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hommage]
‘존경’을 뜻하는 프랑스어. 영상예술에서 특정 작품의 대사나 장면 등을 차용함으로써 해당 작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 현대 씨름의 전성기과거 천하장사 이만기의 가십기사가 여성잡지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가십기사의 진위여부야 알만큼 알 테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자그마한 이만기 장사의 안다리에 200cm가 훌쩍 넘는 거인장사(당시 우리나라 남자농구 센터 신장이 190~192cm 남짓 되던 시절이다) 이봉걸 선수가 넘어갈 때면 TV 앞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부터 20대 남녀, 코흘리개 꼬맹이까지 환호성을 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누가 뭐래도 씨름과 복싱이었다.
대중성을 상실한 태껸과는 달리 씨름은 일제 치하에서도 1927년 조선씨름협회가 창립되고 1936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꾸준히 전 조선씨름 대회가 개최될 만큼 그 명맥은 탄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1972년 뉴스로만 취급되던 씨름이 최초로 전국에 중계 방송되면서 씨름은 큰 전환점을 맞는다. 지금은 작고한 故김성률(前경남대 교수) 장사의 아성이 무너지고 홍현욱 장사가 그 뒤를 잇고 있던 1983년 마침내 프로 씨름(민속씨름)이 출범하면서 현대 씨름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만기(현 인제대 교수),
이준희(현 씨름연맹 경기위원장),
이봉걸의 이른바 ‘모래판의 3이(李)’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김칠규(현 현대삼호중공업 씨름단 감독), 강호동, 황대웅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씨름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씨름의 재미에 사람들이 외면하기 시작한 시점은 ‘무게씨름의 원조’ 김정필을 필두로 하는 소위 ‘공룡’ 씨름꾼들이 등장하면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후에도 백승일과 신3강인 김경수,
신봉민, 이태현, 그리고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등의 스타 씨름꾼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미 무게씨름이 대세가 되어버린 백두급이 사람들의 눈길을 다시 돌리기에는 힘이 딸렸다.
모래판에 지는 낙조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무게씨름 속에서 사람들이 씨름에 흥미를 잃어가던 시점에 씨름판에 결정적 악재가 터진다. 바로 IMF다. 당시 다소 주춤하기는 했지만, 분명 씨름은 무려 8개의 씨름 단이 존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기가 떨어진 시점에 IMF가 찾아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비절감의 삭풍이 매서운 시기였다.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농구조차도 진로가 법정관리 상황에 처해 제일 먼저 농구단 창립을 취소해버릴 정도의 추운 시기였다. 8개였던 씨름 단은 3개로 줄었다. 이젠 현대삼호중공업 단 하나의 씨름 단만이 남아 정상적인 리그 진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프로팀 현대삼호중공업과 실업팀들이 섞여 프로씨름(민속씨름)을 치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된다대부분 격투기 팬들은 최홍만과
이태현이 K-1과 프라이드에 서는 것에 대해 오히려 환호한다. 물론 필자 역시 최홍만의 승리에는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홍만이 K-1 무대에 서기 직전 LG씨름단 선수들이 연맹까지 찾아가면서 눈물을 흘렸던 모습을 알기는 아는가? 천하장사까지 지낸 20대 나이의 씨름선수를 일본 격투기 무대에 빼앗기는 일이 발생하는 상황이다. 몇몇 격투기 초보팬들이 뭔 상관이냐고 떠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씨름은 스포츠인 동시에 엄연히 한국 고유의 문화이다. 한국 고유 문화를 잇는 자를 견디다 못해 일본의 상업적 무대에 빼앗기는 상황은 분명 부끄러워해야 한다. 혹자는 아케보노를 논하겠지만, 이미 은퇴한 선수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과 전성기의 선수가 견디다 못해 나서게 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씨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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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씨름이 재미없어서 그렇게 됐다’, ‘수익구조가 잘못됐다’는 식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씨름이 재미없다는 분들이라면 한라급 김용대의 씨름을 한번이라도 보고 말하라. 이미 무게씨름이 득세하던 시기는 끝났고, 오늘날 모래판을 보면 한라, 태백, 금강급뿐만 아니라 백두급마저도 과거 못지않은 화려한 기술 씨름이 구사되고 있다. 문제는 이미 굳어진 고정개념을 변화시킬만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KBS에서는 민속씨름의 중계마저 거부한 적이 있었고, 요즘 다시 방송되긴 하지만 문제는 그 시간대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씨름의 방송시간은 평일 오후이다. 주말 저녁이 되어도 시원찮을 판에 평일 오후에 방송된 씨름을 TV 앞에 앉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이미지를 바꿀만한 기회 자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씨름 자체가 수익구조를 내지 못해 그랬다’는 말에도 필자는 동의하지 못한다. 다소 자극적인 표현일수도 있지만, 순수하게 스포츠 그 자체만으로 흑자를 볼 수 있는 스포츠는 한국에 단 한 종목도 없다. 국내 최고의 스포츠라는 프로축구, 프로야구, 프로농구조차도 각 기업들이 홍보를 위해 적자를 무릅쓰고 운영하고 있다.
해답은 간단하다. 현재 씨름은 아픈 상태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 어려운 환자에게 “왜 고기 먹고 힘내지 않냐”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씨름이 가진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씨름은 스포츠이기 이전에 소중한 전통 문화다. 그것은 단순히 돈 몇 푼으로 계산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프로야구단 운영해봐야 적자인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왜 야구는 되고, 씨름은 안 된다는 것인가? 단지 씨름은 ‘아픈 것’일 뿐이다. 일단 치료를 해줘야 다시 도움이 될 만한 용사로 자라날 것 아닌가?
씨름이 살아나려면? 씨름이 살아나려면 중계 시간부터 바꿔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차피 KBS는 공영방송이다. 시청률을 높여 광고수익을 올리기보다 더욱 중요한 소명에 답해야 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사명이 아닐까?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타방송사에 내지 않는 시청료 원천 징수권까지 KBS에게 허락한 것 아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대에 편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씨름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칠 기회를 갖게 된다.
두 번째로 씨름 협회 자체의 흥행방식도 변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현대 씨름에 필요한 것은 우수한 한 명의 시나리오 작가와 이벤트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프라이드FC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선수의 기량도 있지만, 잘 꾸며진 대립구도와 프로레슬링적인 화려함에 있다. 일례로 선수의 기량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UFC가 적어도 국내에서는 프라이드FC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요즘 관중들은 비주얼적인 면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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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를 한번 살펴보자. 프라이드 초창기를 먹여 살린 것은 그레이시 일족 VS 다카다 도장의 대립구도였다. 이후 반다레이 실바 VS 일본인의 구도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고, 그 뒤에는 노게이라 VS 효도르, 요즘은 크로캅의 효도르를 향한 도전기가 잇고 있는 형국이다. 초창기 인기가 없어서 폐지까지 거론됐었던 무사도 시리즈 역시 고미 다카노리가 슈트박세 선수들을 말 그대로 짓밟아버리면서 또 하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씨름에도 그런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단순히 상품만으로 승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거기에 수익의 재투자 구조 역시 개선해 그것을 좀 더 비주얼적 면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요즘 씨름계에서도 선수 등장 시 나름대로 이벤트 효과를 주는 등, 그러한 면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좀 더 눈높이를 젊은 층에 맞춰야 한다. 노인들이 전부 고인이 된 후에 씨름이 문 닫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장 시급한 것은 무관심에 대한 자성일간지 기사에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에 대한 안타까운 칼럼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거기에 대해 몇몇 격투기 포털의 골수팬들은 오히려 그 글을 올린 기자를 비난했다. 그러나 과연 그들 중 몇 명이나 이태현에 대해, 아니 씨름에 대해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씨름연맹의 실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적어도 우리 것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정도는 갖추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한 몇몇 팬들의 입장대로만 생각해준다 해도 씨름판 자체가 없었다면 대체 어디서 최홍만, 이태현 같은 선수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참고로 서장훈 연봉이 4억대다. 부수입은 완전히 뺀 순수 연봉만의 액수를 말함이다. 크로캅이 토너먼트 우승해봐야 받는 돈이 1억 8천만원 정도이다. 최홍만, 이태현이 농구 선수였다면 프라이드, K-1판에서 그들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부디 눈앞의 것만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적어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우리 것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 정도는 가지고 씨름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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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격투기전문매거진 HOLOS 10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격투기전문월간지 홀로스(www.holos.co.kr)]
김흥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