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문학 ---------------------------------------------------------
한 송이 꽃잎이었다 / 운문분과 류일화
1. 나의 삶은 꽃으로 은유되고, 꽃으로 상징된 한 송이 꽃
뒤꼍 울타리에 노란 개나리꽃이 필 때쯤, 앞산 진달래가 분홍빛을 가져올 때쯤, 경기도 양평에서 봄꽃 피는 날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빠 둘에 여자아이가 처음이어서 반가웠는지, 아니면 꽃을 좋아해서인지 류일화(一花)로 지었다. 이름처럼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일화, 일화” 수없이 듣고 자란 이름 때문이었을까? 꽃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설렜다. 온갖 들꽃이 피어나는 봄이면 동네 친구들과 야산에 모여서 한 아름 꽃을 따고, 먹으며, 웃으며, 꽃 모꼬지로 마냥 들뜨고 행복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교장 선생님이 6학년 여학생들에게 “꽃 이름”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보랏빛 청초한 꽃 <아이리스>였다. 친구들은 본명 대신 꽃 이름을 서로 불러주며 향기 나는 낭만을 우정이라 생각했다. 그 친구들이 와락 보고 싶어지는 것은 꽃 같은 이유일 것이다. 오십이 넘은 어느 날 내가 꽃차 소믈리에가 된 연유도 꽃 이름과 연이 닿아있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나의 삶은 온통 꽃으로 은유되고 꽃으로 상징된다. 이처럼 환희도 후회도 아픔도 송이송이 꽃으로 피워낸 삶의사계절, 그 바람결에 흔들리는 한 송이 꽃잎이었다.
꽃잎은 늘 나를, 생각해준다
기쁠 때나 행복할 때나 힘들 때나
곁에서 色을 입혀준다
꽃잎은 늘 나를, 사모한다
꽃빛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에 수혈된 색깔 대로 피어나는 한 송이 꽃
투정이라도 부리는 날엔
살빛 안으로 들어왔다가 살그래 나간다.
애인 같다고 할까?
저기 저 꽃잎의 붉은 입술을
초록 가슴을 깊게 안아본다
아~! 꽃잎과 연결된 심장 소리가 화사하다
세 번째 시집에 있는 詩 한 편을 여기에 가져와 본다.
사람들의
미소가 보고 싶은 날
꽃들은
오색의 눈을 뜬다
류일화 제3 시집 [한 송이 꽃잎이었다] -<개화> 전문
2. 유년 시절의 오감 놀이
갑자기 겨드랑이가 나를 간지럽게 한다. 개구리는 “개굴개굴”, 까치는 “깍깍”, 나는 “일화일
화”라고 울어야 한다. 이렇게 울었던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맨발이었다. 검정 고무신을 하늘거리는 꽃다지 옆에 노랗게 벗어 놓고, 봄 바닥을 걸어 보았던 그날의 기억은 화석이 되어 가슴에 여러 질감으로 찍혔다.
암소가 등에 멍에를 얹고 쟁기로 갈아놓은 촉촉한 고랑과 이랑을 맨발로 걷는 느낌, 나의 작은 주먹 안에서 꿈틀거리는 땅강아지의 장난과 봄바람에 까르르 웃고 있는 냉이꽃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진흙 속에서 촉촉한 童詩한 편을 이리저리 밟아보는 경험이었다. 미끈거리는 발바닥 간질간질 넘어질 것 같기도 하고 버들가지가 춤을 추듯 양팔을 벌려 균형을 맞추며 논바닥에 발가락 판화를 찍는다. 개구리알 여러 개가 뭉쳐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웅덩이를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봄빛이 손끝을 타고 아늑하고 고요한 자궁 속까지 따라 들어온다.
하얀 냉이꽃
쟁기 사이로 뒤집어지면
물젖은 논흙
아버지 종아리에 "다다닥" 뛰어올라 붙는다
누런 황소는
풀잎 냄새에 촉촉해진 코를 벌렁거리고
먼 산의 비둘기는 "구구구'
봄빛 우려낸 논 웅덩이 개구리는 만삭의 몸을 풀어낸다
까만 씨앗으로
이야기처럼 차곡차곡 갈아엎어 놓은 두럭마다
바람 걸친 봄 햇살에
땅강아지만큼씩 말라가는 쟁기의 휴식
마른 색으로 바삭거린다
해마다 새봄이 돌아오면
기억의 실 줄을 풀어
뿔뿔이 흩어지는 유년 시절을 묶어본다
류일화 제2 시집 [바다를 끌고 간다 ] -<유년의 기억> 부분
몸으로 기억된 五感은 영혼과 감성을 말랑거리게 하는 메시지로 가득하다. 어린 시절 맨발로
밟았던 촉촉하고 만질만질 했던 논흙, 잠자던 감성을 흔들어 주었다. 곧 바람이 불고, 물이 오르고 새싹이 돋고 봄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엄마 따라 산 아래 마늘밭에서 듣던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아버지의 음성을 재생하는 음표가 되었고, 연둣빛 풀잎은 그리움을 돋게 하여 봄이 되면 자꾸만 첫사랑을 초록으로 덧칠한다.
3. 부르는 입 모양이 가장 아름다운 꽃 "엄마"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운 최초의 단어가 엄마다. 부르는 입 모양이 꽃이다 활짝 핀.
우주가 담기는 소리 엄마! 엄마! 엄마!
엄마도 나에게는 커다란 우주였다. 초등학교 2학년 동시를 써서 담임 선생님께 칭찬받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드렸다. “일화는 시인이 되겠어”라는 한마디가 詩人의 씨앗이 되고 싹이 되었는지 모른다.
부르는
입 모양이
가장 아름다운 꽃
엄마
류일화 제2 시집 [바다를 끌고 간다] -<엄마> 전문
2019 지하철 승강장 안전문 게시용 시민 창작시 공모전 당선작 (수락산역, 강남역, 여의나루역)
해마다 엄마의 텃밭에는 메밀꽃이 파도 꽃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피었다.
나는 여학생이 되었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을 때 둥근 달빛이 슬그머니 창가로 들어와 앉았다.
엄마의 웃음소리에 메밀꽃 활짝 핀다. 바람이 지나간다. 나도 엄마처럼 메밀꽃을 좋아한다.
엄마 텃밭에 메밀꽃이 웃었다
밭 가에는
키 큰 옥수수와 콩포기도 바람에 흔들렸다
달빛 가득한 여름밤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피었을까?
왼손잡이 장돌뱅이 허 생원
왼손에 채찍이 들려있는 동이를
허 생원이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봉평의 흐뭇한 달빛이
양평의 흐뭇한 달빛이 되어
엄마의 메밀꽃을 비추고 있었다.
류일화 제1 시집 [ 아이리스 ] -<메밀꽃 필 무렵> 전문
4. 李箱, 김해경(1910~1937)의 흉내를 잘 내어봤소
어느덧 문학소녀가 된 여학생은李箱의 시 <오감도>, 소설 < 날개>, 수필 <권태>를 만나면
서 초현실주의와 모더니즘에 빙의가 되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반복해서 읽으
면 文理가 트이겠지, 라며 혼란스런 마음을 다독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의 형식, 띄어쓰기를 무시한 난해함, 숫자의 배열과 도형 그래서 李箱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그저 좋았다. 몽롱한 꿈을 꾸었고 혼잣말했다.“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수시로 겨드랑이가 가려워지기 시작했고, 만져보면 날개가 돋아나듯 까칠까칠하기도 하였다.
李箱의 수필 <권태> 중에서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이리라”라는 구
절의 따라쟁이가 되었다. 李箱의 시를 모방했다. 왜 그랬을까? 왠지 <권태> 속으로 뛰어들어
가 李箱의 친구가 되어줘야겠다는, 감수성 예민한 문학소녀다운 발상이었다. 아니 깊은 연민
이었을 것이다. <날개>부터 시작된 연민과 모호한 회색빛 무기력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박제
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네 알지요.”라고 대답해준다. 나는 오늘도
李箱이 키운 <꽃나무>를 옮겨와 내 원고지로 위에 또박또박 심었다.
봄비가 내리는 날
李箱의 <꽃나무>를
여기에 심었소
꽃이 피기 전에
거울을 보여주었소
흉내를 잘 내어봤소
류일화 제1 시집 [ 아이리스 ] -<李箱의 꽃나무 > 전문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이 더 좋았고 어딘가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흰색 물감보다는 회색 물감이 더 맘에 들었다. 난해하여 해법이 없는, 모난 돌이 되어서 정 맞은 돌이 되고 싶었던 그 혼돈의 시절.
흰 블라우스와 짙은 플레어 스커트 그 청춘을 소환하며, 10분 전에 내린 비릿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지구의
초록이 되는 곳
사람들도
걸어가는 나무가 되다
2% 여백 속에
나부끼는 칠월의 꼬리를 만져보다
류일화 제3 시집 [한 송이 꽃잎이었다] -<칠월> 전문
그 후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권태>는 가슴 속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도 흠칫 놀랐다. 아마도 류일화 제3시집 [한 송이 꽃잎이었다, 2022년 11월 발행- 월간순수문학 ]을 통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5. 나의 삶, 나의 문학 (나비가 詩人이며 詩다.)
나의 마음과 영혼에 창문을 달아준 것이 文學이었고 詩였다.
그동안 나의 내면을, 나의 서정을 채색하는 詩는 내 삶의 수직적 시간을 그린 그림이었다.
내가 쓴 한 줄의 시구가 누군가의 영혼을 흔들어주는 봄바람이 되면 좋고, 이미 나는 우리 엄마의 영혼을 흔드는 꽃바람이 되었으니 참으로 의미 있고, 만족한다.
시인은 시적 언어인 이미지를 통해서 독자와 영적 교감을 나눈다. 詩語는 색체가 있는 언어야 하고 리듬이 있고 멜로디가 있는 언어야 한다. 하늘이 내게 알려준 거룩한 속삭임이다. 詩를 음악처럼, 詩를 미술처럼, 이미지로 가져와 듣고 보게 만드는 상상의 작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꽃과 꽃 사이를 옮겨 다니며 꽃가루를 나르는 나비가 詩人이며 詩다. 오늘도 맨발로 흙길을 걷는다. 아무런 덧댐없이 지구와 연결된 모든 움직임, 그 날갯짓의 떨림을 경청하며 사분사분 꽃길에서 나비를 맞이할 것이다 ***
첫댓글 류일화선생님 수고많으셨습니다. 사무국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