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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26
1월5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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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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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Mmfs4ktbHk
[서울대교구 김준호 하드리아노 신부님 집전(대림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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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
심각한 사제 수도 성소 급감 현상이 한국 교회 전체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때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찼던 전국 신학교와 수도자 양성소는 스산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어떤 용도로 대체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 어떻게 해서든 성소자 확보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용기를 내서,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라고 크게 외쳐야 하는데, 도무지 나서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이 길이 분명 가치 있고 아름다운 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공동생활의 어려움, 봉헌 생활의 복잡다단함을 잘 알고 있기에 선뜻 제안하지 못하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이 충만한 봉헌 생활을 잘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가 지금 몸담은 이곳에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고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생생한 천국 체험을 하고 있다면, 어찌 “나를 따르시오!” “와서 보시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봉헌생활자들의 삶이 더 충만해져야 하겠습니다. 더 복음적 가치와 의미를 잘 드러내는 향기로운 삶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더욱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운 공동체, 서로서로 향한 섬김과 나눔과 봉사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상 천국 공동체를 건설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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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dEI9zvqt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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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믿음은 어둠과 빛의 관계와 같다>
믿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믿고 싶다면서도 거짓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이 두 길밖에는 없습니다. 곧 메시아로 만나고 라뽀니로 만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이 둘로 나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진리와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으로 만나면 메시아를 만나게 되고 진리로 만나면 라뽀니를 얻게 됩니다.
은총은 ‘삶의 이유’를 밝혀주고 진리는 ‘삶의 방식’을 알려줍니다. 어제 ‘서바이브’란 영화에서 우울증에 삶의 의욕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리고 싶어 자신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 이야기 안에서 그 주인공이 만난 사람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로 만나는 방식을 알려줍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대단한 게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필립보에게 순종하여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예수님은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보는 것’과 ‘아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함께 ‘머무는 것’은 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알기 이전에 우리를 아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나타나엘처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더 큰 믿음으로 이끄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아나요? 잘 모릅니다. 잘 안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배울 수 있습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합니다.
미국 드라마 ‘마인드헌터’는 실제 FBI 프로파일러인 존 E. 더글러스(John E. Douglas)를 바탕으로 FBI 요원 홀든 포드(Holden Ford)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 시리즈는 자신이 범죄 심리학에 대해 확고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믿는 다소 거만하지만 야심 찬 젊은 요원에서 범죄 정신의 깊이와 복잡성을 깨닫는 노련하고 겸손한 프로파일러에 이르기까지 홀든의 여정을 추적합니다.
처음에 홀든은 범죄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강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사건 해결에 적용하려는 열망과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쇄 살인범의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면서 그는 자신의 초기 가정에 도전하는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자기 지식이 부족했음을 솔직히 인정한 홀든은 파트너 빌 텐치, 심리학자 웬디 카와 함께 투옥된 연쇄 살인범을 인터뷰하는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이 인터뷰는 강렬하고 충격적이며 심오한 통찰력을 제공하여 홀든을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드러냅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홀든의 관점은 극적으로 변합니다. 그는 이러한 범죄자들의 동기와 정신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겸손은 그의 결심을 약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이 배우고 이 지식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적용하려는 그의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시리즈가 진행됨에 따라 홀든의 진화하는 접근 방식이 결실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연결을 만들기 시작하고, 범죄 정신에 대해 새로 발견한 이해를 적용하여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여행은 단지 직업적인 여행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여행이기도 하며, 그의 관계와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칩니다.
거짓말은 모든 안 좋은 것을 정당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며 자기들이 지은 죄를 자기들이 수습할 수 있다고 믿어버렸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로 죄가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가죽옷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오직 그 가죽옷만이 자기 죄를 덮어주고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준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믿음을 의미 없게 합니다. 그러니 믿고 싶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존재가 됩시다.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듯, 거짓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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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0년 전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일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교님이 되셨지만 그때는 사목국장 신부님께서 제게 ‘그리스도론’ 강의를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 중에는 ‘성사론, 마리아론, 그리스도론, 교회사’가 있었습니다. 친절하신 신부님은 제게 그동안 하였던 ‘강의록’을 보내주었습니다. 신부님의 강의록을 참조해서 강의를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저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론 강의를 준비하였습니다.
어제는 안드레아가 형인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필립보는 그리스도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타나엘은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예전에 강의했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론은 2천 년 전의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분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구세주라고 번역되는 서양말은 그리스도(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입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글자 그대로 하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요? 그렇데 된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남북 왕조(이스라엘, 유다)로 갈려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에는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하게 됩니다. 약 50년 후에 유배가 끝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야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사제, 예언자은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 직무에 임명을 받았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자기 조상들이 기다려 왔던 그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성과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란 인물이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는 문헌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서 외에 예수님은 대해 언급한 세속 문헌이 소수 있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현대에 나온 이런저런 소설(‘다빈치 코드’, ‘최후의 유혹’)은 그야말로 소설일 뿐입니다. 신약성서는 4복음서와 서간문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사가들과 서간문의 저자들은 철저히 객관적인 역사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신학적 관점을 갖고서 각자의 사목적 상황에 맞추어 각자의 방식대로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외모나 성장 배경 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 운명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론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위해서 유다인들에게 익숙한 다양한 존칭들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에게 적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존칭들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고 서로 합성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존칭의 적용 기준은 존칭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역할과 신원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처음으로 도입된 개념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 개념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과거의 다윗 왕조를 이상적인 시대로 상상하고 다윗 왕조의 복구를 갈망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갈망과 함께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형성되었는데, 그 구원자는 왕이나 대사제 혹은 예언자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왕, 대사제 그리고 예언자는 자신의 직무를 맡기 위해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녔고, 그래서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Messiah)’, 희랍어로는 ‘그리스토스(Christos)’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승리의 메시아 개념을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지혜서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고 고양된 의인의 모습을 메시아 개념과 합성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또 다른 지존 칭호로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에게 적용되었지만, 실상 이 칭호는 부활 이전 예수의 선포와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는 ‘아빠’라는 신칭(神稱)에서 드러나듯이 유일무이하게 독특한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활 이전에 드러났던 예수와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부활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되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부활 이후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 칭호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간택과 전권 위임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서 하느님 대신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하느님 아들 칭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칭호보다 나자렛 예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 편이며, 공동체와 세계 앞에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분임을 뚜렷이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된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서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과의 구분(복종, 종속),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의 동일성(그분과의 일치, 神性)을 포함합니다.” 내일은 교회의 역사에서 교부들과 공의회가 선포하고 고백했던 그리스도론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배우는 것의 진정한 목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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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3-51: 필립보와 나타나엘과의 만남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나를 따라라.”(43절) 부르신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하면서 그에게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45절) 분을 만났다고 한다. 나타나엘 역시 성경 연구에 열중하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찾던 사람이었다. 필립보는 다른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유다인들이 말하듯이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하였다.(45절) 나타나엘은 즉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 이 역설적인 질문에는 메시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지방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데 의혹이 있다고 한다. 필립보는 그에게 “와서 보시오.”라며 권한다.(46절)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 의혹을 해결한다. 아직 인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신다. 이 말에 깜짝 놀라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절) 하셨을 때, 그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연구하기 위한 것으로 아마 나타나엘은 메시아 대망에 관계되는 성경을 읽었을 것이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49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또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5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1절)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의 장소이고, 하늘이 열리는 것은 천사들이 먼저 내려오고,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천사들이 기도와 청원을 가지고 하느님께로 오르고, 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굳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제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을 약속받았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이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분을 직접 체험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체험으로 만나는 그분은 우리에게 더 큰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며 깊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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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기도와 묵상을 하는 장소로 무화과나무 그늘을 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느님 말씀과 율법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나타나엘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메시아를 위한 장소로 나자렛을 주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전한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 그대로 ‘실천’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나타나엘이 가진 성경 지식으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신앙인은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여야만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을 통하여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려 줍니다.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들음’과 ‘실천’입니다. ‘들음’과 ‘실천’이 빠져 있는 성경 공부와 연구는 성경 지식이 많아지게 할 수는 있지만,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길로 우리를 반드시 안내하여 주지는 못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듣고, 들은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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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3-46)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고향 친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요한 12,21-22) 그리고 필립보도 안드레아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ㅠ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간 뒤에, 필립보도 예수님께 데려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는데, 아마도 필립보와 나타나엘은 친구였거나 서로 잘 아는(친한) 사이였을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라는 말은,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은, “메시아가 나자렛에서 나온다는 예언은 없소.”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니코데모와 의회 의원들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1-52)
구약성경의 예언서에는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미카 5,1)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예언대로 된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뒤에 계속 그곳에서 사셨다면, 예수님은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베들레헴 예수’로 불렸을 것이고,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생각하면서 좀 더 쉽게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죽은 뒤에도 권력자들은, ‘혹시라도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해서 반란 세력이 나타나지 않을까,’라고 의심하면서 그곳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라는 말은, 머리로만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라는 권고입니다. 직접 만나보면 믿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인데,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 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필립보는 아마도 나타나엘의 신심과 인품과 신앙생활 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 금방 믿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47-51)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에게 오기 전부터 그를 이미 알고 계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말씀은, 위선자가 아니라고, 즉 진실한 사람이라고 나타나엘의 신심과 인품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라는 말씀에는, 당신이 먼저 나타나엘을 부르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찾기 전부터 주님께서 먼저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그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는 말씀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온 표현인데,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뜻이고, 또 그의 신앙생활과 심정을 잘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언을 이미 들었는데, 이제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하자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라는 말씀은, “너는 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나를 믿고 있다.”라는 뜻이고, 그의 믿음은 아직 초보 단계의 믿음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은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일”인데, 그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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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또 다른 요한의 제자에게 이미 했던 말입니다.(요한 1,39-40 참조)
필립보는 같은 고향 출신인 안드레아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필립보는 이 기쁜 소식을 또다시 나타나엘에게 전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당신의 예지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와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라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 공부에 전념하곤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나타나엘 역시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곧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더 신비로운 계시를 해주십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나오는 야곱의 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야곱과 하느님 사이를 오가면서 축복을 전해 주는 예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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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예언자로 알아본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했을 때, 나타나엘은 편견의 늪에 갇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반문합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을 눈여겨보셨고 그의 흠 없는 인품을 알아보십니다.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스러움을 가졌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보려면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없도록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아벨과 비교당한 속상함을 넘어,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 미움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커지면, 상상으로나 말이나 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살게 되는지 되돌아보면 압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내 형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혹시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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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이미 나를 아시는 분>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 가운데 으뜸은 ‘인간 창조’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 모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1,26; 2,7 참조)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간의 들숨날숨이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의 숨결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첫 만남을 전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증언을 듣고 비아냥거린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곧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됨됨이를 알고 계셨다. 복음사가는 나타나엘에 대한 선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아신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신다.(2,25 참조)
예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때 유행가처럼 번지던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모 방송에서 지체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노래를 합창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형태의 삶이나 인생도 주님은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신다. 하느님 앞에 무의미한 인생, 쓸모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자매님이 있었다.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은 이후 외롭게 살아온 분이었다.
세례식이 끝난 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그분의 말씀이 가슴 뭉클했다. 늦게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이리라.
우리도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기에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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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1,49)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단어는 동행이란 단어와 그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낯선 길을 떠나기 전, 문득 나와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처럼 우리 삶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성수’의 「동행」 노랫말처럼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라고 생각날 때, 함께 따뜻한 동행할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험한 길이라도 힘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따뜻한 동행할 사람이 있다면 분명 기쁨은 배가 될 것이고 힘듦이나 외로움은 반감될 것이니 동행하는 동안 힘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분의 표현처럼 나란히 걷는 것이 동행이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는 게 동행이며,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나의 친근한 동반자입니다. 그러기에 함께 길가는 동반자는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니 서로 믿고 의지하며 동행합니다. 그 동행의 끝이 어디일지라도 이것이 아름다운 동행의 길이니 결코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동행할 동반자가 되어 주기에 온전한 마음으로 나 또한 그의 길동무가 될 것입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은 참된 우정의 관계에 있었으며, 그러기에 오늘 독서처럼 필립보는 친구인 나타나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1요3,13) 인도하고자 하였으며,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그와 함께 동행하길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길을 걷기 이전부터, 살아오면서 무엇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며 참된 삶인가를 추구하고 있었기에, 나를 따라라, 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자마자 필립보는 즉각 따랐을 뿐만 아니라, 친구인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고대하던 그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라는 분이시오.”(1,45)라고 권유하며 함께 가하자고, 필립보는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에게 가서 보자고 말하면서, 그를 초대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이 찾은 소중한 것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향유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한 사람의 체험이 단지 그 사람만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그 만난 체험은 다른 사람의 체험으로 확장되고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이 만난 체험과 체험 나눔으로 말미암아 사랑은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생명은 생명으로 풍요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의 격려와 초대로 고대하던 그분 예수님을 만난 나타나엘은 그 자신의 심성처럼 단순하고 진솔한 사람답게 한순간 참 진리를 만남으로 쉽게 자기의 것을 내려놓습니다. 직설적인 사람은 휘어지기보다 꺾어지기 쉽습니다. 직설적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즉각적입니다. 이렇게 거짓이 없고 순수한 나타나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1,48)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내 자기 생각을 즉각 내려놓습니다. 아버지와 그물을 버려두고 떠났던 다른 사도들과 달리, 나타나엘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비웠기에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1,49)고 즉각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한순간에 회심, 변화하게 하였으며, 신앙적인 존재로 변화하게 하였을까요?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라는 것은 단지 장소가 아니라 그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눈여겨 보아왔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더 자신을 온전히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며 기꺼이 친구 필립보와 함께 예수님을 따랐다고 봅니다. 마치 베드로가 물고기를 밤새도록 잡지 못하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엄청난 고기를 잡고 난 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루5,8)고 고백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꿈꾸는지 간에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깊이 아시고 나의 목마름을 알고 계시며 나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친구 필립보의 권유로, 친구 필립보와 함께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 나타나엘은 훗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1,50)라는 예수님의 예언처럼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아빠 하느님께서 스승이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놀라운 섭리를 보았습니다.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네. 오늘 큰 빛이 땅 위에 내린다.” (복음 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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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보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처음 본 낯선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조용히 혼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더 즐겁게 기차 여행을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나쁜 경험이 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대화를 나누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험자들은 지시에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 결과 처음 생각과 달리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고 답변했으며, 이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즐거웠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 인간이 정서 예측에 미숙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어려움은 모두 인간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 때문에 삶이 어려워졌다고 밝힐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긍정의 마음과 만족스러운 결과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이가 고독을 즐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었을 때 빚어질 잠재적 혼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본인의 더 큰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신 이유, 또 이 사랑의 힘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긍정적 마음과 더불어 만족스러운 결과는 사랑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굳이 필요 없을 텐데도 제자들을 하나둘 모아서 제자단을 형성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요한과 안드레아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단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그 늘어나는 숫자에 우리의 이름도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와서 보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안에 하나를 이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 큰 기쁨과 행복 안에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 기쁨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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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나니 참 좋습니다>
요한 1, 43-51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1, 43)
“와서 보시오.”(요한 1, 46)
“내가 보았다.”(요한 1, 48)
“보게 될 것이다.”(요한 1, 50)
만나니 참 좋습니다
눈길과 눈길이 만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싹틉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손길과 손길이 만나
서로가 품은
희망이 자랍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발길과 발길이 만나
서로가 이루는
사랑이 영급니다
만나니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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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습니다. 오래오래 기왕이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족 요르단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났고 안드레아가 형제 시몬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 5,1) 많은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 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 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셈입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심쩍어하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을 지니고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3절 이하를 보면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살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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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발견과 실현-
“형제를 사랑하라”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제가 강론을 쓰기 전이든 쓴 후든 항상 생각하는 것은 제목입니다. 예전에는 한 줄이었다가 몇 년 전부터는 두줄, 또 때로는 세줄일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참나의 발견과 실현-형제를 사랑하라” 세 줄입니다. 또 제가 2014년,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가장 선호한 제목은 “삶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의 여정은 날로 ‘저물어가는’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사랑의 열매 ‘익어가는’ ‘성화(聖化)의 여정’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피정 강의 때도 참 많이 나눈 주제가 삶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화두처럼 던지는 두 물음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여러분의 일생을 하루로 압축할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時點)에 있겠는지요? 일년사계(一年四季), 여러분의 일생을 일 년으로 압축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이렇게 성찰할 때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사랑을 살 수 있겠습니다. 저로 말하면 수도원 설립 다음해인 1988년 늦여름의 나이 40에 와서 올해 76세가 됐으니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사계로 하면 초겨울의 시점에 들어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의 삶에 올인하게 합니다. 엊그제 피정팀 강의시 맨처음 포문을 연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2024년 새해들어 오늘 최고의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탄시기,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삶의 여정에, 삶의 행복에 하루하루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작년 2023년 한해를 마감하며 한해의 사자성어로 대학교수들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습니다. 논어 헌문편에는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 와는 정반대입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직설적으로 말해 “돈을 보자 하느님을 잊다”가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재앙 중의 재앙은, 비극 중의 비극은, 불행 중의 불행은 희망이자 길이자 빛이신 하느님을 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을 때 사람은 저절로 죄짓고 병들기 마련입니다. 새벽에 눈길을 끈 책 제목에다 <공동선1-2월> 특집에 나온 몇몇 사제들의 글 제목들이었습니다.
“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더 세상안으로, 덜 세상적으로”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길동무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영원한 현역으로 사랑의 여정을 살겠다는 결의를 다짐한 제목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졸업이 없는 영원한 학생의 주님 “사랑의 학인”으로 살겠다는 결의입니다. 2009년, 그러니 15년 전 우리 피델리스 수사가 마르코 수사의 지도하에 심은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전지가 끝나니 하늘 높이 키도 훌쩍 커진 듯합니다. 즉시 떠오른 묵상글입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흡사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중에 더불어(together)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의 사랑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명시적 고백 없어도 이렇게 함께 살아감이 사랑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 중에 있는 공동체 도반들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장수했던 분으로 기억력이 쇠퇴했던 노년에는 늘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에 제자들이 불평했다는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 중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며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새삼 사랑과 진리는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어제도 나눴다시피 구체적 형제 사랑은 형제를 주님께 인도함으로 실현됨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형제 사랑의 모범입니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필립보는 그의 절친인 나타나엘을 집요하게 주님께로 인도하니 이 또한 형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강권하자 그는 예수님을 향했고 마침내 두 분의 감격적 만남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최고의 격찬이자 찬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안 주님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통해 참나의 발견이자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나타나엘의 조건반사적 고백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는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참사람과 참사람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됐음을 봅니다. 어찌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나타나엘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들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우연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한두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 주님을 닮아감으로 역설적으로 참나의 실현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의 여정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고 더불어의 구원뿐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 마지막 감동적 구절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과 우리 사이 사다리같은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의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에 유일한 “하늘문”이자 “하늘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하늘길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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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이 있나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의 말대로 나자렛에서는 나올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루사람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자렛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있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드팩하기에 좋은 진흙이 나올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메시아는 거기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만 오시는 것인데 하늘로부터 찾아오신 것을 성탄이요 육화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타나엘의 말이 맞긴 맞습니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거짓이 없는 사람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나자렛 사람인 것도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메시아가 근본적으로는 하늘에서 오셨지만 경과적으로는 나자렛에서 온 것입니다.
메시아는 본래 그런 분이십니다. 하늘에 딱 버티고 앉아 계실 분, 하늘을 지키고 계실 분이 아니라 이 땅을 찾아오실 분이시고, 이 땅에 오셔서도 나자렛 한 곳에 죽치고 앉아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이나 이곳 우리게까지 찾아오시기에 경과적이십니다.
경과적이라고 할 때 經자도 過자도 다 지나감의 뜻이 있기에 메시아는 우리를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지나가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자기 고장에 붙잡아두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시며 떠나시잖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찾아오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찾아가야 하고 만나 뵈어야 하지요. 이번 주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의 연속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필립보에게 메시아가 나타나셔서 제자로 삼으시자 필립보는 오늘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가리키며 찾아뵙게 합니다.
이때 중요한 행위가 두 가지입니다. 곧 ‘찾아가는 것’과 ‘뵙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은 열성 또는 열망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까지 오신 거리를 생각할 때 베틀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동방박사들이 찾아뵙는 것이나 자기 동네에 찾아오신 주님을 중풍 병자와 동료들이 지붕을 뚫고서라도 찾아뵙는 것처럼 우리도 그 정도의 열성과 열망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뵙는 것인데 뵙는 것은 갈망입니다. 사실 뵙고 싶은 갈망 때문에 찾아가는 열성도 우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원천리는 보고 싶은 것에 비하며 천 리도 멀지 않고, 보고 싶은 갈망 때문에 천 리도 멀지 않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의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갈망과 열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갈망도 없고 열성도 없다면 아무런 사랑도 없다는 뜻이고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나요? 갈망과 열성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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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부르심과 응답!>
오늘 복음(요한1,43-51)은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요한1,43)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필립보가 바르톨로메오라고 알려진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와서 보시오."(요한1,46)
그러자 나타나엘은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예수님을 만난 나타나엘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늘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 부르심에 맞갖은 삶으로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응답은 또한 '나를 통한 또 다른 주님의 부르심이 너에게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3,11-21)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맞갖은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3,14-15)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3,16)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3,18)
사도 요한의 이 권고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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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JTNHPbQ5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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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거짓으로
하늘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올릴 소중한
마음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마음입니다.
오고 가야 할
진실한
나눔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들의
고유한
몫입니다.
결정적인
은총의 순간은
언제나
진실한
순간들뿐입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실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할 뿐입니다.
안다는 것은
제대로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그의 진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진실을
나누어 주십니다.
진실을
받아 먹고 사는
신앙의
자녀들입니다.
진실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가두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삶으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진실한
인격입니다.
보이지 않는
참된 진실
참된 진리가
이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거짓이 없는
나타나엘은
비로소 진리를
만난 것입니다.
진실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늘도
진실하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좋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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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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