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한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쪽방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곳. 쭉 이어진 쪽방집 끝에 허름한 3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1987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32-57번지, 고 선우경식 선생이 세운 요셉의원이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보내오는 성금과 자원봉사자들의 힘만으로 23년 동안 도시 빈민과 노숙자를 무료 진료해오고 있는 곳이다.
선우경식 선생의 뒤를 이어 요셉의원을 지키고 있는 가톨릭의대 교수이자 가톨릭의대 성모병원 내과 과장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세포치료사업단장, 가톨릭 생명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 감염내과 분야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신완식(60) 박사. 그가 2009년 2월, 6년이나 남은 교수직을 버리고 단 한 푼의 보수도 받을 수 없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2층 진료실에서 만난 신완식 박사가 말을 건넨다.
“이곳의 첫 느낌이 무엇이었나요? 냄새였을 겁니다. 목욕은커녕, 간단히 씻지도 못할 만큼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이 이곳을 찾습니다. 그분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뭘까요? 이곳이 병원이니까 의학적인 치료를 해주는 것일까요? 물론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존엄성,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천대와 무시를 받던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맞장구쳐 주며, 함께 울고 웃어주는 겁니다.”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을 택했느냐는 물음에 그가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사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라는 말씀을 계속하셨거든요.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신 아버지는 나를 통해 의사의 꿈을 이루고 싶으셨나 봐요. 세뇌시키듯이 ‘네가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셨어요. 결국 그 말에 이끌린 거지요. 하하하.”
오래된 기억을 되새겨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즐거워서일까. 얼굴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아버지가 참 완고하고 무서웠다”며 그가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따랐어요. 전문의가 됐을 때 ‘개업해서 돈을 벌어볼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아버지가 ‘힘들게 공부했으니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라’고 권하셔서 대학교수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은 참 잘 들었지요. 하하하.”
그렇게 시작한 의사의 길, 신완식은 40여 년 동안 후학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진료하며 의학을 연구해왔다. 그런 그가 왜 모든 것을 접고 요셉의원을 택한 것일까. 그 역시 자신의 새로운 둥지가 요셉의원이 될지는 몰랐단다.
“고 선우경식 선생님은 요셉의원이 건립되기 전인 1984년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그분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저 존경스럽기만 했지요. 가끔 선생님을 만나 환자 이야기, 병원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지,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선생님의 뒤를 잇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지금도 그분이 그리시던 꿈을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
진료실 한쪽 벽에 걸린 선우경식 선생님의 사진에 한동안 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많은 이들이 ‘왜 정년을 6년이나 남겨두고 의대 교수직을 물러났느냐’고 묻더군요. 사실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답니다. 봉사하며 살아가는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서, 혹은 계시를 받아서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성인(聖人)이 아니에요.”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연다.
“막연히 ‘교수 신완식으로만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봉사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니,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욕심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하겠다’ 싶어서 병원과 의대에 사표를 낸 거예요.”
힘든 사람들 위해 써달라며 껌 한 통, 과자 한 봉지 내놓는 극빈 환자들
그가 사표를 낼 즈음, 선우경식 선생을 잃은 요셉의원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표를 내고 처음 찾아간 분이 가톨릭중앙의료원장이신 최영식 신부님입니다. 그분께 ‘제가 사고를 쳤어요’라고 했더니, ‘아니, 신 박사님 같은 분이 무슨 사고를 치셨어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사실대로 ‘신부님 뵈러 오는 길에 사표를 냈어요’라고 말씀드렸지요. 신부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허허’ 웃으시면서 ‘그럼 이제 뭐하시게요?’라고 묻더군요. ‘아직 계획이 없어요’라고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선우경식 선생님 아시지요? 그분의 자리로 가주시는 게 어떻겠어요?’ 하시며 요셉의원을 추천해주시더군요. 제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다고 했잖아요? 고민 없이 그 자리에서 ‘네’ 하고 다음날 이리로 출근했어요. 하하하.”
그는 이곳에서 많이 웃고, 행복해하며 감사할 줄 알게 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예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청소해주시는 분,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자원봉사자, 심지어 환자들까지도 내게 ‘고맙습니다’란 말을 쉼 없이 하지요. 큰 대학병원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따뜻함에 흠뻑 젖습니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이곳에서의 소소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에게 치료를 받고, 몸과 마음을 추스린 분들이 가끔 이곳을 다시 찾아옵니다. 손에 뭔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과자 한 봉지, 껌 몇 통, 초콜릿 같은 겁니다.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가지고 오는 거지요. 자신이 가진 전부일지도 모르는 것을 내놓고 말없이 떠나는 그분들 얼굴을 보면 정말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그분들에게 어떻게 제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요셉의원에서 느낄 수 있는 감사는 그와 이곳을 찾는 환자들에게 다시 기쁨으로 이어진단다.
“한번은 선천성 구개열로 평생 말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환자가 찾아왔어요. 정말 간단한 치료인데도 병원에 갈 엄두를 못 냈다고 하더군요. 수술 후 자신의 입에서 정확한 발음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기뻐하던지요. 온 병원을 뛰어다니며 그동안 하지 못하던 말들을 하며 즐거워했어요. 그도 기뻤겠지만 ‘의사가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저 역시 행복하고 기뻤답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가난은 나라님도 막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지금처럼 하루 100명이 넘는 노숙자, 행려병자,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 사회가 약자들을 끌어안을 만큼의 포용력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겠지요. 사회 전체가 조금 더 따뜻해지고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덧붙였다. 그와 함께 있는 몇 시간 동안 그가 이곳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전해져 왔다. 그가 말했다.
“아주 어릴 적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본 이름 모를 꽃에 코를 대어 향기를 맡아보고, 한참을 쳐다보며 아무 이유 없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던….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곳이 그때의 기쁨과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 있어요.”
사진 : 김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