍼마켓, 통닭집, 민박집 등.
작은 섬이라 항상 영업하는지는 장담을 못한다.
마을 지나, 당산 초입에 수령 500년 은행나무 2그루.
옛 뱃사람들은 멀리서 섬의 은행나무를 보고
'풍도인 것을 알아 뱃길을 잡았다.'고 전해온다.
선착장과 마을 뒤편, 은행나무가 섬의 '랜드 마크'.
섬 동쪽 6㎞ 거리에 말육도, 종육도, 육도, 중육도,
미육도 등 규모가 작은 섬이 남북으로 줄지어 있다.
마치, 풍도가 그들 섬과 이어진 육지였음을 말하는듯.
풍도 은행나무 두 거목은
풍도해역 항로를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활을 한 것 같다.
즉, 풍도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들은
풍도해역이 고대 한중 직통항로 상에서
기착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대변한다.
당진 풍도~ 울도해역 ~덕적도(중간 기착접)
덕적도~ 선미도 해역~ 산동반도 or 요동반도.
'1894~1895' 청일전쟁 당시 최종기착점.,요동반도.
한편, 풍도는 역사 상,
태평양 함대 전진기지로서
외국 주둔군이 여러차례 바뀐 곳.
당나라 소정방 주둔군을 비롯,
청일전쟁 전까지는 청나라 주둔군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 제국 주둔군.
한국전쟁 당시에는 맥아더 함대 주둔군.
그 중에서 청나라 주둔군 흔적이 많은.,풍도.
풍도의 곳곳마다 중국어 지명들이 유난히 많다.
'1636년 병자호란~1894년 풍도해전' 흔적 아닐까?
풍도는 풍도리(豊島里)에서 풍도동이 되었는데,
풍도리는 풍도에서 따왔으며 '고려~조선'시대까지
풍도(楓島)였다가 1909년 대부도에 속한 풍도(豊島).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속한 법정동.,풍도동.
풍도동에서 가장 큰 섬인 풍도에 후망산(175m).
섬 전체가 복수초· 노루귀· 변산바람꽃· 중의무릇·
꿩의바람꽃· 붉은대극· 산자고 등의 야생화 군락지.
수령 약500년 은행나무를 지나면
풍도의 '야생화 군락지'가 펼쳐진다.
후망산 정상 일대를 포함한 당산 일대.
특히, 선착장과 마을을 지나
풍도 섬 주민들이 '당산'이라고
부르는 곳의 야생화 군락지가 유명.
야생화는 화전민이 밭을 일군 흔적.
당산은 예전에 주민이 살았던 곳 같다.
언제부터 야생화 군락지로 변한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봄에 피는 야생화는
제비꽃 등을 포함해 일명 "오랑케꽃."
봄이면, 오랑케 침략 수탈이 잦았던 탓.
해마다, 봄이 오면,
처녀들이 남장을 하고도
얼굴에 숫검댕이로 칠할 정도.
"보리 문둥이 가스나들.".
경상도 방언이 대표 사례.
보리가 익을 무렵에는
조선시대 양반가 규수들이
정절을 지키려 문동(文童) 차림.
남장을 하고 갓쓰고 다녔다는 뜻말.
하여, 봄이오면, 오랑케가 겁났던 민초들.
봄에 피는 풀꽃을 오랑케꽃이라 불렀던 것.
그래서, 민초의 애환이 가득 담긴.,풀꽃 꽃말.
옛날에는 '풀꽃'이라 불렀지만
오늘날에는 '야생화'라 부른다.
은행나무 지나 당산을 오르면.,야생화 천국.
섬에 하얀 소금을 뿌려놓은듯한.,풍도바람꽃.
'비밀스러운 사랑' 꽃말이 담긴.,홀애비 바람꽃.
꽃대 하나에 오직 꽃한송이 만 피어.,홀아비.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갸날픈 꽃대.,바람꽃.
풍도바람꽃, 홀애비바람꽃, '너도바람꽃'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 변종' 풍도바람꽃은 일찌기 핀다.
3월 초순이면, 비바람이 불어도 꽃을 볼 수 있고
변산바람꽃보다 꽃봉오리가 조금 더 큰 모습이다.
노란색 꽃잎이
인상적인 복수초.
복수초는 찬 비바람 속에서는
꽃잎을 닫고 움추리고 있지만.,
비구름이 걷히고 햇살을 받으면
노란 꽃잎을 열고 속살을 드러낸다.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노란 꽃잎들.
활짝 핀 복수초꽃은 바다를 바라다본다.
'호망산 남동쪽 자락' 당산 복수초 군락지.
복수초 꽃말은
영원한 행복.
슬픈 사랑.
봄이 되어 눈이 녹기 시작하면 꽃을 피운다.
북쪽에서는 눈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 눈색이꽃.
중국에서는 눈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이라 하여 설연.
이른 봄 노랗게 피어 꽃이 기쁨을 준다고 하여 복수초.
봄이면, 산기슭 여기저기 땅바닥에 엎드려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아가는 관광객의 모습.
계속 올라가면, 붉은색이 멋들어진.,풍도대극.
풍도대극 꽃말은.,'믿음, 기다림, 덧없는 사랑.'
1949년 식물명감(박만규 著)에 기재된.,야생화.
30년 전부터 '야생화 군락지' 풍도에 반해
매년 풍도를 찾는 야생화 매니아들도 있다.
그로부터, 풍도가 각광을 받게 된 것 아닐까?
봄나물 캐는 아가씨를 닮은.,풍도대극.
술잔 같은 꽃싸개잎 안에는., 수술 5개.
그리고, 암술 1개가 배열되어 있는.,자태.
풍도 야생화 초원에는
흑염소의 배설물들이 많다.
인근 흑염소방목장 때문일까?
'척박한 풍도' 섬주민들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된다는.,염소, 약초. 야생화.
원래, 후망산 이곳 일대는 마을 터였던듯.
전국 어디나 야생화 군락지는
대부분 옛 주민들이 살았던 흔적.
야생화는 밭을 일군 흔적이기 때문.
풍도는 섬 전체가 야생화 군락지.
야생화 군락지 반대편, 북배 쪽으로 가면 청일해전 당시
'풍도해역의 시신들을 주민들이 묻었다.'는 수백기 무덤군.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듯, 황토색 무덤과 온갖 잡초들로 가득.
몇몇 무덤은 나무가 무덤을 뚫고 자랐을 정도.
주민들이 조상을 모신 무덤들도 몇 기 있겠지만
대부분 청나라 군인들 시신을 묻은.,주인 없는 무덤.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준비할 장소로 사용될 수 있으며
중국에서도 역사적인 장소가 될 수 있는 곳.'
지금이라도 발굴 및 고증 작업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을 밝혀내야 할.,유적지.
........................
2015. 12.6~7. 일정
풍도(豊島) 가는 길.
..........................
시화방조제 끝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여객선 타고.,풍도 가는 길.
서해누리호.,여객선.
인천항 09시 30분 출항.
방아머리 10시 30분 경유.
'풍도 & 육도' 2시간 반 소요.
1일1회 운항.,소형 여객선.
날씨에 따라 수시로 운항 중단
운행여부를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구봉도 지나, 영흥대교 지나
바다 위에 설치된 철탑들을 지나
영흥화력발전소 굴뚝 연기를 보면서
그 곁의 풍력발전소 풍차들을 지나가면
풍도해역에 들어선 여객선은 풍도로 접근 중.
선착장이 눈앞에 보이고
그 뒤로 마을 풍경도 보인다.
풍도(豊島)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당진팔경 중., 8경 '풍도요망' 풍도(豊島)
'천광수색'과 어루러진 단풍이 절경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 고종 재위 때 '단풍 楓. 섬 島'.,풍도(楓島).
1914년 일제 때, 부천군 편입 후에는 '풍년 豊.,풍도
풍요를 염원하는 섬주민들 뜻이 반영되었다는.,지명.
풍신수길(豊臣秀吉) 이름 첫글자 '豊' 字를 따서.,豊島.
안산시에서는 '단풍 楓'으로 바꾸려고 하였으나
삼국시대 전부터 풍요롭고 유서 깊은 곳이었기에
섬 주민들은 '풍년 豊'이 좋다고 하여.,풍도(豊島).
대부도 남서쪽으로 24㎞ 떨어져 있는 풍도
동경 126°17′, 북위 37°08′, 면적은 1.84㎢이고,
해안선길이는 5.5㎞에 불과한 조그마한 섬이다.
섬 동쪽에 위치한 마을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영흥도 화력발전소 수증기와 풍차.
우측에 서산대산산업단지 굴뚝 연기가 보인다.
동쪽으로는., 육도
서쪽으로는.,승봉도
남쪽으로는., 난지도.
1874년 7월 25일 청 함대가 격침된 풍도 해역
고종의 요청에 의해 동학군의 한양 진출을 막으려고
아산만으로 가던 중 일본 함대에 의해 격침된.,풍도해전.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승리 후,
전승비를 풍도의 후망산 정상에 설치.
"서해에서는 풍도, 동해에서는 독도"라며
일본은 러일전쟁 후 자국에 편입시킨.,독도.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맨 처음으로 점거한 군사 요충지.,풍도.
고종실록에 보면 1866년 병인양요 당시,
1871년 신미양요 당시에도 풍도 해상에서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풍도는 현대사 중심에 있던 곳이었다.
661년(신라 문무왕 1년)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로 귀환 도중에 풍도 경치에 반하여 머물렀던 곳.
서해 섬들 중에서 풍도가 역사의 주역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풍도앞바다 항로는
대형 선박이 다닐 만큼.,큰물길.
서해안 대부분 섬들이 수심이 얕은데 비해
풍도앞바다는 조수차에 불구하고 깊은 수심.
커다란 선박이나 전함이 언제나 지나갈 수 있고
정박할 수 있는 서해 항로의 전략적 요충지인 때문.
반면, 중국 해안은
수십 해리를 나가도
평균 수심이 30m 미만.
1시간 당,
1 해리(1,852m)
선박 속력.,1 노트.
중국 황해 해안 항구에서
대형 함대가 정박할만한 항구는
요동반도 여순(상하이)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중국 해안가는 지형 상으로
큰배나 속도가 빠른 배가 다닐 수 없다.
해운업, 조선업이 발달하기 어려운 환경.
중국이 역사 상으로
해금정책을 펼친 이유는
해양 국제경쟁력이 없기 때문.
중국은 육로 실크로드 만 고수하다가.,패망.
해상 실크로드 무역 경쟁력에서 뒤쳐진 때문.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곧 세계를 지배한다.'
2015년 12월, 중국의 조선업이
한국의 조선업을 위협하고 있지만
1995~2015년 한국 조선업은 세계 1위.
2016년 현재, 한국 조선업은 불황의 위기.
해양정책 활성화로 내수를 늘려야만 할 시점.
수도권 도서지역을 관광자원화 할 시점 아닐까?
아울러, 남북 분단 대치상황에서
해군 함대를 보다 강화해야 할 시점.
역사 상, 풍도해전은 그 교훈이 되는 곳.
풍도해전 & 인천상륙작전.
오늘날, 인천국제무역항이 동아시아에서
부각되는 이유는.,풍도해역 '큰물길' 때문.
동아시아 태평양 전진기지 요충지.,풍도해역.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 요충지.,풍도해역.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을 잇는.,황해 큰물길.
대한민국 미래는 풍도해역 큰물길이 있어 밝다.
현재, 한국의 국력.
전세계 순위는.,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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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풍도는 서해 수많은 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채석장 흔적이 방치된채여서 더욱 더 초라해 보인다.
예전에는 낚시 애호가들이나 찾는 섬에 불과하였던 풍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팩킹 명소 '북배' &
봄에는 야생화 천국.,풍도.
첫째날 일정은 선착장 인근 민막 숙소 - 풍도등대 -
당(제)집 - 모금이- 은행나무 - 야생화군락지 - 후망산 -
군부대앞 - 북배 - 폐채석장 - 마을 민박 숙소로 원점회귀.
여름철에 우거졌던 찔레덩굴과 가시나무.
칡넝굴을 헤치고 길 찾으며 가야할.,몇군데.
갈 수 없는 섬 남쪽을 제외하면 거의 보는 셈.
오르막 계단길 따라 풍도등대 가는 길.
풍도등대부터 당제집 가는 길은 아예 없다.
찔레가시덩굴와 가시나무를 헤치고
두릅나무 사이를 지나며 올라왔던 산길.
12월 초순이라 뱀 걱정 없는.,길이 아닌 길' .
등대에서 올라오면 만나는.,'목금이' 가는 길.
목금이 가는 길에 뱀처럼 또아리 튼채 죽은 나무.
살아있는 나무 하나를 칭칭 감았다가 죽은.,고사목.
또아리 고사목에 감긴 나무는
여전히 싱싱하게 잘 살고 있다.
'목금이' 폐가가 을씨년스럽다
아직도 구지뽕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
목금이에서 되돌아나오는 길에 두릎나무밭.
풍도에는 드릎나무가 유난히 많다.
'어수거목' 은행나무 밑둥 아래.,샘터.
조선 중기 인조가 심었다는 전설의 고향.
661년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갈 때
심었다고 전해오는.,전설 속 은행나무.
소정방이 이곳에 들러 샘물은 마셨던걸까?
조선 중기에는 인조가 '이괄의 난' 당시
한양에서 공주로 파천할 때 심었다는 전설.
피난길 도중에 나무를 심을 겨를이 있었을까?
인조는 구데타로 광해군 정권을 뒤집고 즉위했지만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도 명나라 공인을 받지 못했고
조정 신료들은 물론 구데타 공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왕.
인조는 '이괄의 난' 때 한양 도성을 등졌기에
파천길 백성들에게도 가는 곳마다 괄세받던 왕.
그러나, 파천길 그를 따듯하게 품어준 지역은 안산.
조선시대 역사 상에서 파천길에
안산 외딴 섬까지 온 유일한 왕이라
풍도 주민들이 감격하여 환영했던 것.
풍도 은행나무.,인조의 '어수거목' 전설.
'인조' 전설은 1624년(인조 2) 1월~2월 15일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한양에서 공주로 파천할때
이곳에 들러 샘물을 마실때, 왕의 손이 닿았다는 뜻.
'어수거목(御手巨木)'은 왕의 손이 닿은.,거목.
현재, 약 500년 수령 은행나무 거목이긴 하지만
당시에도, 수령이 백년 넘었을 거목으로 여겨진다.
원래, 인조는 왕이 되어서는 안될,
군주의 자질이 부족했던 인물 아닐까?
인조에게는 과분한.,풍도 은행나무 전설.
풍도 은행나무 전설은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풍도해역은 경기만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이었기에
기록 상, 사실과 다른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풍도 은행나무 전설은
500년 거목 수령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이곳 은행나무는
섬 주민들을 수호하는
수호목이자 '당산목(堂山木).
약 500년 전, 이곳은
당집 터인듯 추정된다.
'1592~1598년' 임진왜란 7년전쟁 이전까지는
조선시대 해금정책 공도령으로 폐허화 된.,섬.
그 무렵, 풍도 당집 무녀도 이곳을 떠났으리라.
임진왜란 이후 공도령이 풀려,
옛주민들이 돌아와 거주했지만
당집 무녀는 돌아오지 않았던걸까?
풍도 주민들은 11월 초순이 되면
굴과 바지락 등을 채취하기 위하여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도리도'로 이주.
그때는 학교, 교회, 가축까지 함께 옮겼다가
이듬해, 구정 전에야 돌아오는 독특한 생활 방식.
주민들이 길게는 일년의 절반이나 섬을 비워둔 풍도.
풍도 섬 주민들이 1세기 가까이
철새처럼 겨울나기를 한.,도리도
그래서, 풍도 당집의 무녀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환경.
풍도 주민들은 도리도 토굴 속에서 지내거나
군대 막사 같은 임시 거처에서 겨울을 지냈단다.
"그때는 너나 없이 가난했지만, 참 고생스러웠어."
식수와 나무가 없는 바위섬이고 무인도이기에
땔감 이부자리까지 배에 가득 싣고 건너다닌 것.
고깃배 소유한 주민은 5가구가 채 안되었던 시절.
'60가구 160 명 주민이
무인도에서.,겨울나기.'
1982년 풍도 섬주민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다큐멘타리 방송을 본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무인도인 도리도에 집 한채씩 지어 주기도 했다.
................도리도(桃李島).................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 산144번지.
소리도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면적 2만 9455㎡이며, 육지에서 약 5.5km.
본래 이 섬은 서쪽으로 19km 떨어진 풍도 주민들이
20세기 초부터 100년 동안 매년 11월에 집단으로 옮겨와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인근 갯벌에서 굴과 바지락을 캐던 곳.
그러나, 시화· 화옹· 구봉지구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조류가 바뀌면서 서신면 송교리 동죽 갯벌 수백만평이
`조개 무덤'이 되자 1999년 어민들이 어업연고권을 주장.
법적 분쟁이 일어났으나 2006년 대법원 판결로
풍도 주민은 도리도 어업행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도리도는 동서 방향으로 긴 모양이다.
동쪽 해안에는 해빈이 발달해 있는데,
사취가 5m의 폭으로 1.5km 가량 형성.
서쪽 해안은 20m 높이의 해식애로 되어 있다.
섬은 엽리 구조 호상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조사에서는 총 66종의 식물을 확인하였다.
소나무와 곰솔 등 침엽수가 우세하며, 칡 군락.
무척추동물 고랑따개비가 우점종, 해조류는 없다.
....................................................................
'도리도'
풍도 주민들의
겨울나기 옛 삶터.
2006년 대법원 판결이 난 이후에
당산의 주민들이 풍도를 떠난걸까?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병자호란.
그당시, 조선의 수많은 인질과 포로를 끌고 간 청군.
'풍도 ~산동반도 장안' 직통항로도 한몫 하였으리라.
풍도해전때 일본과 청나라 군함이 아산만에서 교전할 때
청나라 군사들이 망을 보던 산이라고 하여 호망산(胡望山).
후대로 내려오며 변음이 되어 현재 후망산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전승비를 세웠다는 후망산 정상.
전승비 터는 사라지고 중계탑이 솟아있다.
후망산 정상에서 군부대가 있는 큰길로 내려오면
섬 북쪽 북배로 내려가는 급경사 소로길이 지름길.
그러나, 급경사를 조금 내려오다 보면 길이 사라진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다보니
온통 찔레가시넝쿨과 칡줄기 등
수풀로 덮여 길이 없어 진 것이다
민박집에서 가르쳐준대로
계곡 쪽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더욱 울창한 가시넝쿨들이 발목 잡는다
한참 내려오니, 폐채석장 꼭대기 절벽 방향.
10년전 채석장이 들어선 후, 길이 끊긴듯.
절벽 끝이 가로 막아, 내려가는 길이 없다.
이곳은 옛주민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으리라.
다시, 계곡을 가로질러
반대편 능선으로 올라가서야
하산길을 찾았지만, 힘든 내리막길.
북배로 내려와 잠시 쉬며
백패커 기분을 느껴 본다.
황혼녁 바다 햇살과 붉은 노을
밤하늘 별빛 아래 풀벌레 울음소리.
렌턴 아래서의 라면 맛, 고독 자유 등.
밀물이 들어와 바다길이 끊긴.,북배딴목.
그들을 등뒤에 남겨두고
폐채석장 앞 자갈해변을 거쳐
선착장마을 민박 숙소로 돌아온다.
어두워지면, 갈 곳이 마땅치 않은.,작고 험한 섬.
선착장 지나 발전소까지 다녀와도.,저녁 7시 50분.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로 하고 바로 취침에 들어간다.
둘째날 일정은 '북배, 북배딴목'을 다시 다녀와
숙소 - 마을 - 은행나무 - 후망산 정상 - 군부대
- 콩크리트 도로 - 마을 - 선착장으로 잡았다.
'붉은바위' '붉바위'에서 유래된 지명.,북배.
북배'는 길게 뻗어 있는 붉은 바위라는.,뜻말.
푸른 바다와 붉은 바위들이 만나 빚은 절경지.
북배 좌측에 위치한 '북배딴목'은
썰물때 등대까지 가는 길이 열린다
밀물때 풍도 안 또 다른 섬.,북배딴목.
'딴목'에서
'딴'은 '외딴' 또는
'떨어진'의 뜻말이다.
'목'은 목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뜻말.
가늘게 이어진 외딴 섬.,북배딴목.
북배 앞바다에는 큰배들이 유유히 다닌다
풍도해역이 큰물길 항로 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 썰물 때라 들어가는 길이 열린.,북배딴목.
북배에서 해안으로 내려와
갯바위를 넘어가는 험한 길.
밀물에 짐겼던 갯바위들에는
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풍경.
'북배딴목' 등대
유난히 붉은 바위.
등대 주변 바위는 피빛처럼 붉다.
풍도해전에서 죽어간 청나라 군사들.
백년세월 넘게 피맺힌 한으로 남은걸까?
머리를 물에 잠그고 있는
악어 모양의 북배 앞바다는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 풍경.
북배에는 군데군데 텐트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북배머리 평평한 곳은 물론, 바위사이 움푹한 곳.
북배딴목에도 등대로 오르기 직전에 명당자리 하나.
북배딴목에서 갯바위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택한 산길.
만약에 물이 들어와 갯바위로 가기 어려울 때는
비상 탈출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산길 초입에는 길이 있는듯 보였지만.,가시덩쿨 숲속.
폐채석장 앞 몽돌해변은
몽돌인지 자갈인지.,애매모호.
풍도에는 뻘밭, 모래해변이 없다
섬 변 해역의 바다가 워낙 깊기 때문에
모래나 뻘이 해안까지 밀려오지 못하는 탓.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챙겼다
마을 지나 다시 후망산을 오른 후
선착장으로 바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큰여뿔 산책로>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곳.,글귀.
방파제에는 풍도이야기가 적혀있다.
큰여뿔 산책로 돌아서면, 곧 마을.
마을 앞에는 민박집들이 모여 있다.
마을 담벼락에는 물고기 그림.,벽화.
어제 트럭을 타고 숙소로 갈 때
할머니들이 햇볕아래 앉아 있던 곳
이 길은 마을을 관통해
동무재 거쳐 은행나무와
'목금이'까지 연결이 된다.
<마을 뒷모습>
마을뒤 동무재를 지나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마을
그 뒷모습과 풍도항이.,평온
어제는 야생화 군락지를 따라가다
군락지 끝에서 후망산으로 오르면서
찔레가시덩굴에 고생을 좀 많이 했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닌듯.
오늘은 똑같이 은행나무에서
야생화군락지 산길을 오르니
후망산 정상 가는 길을 찾은 것.
'야생화탐방지안내소'.,뒤편 능선.
선착장에 도착하니 12시 넘었다
마을길 따라 후망산에 올랐다가
군부대앞 지나 선착장까지.,1시간.
어제 함께 들어왔던 노 부부는
선착장 옆 바위에서.,갯바위낚시.
초겨울이라 고기가 잘 물지 않는단다.
풍도를 나갈 배는 12시 30분에 들어왔다.
풍도는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섬과 육지.
풍도는 서해안 섬들과 육지로 둘러쌓인.,섬.
채석장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백팩킹 명소.
'북배'와 노란등대가 있는 '북배딴목'이 있다.
후망산 정상에서 남쪽으로.,조금 가면 군부대.
마을 뒤로 오르면 5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은행나무에서 후망산 쪽으로 오르면 야생화군락지.
선착장에서 우측 해안길 따라가면.,'북배'로 가는 길.
마을 지나 해안길 몇채의 건물을 지나면.,폐 채석장.
채석장 지나 산길 초입에 길게 뻗은.,붉은 바위 '북배'
풍도는 섬 가운데 후망산(175m)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풍도항을 앞에 두고 마을이 자리잡고 있고
서쪽에는 폐 채석장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
청일전쟁 유적지.,풍도.
...............................
'청일전쟁 시발점' 풍도해전은 청.일 해전이라
조선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에서 보듯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뼈아픈 사건이 되었다.
당시, 부패와 안이함으로 정국을 환난 속에 몰아넣고
시대 변화에 적절히 대응 못한.,고종 및 조정의 중신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했지만, 풍도 앞바다는 여전하다.
1894년 7월 25일 새벽.
안산 풍도앞바다에서 일본 해군 제1유격대 소속
‘길야[吉野]’, ‘추진주[秋津州]’, ‘낭속[浪速]’ 등
3척의 쾌속 순양함이 청나라 함대를 만나게 된다.
오전 7시 52분 경
일본군은 먼저 청 함대 ‘제운호’에 포격을 시작 ,
곧이어 공격을 계속하여 약 한시간 반 정도의 전투
청 함대 ‘광을호’는 침몰하고 ‘조강호’는 노획을 당했고
‘제운호’는 부서져 여순항으로 돌아간 청일전쟁의 시발점.
풍도해전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사건이지만
일본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여, 일본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성환, 평양에서 연이어 승리
황해해전(1894. 9.17)에서 청나라 주력 북양함대 격파.
요동반도 진출 후, 중국 여순에서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
요동반도 위해(威海)에서 북양함대를 격멸(1895. 2. 12).
청 북양함대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이 일함대에 항복한다.
일본은 연전연승을 하며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전쟁은 완전 종결.
1894년 청일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한 해였다.
조선후기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과중한 세금 착취로
농민들이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당시 외세마저 입성하게 되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갑오개혁이 시행된 해가 되기도 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곧 이어, 전주를 함락하자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파병한다.
곧이어, 청군은 아산만에 도착해 군사 행동을 시작한다.
한편, 조선 침략의 기회만 엿보던 일본은 청군이 파병을 하자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 구실로 인천, 부산으로 군대를 출병.
조선 정부는 전주화약(全州和約) 이후
농민항쟁이 수그러들어 도움이 필요 없으니
양국의 군대가 모두 철병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
조선 침략을 준비해온 일본이 그냥 물러날 리가 없었다.
졸지에 청일 전쟁터가 된 조선은 전황에 휘말리게 되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피란을 떠나게 되었으며,
부녀자 겁취사건, 곡물과 가축 및 식량 탈취사건,
전쟁 부역 동원 등 전쟁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청일전쟁 승전국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주도로 ‘삼국간섭’이 있게 되자
일본이 조선 내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7월 23일 밤에
총과 대포를 앞세워 경복궁 점령 후 고종 연금.
조선 관군무장을 해제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7월 25일 일본은 풍도해전으로 청 군함 2척을 공격 침몰.
7월 29일 충남 성환(成歡)에서의 첫 육상전투에서 승리.
8월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승리로 청을 조선에서 몰아냈다.
............풍도해전(豊島海戰)................
1894년 조선 충청도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일 함대가 청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사건.
이 해상 전투를 시발점으로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일, 청은 조선 내 다른 세력과 연계하여 개입.
청나라는 조선과의 종주권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일본 역시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내에 넣기를 원했다.
양국은 이미 조선 내에 조선정부 요청으로 군대를 주둔.
6월초 아산만에는 3천 청군(북양군)이 주둔.
아산만을 통해 본국에서 보급을 받고 있었다.
일본의 계획은 청나라 보급로 아산만 입구를 봉쇄,
청군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바다로 증원이 되기 전에
아산만에 주둔한 청나라 북양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북양함대 사령관 중 일부는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인지.
부대를 철군하거나, 아니면 더 북쪽 평양으로 이전하거나,
청나라 북양함대 모두 다 인천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아산만을 순찰하던 제1유격대가
아산만에 병력을 추가수송하려는 청 함대와 해전이라 주장.
1894년 7월 25일 이른아침,
아직 서로 선전포고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7월 19일에 들이댄 5일간의 유예를 둔
최후통첩이 청 측 대답없이 기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돌입했고,
이후 언제 전쟁의 발단이 열리는가만
남은 단계에서 조우했다고 일본 측은 주장.
다만, 청나라와 일본 이외의 영국 등의 제3국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 최후통첩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본 함대는 풍도앞바다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정보함 야에스야마, 순양함 '무사시'를 찾던 중
두줄기 연기를 발견하여 그곳으로 접근하고 보니,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済遠) & 광을(広乙)'이었다.
청 함대도 육군을 태울 예정인 상선 '고승호.'
'고승호'의 호위를 맡았던 '조강호'는 선도역.
'2대 3' 청일 순양함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3000m로 접근한 이후 양측은 서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 측은 청 순양함 제원호가 21cm포를 발포했다 주장
일설에 의하면, 일본 순양함 ‘요시노’가 청 ‘제원’에 먼저 발포.
몇 분간 서로 포격을 나눈 후 오전 7시 50분
매우 안개가 짙어 시계가 좋지 않았던 가운데,
우세한 일본 해군 앞에서 청 군함은 도주를 시작.
방호순양함 아키쓰시마는 ‘광을’(広乙)을 추격했고,
‘요시노’와 ‘나니와’는 더 큰 배인 ‘제원’(済遠)을 쫓았다.
‘광을’은 따라잡힌 결과 좌초되었다.
‘요시노’와 ‘나니와’는 청 ‘제원’을 추격.
국기를 내려 항복했다지만, 도주를 시도.
도주하는 제원을 계속 추적하고 있던 중
청나라 함대와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조강’(操江)과 ‘고승’(高陞)과 마주쳤던 것.
‘나니와’는 새로 나타난 청나라 함대와
입씨름 와중에 ‘제원’은 계속 도주를 했다.
일본 ‘요시노’ 최고 속도는 23노트,
청나라 '제원'은 최고 속도가 15노트.
제원은 능숙하게 갈之자를 그리며.,도주.
도주 중 '제원'은 2문의 21cm포로 포격.
'요시노' 15cm포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요시노가 제원을 2500m까지 추적했을 때,
'제원'은 우현으로 틀어, 얕은 여울로 운항.
‘제원’은 독일제 2,300t순양함, 흘수 4.67m였고,
요시노는 영국제 4,216t, 흘수 5.18m로 더 깊었다.
일군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소장은 추격 중지 명령.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고승’은 전쟁 준비 작전으로
조선 제물포에 청나라 육군 1,100명을 수송 중이었다.
제1유격대 사령관 명령으로
나니와 함장은 고승호에 정선 명령.
고승호 청군은 정선 명령에 불복해 격침.
때 영국인 선원 3명을 구조하고,
약 50명 청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에서 일본 측 사상자와 함선의 손해는.,전무.
청측은 일본 순양함 '제원호' 역시 대파당했다고 주장.
청나라 '순양함 광을호, 상선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포함 조강호'는 나포되어 1965년까지 일측에서 사용.
비슷한 시기에 일군은 성환 전투로 아산만 청군을 격파.
이로써 청일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7일 후인 8월 1일 일본이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영국 국적의 상선 고승호를
일본 함대로부터 격침당한 영국은
일본 측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일본 측은 전시국제법에
따른 것이었다고 영국 측에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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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17일 청일 전쟁 중기.,황해해전(黄海海戦)
일본해군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일명 "압록강 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도 불리운다.
근대적인 장갑함이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전투로
청 해군은 제해권 상실로 무력화되어.,황해해전 패배.
1894년 10월 하순 일본 제1군은 압록강 건너 남만주 진격.
제2군은 요동반도 상륙 후 11월 하순 여순, 다롄(大連) 점령.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 청국의 북양함대기지를 공략하였다.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싼.,청일전쟁
풍도를 청일전쟁 전진기지로 하여 승리한.,일본.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
일본은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권을 확정.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러일전쟁.
일본은 풍도를 거점으로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다.
하여,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승리 후,
풍도의 후망산 정상에 전승비를 설치한 것.
전승비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
그 전승비가 섬 주민들에 의해 뽑혀나가고
내동댕이쳐진 싯점은 8.15 해방 무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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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은 6.25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풍도를 먼저 점령
풍도를 거점으로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다.
한미연합군 및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탈환하자
중공군은 30만 대군 인해전술로 6.25전쟁에 참전
미 함대가 풍도 거점으로 중국 점령을 우려한 때문.
풍도는 비록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큰물길 항로 곁.,전술 전략적 요충지.
세계사 흐름을 뒤바꾼 역사적인 유적지.
중국은 굴욕의 역사를 깊이 새기고 있다.
청일전쟁 때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산둥성
웨이하이 류궁다오(劉公島).,갑오전쟁박물관은
그당시,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거액의 배상금을 내고 대만 등 영토를 빼앗겼고
일본군의 뤼순 점령 때 중국 민간인 2만명이 학살.
청은 류궁다오 함락으로 굴욕적인 패배 이후,
제독 딩루창(丁汝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시관 출구에
적혀있는.,글귀.
.
"갑오전쟁에서 패전한 굴욕적 역사는
'낙후하면 곧, 당하게 된다'는.,도리를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우리는 이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해상 강철 장성(長城)을 구축.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중국의 다짐이 적힌.,글귀.
풍도해전 유적지.,풍도.
'역사의 현장'에는.,폐채석장.
야생화군락지 & 청군 수백기 무덤.
당시, 중국어 지명이 곳곳에 남아 있다.
'후망산~당산'.,야생화 군락지.
1984년 7월25일 풍도해전'전까지는.,
'청나라 주둔군' 거주 지역이 아닐까?
폐채석장 터는 청일 격전장이 아닐까?
청일 간 격전으로 폐허화된듯 추정된다.
'일본 제국'의 조선주둔군.,점령지역 같다.
1933년 일제 때, 문을 연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
현재, 학생 4명에 불과하지만
1930년대에는 학생이 많았을듯..
일제의 서해 어업전진기지였을까?
일제의 태평양전쟁 전진기지였을까?
'1941~1945년' 태평양전쟁.
연합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풍도는 서해의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 역사를 여러차례 좌우한.,유적지.
장차, 우리나라 국운을 좌우할.,전략적 요충지.
'대한민국의 무궁한 미래를 위하여
풍도는 어떻게 쓰여져야 바람직할까?'
최우선, 풍도 주민들이 향후 자손 대대로
꿈과 희망을 갖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애향심을 갖게 되는 섬으로 개발되어야 할듯.
도서지역 섬 주민들은
섬을 지키는 것 만으로도
애국자(愛國者)이기 때문이다.
서해바다.,큰물길 작은물길 항로.
지도에 없는 해저지형, 암초까지도
손바닥 눈금보듯 알고 있는 섬 주민들.
장차, 우리나라 해양정책에서
실질적인 주역이 될.,인적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