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마돈나]는 류덕환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이 작품에서 그는, 빨리 돈을 모아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여자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으로 나온다. 류덕환은 평소보다 살을 찌우고 통통하게 귀여운 남자로 등장해서 빼어난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그 결과 대종상, 청롱영화제,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디렛터스 컷 등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천하장사 마돈나] 이전에도 [웰컴 투 동막골]에서 인민군 소년병으로 나온 류덕환을 눈여겨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8살 때 처음 출연한 MBC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복길이 동생 순길이라고 말하면 기억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혹은 [오남매]에서 머리를 빡빡 밀고 나온 소년의 모습도 기억할지 모른다. 1987년생이니까 이제 그는 스무 살이다. 그가 지금까지 한 것들보다는 앞으로 할 일이 훨씬 더 많은 배우다. 그러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의 역할이 워낙 강렬하게 대중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류덕환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연쇄살인마로 다시 돌아왔다.
[관객들은 [우리동네]의 효이에게서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씨, [공공의 적]의 이성재씨와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연기한 효이가, 지금까지 보여졌던 다른 영화 속의 연쇄살인마 캐릭터와는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범죄는, 범죄 충동을 가진 사람들을 자극해서 또 다른 모방 범죄를 낳는다. [우리동네]는 두 명의 살인마가 한 동네에서 평범한 주민으로 살고 있다는 기본 컨셉으로 시작한다. 알고 보면 살인마이지만, 그들의 범죄가 드러나기 이전까지는 우리들 옆집 아저씨이고 동네 오빠나 형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동네]에는 연쇄살인마와 그의 살인을 모방한 또 다른 살인이 등장하지만, 사이코 스릴러 장르의 기본 패턴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스릴러처럼 과연 진짜 살인마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우리동네]는 마지막까지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마의 신분을 일찍 화면에 노출시킨다. 그 이유는, 뒷 부분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객과의 진정한 싸움은, 살인마가 누구인가 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왜 그 살인마가 자신의 살인을 모방한 또 다른 살인자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가 하는데서 발생한다. [우리동네]가 기존의 스실러 장르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새로움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우리 동네]는 스릴러를 가장한 휴먼드라마다. 누가 범인일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그들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지에 주목하면서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다.]
경주(오만석 분)는 추리작가 지망생이다. 월세가 몇 달치 밀려서 집주인에게 독촉을 받을 정도로 궁상스럽게 살고 있다.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을 써서 출판사에 보여주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살인의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다. 경주의 죽마고우인 재신(오선균 분)은 경주가 살고 있는 동네의 형사반장이다. 그는 이 동네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일어나고 있는 연쇄살인 때문에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다. 이야기의 동선은 경주를 따라 가며 진행된다.
경주는 자기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인사건을 나름대로 추적해본다. 살해된 사람은 모두 여성들이다. 그리고 십자가처럼 두 팔을 끈으로 묶여 어딘가에 매달린 채 주검이 발견된다. 3개월전 첫 살인 대상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소녀였다. 그 다음은 성인 여성이었고 세번째와 네 번째 살인의 공통점은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주는 연쇄살인마가 분명히 자신의 이웃에 살고 있는 이 동네 거주자이고, 그의 최종 목표가 네 번째 살인이었다고 추리한다. 네 번째로 살해된 여성을 죽이기 위해 힘없는 어린 소녀부터 차례로 범행 예행 연습을 해고 세 번째에는 최종 목표와 거의 흡사한 입술에 피어싱을 한 대상자까지 골라 살해한 다음, 최종 목표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추리한다. 그 살인범 효이 역할을 류덕환은 소름끼치게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끝내고 장진 감독의 [아들]을 찍었는데, [천하장사 마돈나]의 오동구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목소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관객들이 이제 더 이상 나에게서 오동구가 아닌, 이 작품 속의 효이만 주목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맡은 효이는 연쇄살인범이기 때문에 극중 인물로 들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효이라는 캐릭터에 어색하지 않게 다가가려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먼저 살인의 도구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촬영 전부터 늘 손에 칼을 들고 다녔다. 잠자기 전까지 칼을 손에 들고 다니다가 잘 때는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잤다. 그래서 집안은 나 때문에 공포분위기였다.]
[우리동네]에서는 그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일찍 드러낸다. 연쇄실인마 효이(류덕환 분)는 동네에서 [어린 왕자]라는 문방구를 경영하고 있는, 착하고 순수하게 생긴 젊은 남자다. 가장 살인마 답지 않게 생긴 외모를 가진 그는, 기르던 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죽여서 요리해 먹는 비정함을 관객들에게 일찍 보여준다. 이제 관객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발생한다. 빚 독촉을 하는 주인집 여자를 경주가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우리동네]는 살인을 저지른 경주가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연쇄살인마의 살인을 흉내내면서 두 살인범의 팽팽한 심리대결로 전개된다.
그러나 [우리동네]에는 복선이 하나 더 숨어 있다. 사건 해결을 책임진 그 동네 형사반장이다. 연쇄살인마 효이와 충동적 살인을 저지른 뒤 연쇄살인마의 범죄를 모방해서 자신의 살인을 은폐하려는 경주를 이미 노출시킨 [우리동네]의 이야기는, 형사반장 재신의 과거 이야기를 슬쩍 풀어놓는다. 그래서 현재의 살인사건 뒤에 숨어 있는 과거의 살인사건을 등장시킴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과거와 현재의 살인은 시간을 달리하지만 그 동네에서 일어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류덕환은 [우리동네]에서 몇 번의 노출씬을 찍었다. 상반신 공개는 물론 전라의 뒷모습까지 드러난다. 그의 몸매는 단단하고 근육질이었다. 국민남동생으로 불릴만큼 부드럽고 순하며 따뜻한 예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류덕환에게는 영광이었으면서도 동시에 족쇄가 되었던 [천하장사 마돈나]의 오동구에서 이제 그는 완벽하게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몸에 대한 질문을 항상 받는다. [아들]을 찍을 때는 몸이 참 곱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몸이 참 탄탄하다라고 많은 분들이 얘기한다. 나도 화면을 보고 내 몸에 대해 놀랐다. 실제로 내 몸이 화면에 보인 것과 똑같지는 않다. 효이가 살인마지만 한 인간이고 우리동네 이웃에 사는 그런 사람으로 비쳐졌으면 좋겠다.]
[우리동네]는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세 남자 사이에 얽혀 있는 과거의 상처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이야기는 단순한 스릴러를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내러티브를 외형적으로 끌고 가는 사람은 경주 역의 오만석이지만, 내면적으로 사건을 조종하는 사람은 연쇄살인마 효이 역의 류덕환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이 보여준 창백한 사이코 못지 않은 충격을 류덕환은 보여준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성전환을 꿈꾸는 청년이나 [아들]의 부드럽고 따듯한 이미지에서 극단적으로 변신한 류덕환의 사이코 연기는, [우리동네]에 강렬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류덕환은 자료에 의하면 167센티미터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만나보면 그것보다 더 작다는 느낌이 든다. 키에 대한 그의 컴플렉스를 시원하게 날려준 사람은 배우 신하균이었다. [외국배우도 다 작아. 알 파치노도 작고, 잭 니콜슨도 작아. 절대 꿀리지 마. 키를 생각하면 한없이 작아지고 연기를 생각하면 한없이 커질 거야] 그 이후 그는 기죽지 않고 롱다리와 꽃미남 천지인 배우들 속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 이제 류덕환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소년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영화 속의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훌쩍 성장했고, 한국 영화계의 차세대 남자 배우로 우뚝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