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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유당(幽堂)
첫째, ‘가로’ ‘세로’ ‘높이’는 없고, ‘위치’만 있는 것이 ‘점’(點)이다. 둘째, ‘점’이 모인 것이 ‘선’(線)이다. 셋째, ‘선’이 모인 것이 ‘면’(面)이다. 넷째, ‘면’이 모인 것이 ‘입체’(立體)이다. |
여러분, 여기서 ‘첫째 공리’에 주목하십시오. <‘가로’ ‘세로’ ‘높이’는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순수히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이 말은 「그런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로’도 ‘세로’도 ‘높이’도 없는, 그런 존재가 과연 뭡니까?
그렇다면 이 ‘첫째 공리’는 「‘실체’는 없는데 ‘위치’만 있는 것이 ‘점’이다」라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실체’가 없는데 ‘위치’는 또 뭡니까? 실로 점입가경입니다.
결국 2300여 년 동안 줄곧 인류의 <합리적 사유>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는 이
<유클리드의 공리>가 그 첫 단추를 어디에 끼웠느냐 하면, · · · 놀라지 마세요.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저 “있다 · · · ”고 치고 한번 시작해 봅시다」
한 셈이에요.
사실 그때, 유클리드가 자신의 통찰을 언어로 옮겨놓으면서 이와 같은 자각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인간의 사고’는 그 준거(準據)의
기초를 얻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만인 공유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어온, 그래서 공리(公理)인, ― 이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는 ― 이 언급에 대해서, 제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뾰족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도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의 무명의 두께일까요?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점’>이 모여서 다시 ‘선’을 이루었으니, 그 ‘선’인들
온전하겠습니까? 그 ‘선’도 실체가 없을 건 두말할 것도 없고, 다음엔 다시 이
<실체가 없는 ‘선’>이 모여서 ‘면’을 이루고, 다시 이 ‘면’이 모여서 ‘입체’를
이루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나 자신’까지를 포함한 이 세계는 과연 이것이
‘있음’일까요, ‘없음’일까요? 도대체 이 ‘점’(點), 즉 ‘없음’(無)을 얼마나 모아서
‘선’, 즉 ‘있음’(有)을 이룰 수 있겠으며, 마침내는 이 ‘세상’을 이루게 된 것일까요?
‘무’(無)를 아무리 끌어 모은들 어떻게 ‘유’(有)가 되겠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합니다. <‘가로’ ‘세로’ ‘높이’는 없고 ‘위치’만 있는 유클리드의
‘점’이라는 것은 다만 ‘빈 말’만 있을 뿐이요, 전혀 실체가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유클리드의 공리 중의 ‘없음’을 단순한
‘없음’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그건 유?무(有無)의
‘무’가 아니라, 모든 형상(形相)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의 회매상태(晦昧狀態), ―
즉 조건만 닿으면 언제라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굳이 말하자면, 어떤 예민한
‘경향성’(傾向性)과도 같은, 그런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것>에 대해 ‘진여’(眞如)니, ‘본체’(本體)니 하고 ‘이름’을
지으면서, 마치 <그것>을 존재론적인 실유(實有)이기라도 한 것처럼 파악한다면,
이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와 같은 말 자체가 바로
<그것>의 나툼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보면 붓다와 제자 부루나(富樓那) 사이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문답이 오간 걸 볼 수 있어요.
붓다가 부루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산하대지’는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하고 의혹(疑惑)하는데,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모든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종당에 무엇이 되느냐?』
『‘미진’(微塵)이 됩니다.』
『그 ‘미진’을 다시 일곱 조각으로 쪼개면 무엇이 되느냐?』
『‘인허진’(隣虛塵)이 됩니다.』 · · ·
그런데 이 ‘인허진’이라는 말은 참 재미있는 착상이에요. 알다시피, 인(隣) 자는
바로 ‘이웃할 인’이고, 허(虛)는 ‘빌 허’이고, 진(塵)은 ‘티끌 진’이니까, 추려서 말하면
‘인허진’이란 곧 <허공에 바로 이웃한 티끌>이라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허공’으로 되기 직전, 즉 ‘물질’의 ‘맨 끝’이라는 뜻이죠. 지금의 ‘소립자’
(素粒子)의 개념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 · 아무튼 그렇게 대화는 이어집니다.
『그 ‘인허진’을 다시 쪼개면 무엇이 되느냐?』
『‘허공’입니다.』
『부루나야, <만약 ‘인허진’을 쪼개서 ‘허공’이 된다면>(有를 쪼개서 無가 된다면)
<‘허공’이 바로 온갖 ‘물질’을 냈다>(‘무’가 ‘유’를 냈다)는 뜻이 되겠구나.
그런데 네가 아까 말하기를, 「세간의 모든 물질이 인연화합으로 말미암아 난다」
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의 ‘인허진’은 얼마나한 ‘허공’이 화합하여 이루어졌을까?
‘인허진’은 바로 ‘물질’이고, ‘허공’은 말 그대로 ‘허공’인데, ‘허공’과 ‘허공’을 어떻게
합할 수 있겠으며, 또 설사 ‘허공’을 합한다 한들, ‘허공’을 합하는 것으로야 어찌
‘물질’을 이룰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업(業)을 따라서 나타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인연화합>이니, <‘자연’으로 있는 것>이니 하면서 망발을
일삼는데, 이 모두가 다 ‘헤아리는 마음’(識心)으로 분별하고 요량(料量)하는 것일
뿐이어서, 다만 언설(言說)이 있을 뿐이요, 전혀 실(實)다운 뜻이 없느니라.』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여러 가지 ‘이름’이나 ‘물질의 형상’(法相)에 대해서 논하는 건,
궁극적으로 그 모든 ‘형상’이나 ‘이름’들이 다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모든 존재에 대한 허망한 집착을 몰록 여의고 ‘법성’(法性)을 보게
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겁니다.
요컨대 ‘성품’이 드러나는 마당에서는 ‘가로’ ‘세로’ ‘높이’의 ‘있고 없음’을 비롯해서,
‘점’ ‘선’ ‘면’ ‘입체’ 등의 모든 ‘형상’이나, 그것들에 붙여진 모든 ‘이름’이 몽땅
허공꽃으로 돌아가고 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는, 그 밖의 다른 일은 우선 모두 옆으로 비껴놓도록 하세요.
이 ‘유?무’에 걸림이 없는 안목이 바로 ‘법 눈’(法眼)이요,
이 ‘법 눈’으로 보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진즉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어째서 그냥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지 알겠어요? 요는 이와 같은 말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법안’(法眼)이
열리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법안’이 열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말을 알아듣는 것>과 <‘법안’이 열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 · · 어때요?
「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인 겁니다.」
이 말의 참 뜻을 알겠어요? 만약 이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 말>인들 과연
어디에 붙어서 의미를 이룰 수 있겠어요? 오직 순일한 허공성일 뿐인데,
어디에 ‘알고’ ‘모르고’가 붙겠느냐 말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이 말의 뜻을 깊이 참구(參究)한 끝에 뭔가 알아들은 바가
있다면, 그는 <허공에 말뚝을 박은 꼴>이 될 터이고, 또한 「본래 텅 트인 허공일
뿐이어서, ‘알아들을 자’도 없고 ‘알아들을 것’도 없다」고 알아서 무기(無記)에
떨어진다면, 그는 <눈에 박힌 말뚝도 보지 못하는 꼴>이 될 테니, 어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말’을 배워서 ‘지견’이나 생기는 것을 가지고는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다는 걸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아무리 자세하게 밝혀 보인다고 해도 결국 회심(廻心)할 줄 모르면
끝내 ‘알음알이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 <‘가로’ ‘세로’ ‘높이’가 없고 ‘위치’만 있는 유클리드의
점>이 결코 ‘무’(無)가 아니라는, ― 즉 유?무(有無)의 ‘없음’이 아니라, 유?무가
나뉘기 이전, 즉 <유·무의 본체>인 ‘참된 하나’(眞一)라는 사실을 이른바
‘수학적 언어’의 그 대단한 권위를 빌려서 확실하게 한번 밝혀내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인(先人)들이 말한, <모르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 나’요
‘참 마음’인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 결코 헤아리거나 짐작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수학적 언어’도 역시 ‘언어’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의 뜻을 깊이 사무칠지언정 결코 이 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실은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거든요.
고기를 잡았거든 ‘통발’은 버려야 합니다.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