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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유(갈2:20)-2023.4.16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사는 이유에 대한 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목적 없이 부초같이 떠밀려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 시간 각자 자기가 사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 보십시다. 거창한 이유를 말씀해보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답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지요. 어쩌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상 가장 합리적인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 각자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말씀이요,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 중에 한 구절일 것입니다. 사실 입으로는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무궁무진한 신학적 깊이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내공이 쌓인 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지요. 이 구절 속에 믿는 자의 정체성이 들어 있고, 사는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을 세 파트로 분해해 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아났다는 말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옛 사람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말씀인 것이지요.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이유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 삶의 방향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사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사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모르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자기 신분을 아는 사람이요,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이지요. 그런 자는 자기 철학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자기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아는 사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아남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히 자기 정체성을 아는 방법은 없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은 아무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이유를 어떻게 밝힐 수 있겠습니까? 가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슬픈 사실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인줄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기 정체성을 모르는 자들에게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거의 예측이 가능합니다. 대부분 세상적인 성공이나 비전에 대해 말할 것이요, 혹은 인류평화와 복지를 위해 산다고 거창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영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런 자들은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지요.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유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영적 정체성을 가진 자들의 답을 듣고 싶은 것이지요.
이른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은 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믿는 자의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가 사는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자들이기를 원합니다. 내가 사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고,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정체성을 아는 자요, 자기가 사는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고백을 드릴 수 없다면 이 시간 내 자신의 정체성부터 정립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의 대답을 바울 사도가 대신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지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이유입니다. 내가 사는 이유요,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물론 얼마든지 고상한 말을 가지고 다른 표현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답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사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모든 것은 열매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성한 열매가 맺힐지라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열매를 맺을지라도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롬14:23).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감정이나 자기 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사는 근본적인 이유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은 죽음을 의미하지요. 죄인인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말입니다. 반드시 내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내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지불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전적으로 나의 죄 때문에 말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시간을 초월해서 반드시 내가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대신 그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때 그 십자가에서 못 박혔던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지신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 내가 나의 죄를 지고 죽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를 대신하여 주님이 친히 십자가를 대신 져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그 십자가의 공로로 나의 죄가 완전히 처리된 것을 믿습니다. 비록 내가 직접 본적이 없을지라도 성경이 말씀해주셨고, 성령이 친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에 대해 한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태어나면서 죽음을 전제하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죽음은 다시 사는 것을 전제하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똑 같습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느냐, 그리스도 밖에서 죽느냐에 따라 영원이 결정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범죄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죄로 죽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요구합니다.
율법의 렌즈를 통해서 보면 한 사람도 의인은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죄인은 당연히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값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십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큰 죄, 작은 죄 할 것 없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죄 값을 지불하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하신 것이지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주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담당하사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으신 분이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오직 나의 죄, 당신의 죄,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사야서53장4절과5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추가합니다. 이사야서53장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를 위한 죽으심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믿는 우리로 하여금 효력을 발생케 하신 것이지요.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효력은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효력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인종이나 종족을 초월합니다. 주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십자가의 효력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는 주님이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효력이 지금 나에게 그대로 미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상실될 수 없는 효력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내 죄 값이 지불되었다는 말입니다. 결코 두 번 다시 내 죄 때문에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다만 내가 그런 확신이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십자가의 효력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의심한다면 나는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경험한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 경험이 없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내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맛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확신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의 모든 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모두 다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나는 더 이상 내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친히 못 박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은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는 자입니다. 절대 거기에 나의 의로움이 전혀 추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선행이나 수고나 공력이 추가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못 미더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에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를 추가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면서 뭔가 자기의 선행이나 공력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감에 붙잡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하면 율법의 옷을 벗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율법의 옷을 벗지 못하면 범죄할 때마다 찔리는 자기 양심으로부터 정죄를 당합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십자가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물론 죄를 짓고 담대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지신 갈보리 십자가의 효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액면대로 말입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유함이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자꾸만 반복해서 주님께 십자가를 다시 져달라고 떼를 쓰게 되는 것이지요. 배고픈 어린아이가 징징거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갈보리 언덕으로 다시 끌고 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혹은 나를 위해 다시 한번 십자가에 죽어주시라고 예수님께 강청하는 것이지요.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한다는 말이에요. 절대 그러시면 안됩니다. 주님이 2천 년 전에 지신 갈보리 십자가는 단번으로 족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효력은 세월이 흘러도,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 단번에 지신 십자가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 우리 주님께 십자가를 다시 한번 져달라고 부탁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라는 미명으로 압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믿는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칩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내지요. 그것으로 종교적인 자기만족을 쌓아갑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십자가는 자신의 죄 값을 지불하고 죽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절대 그리스도와 함께 살수 없는 것이지요. 가장 비참한 인간입니다.
믿음은 효력입니다. 죽으심도 효력이요, 다시 사는 것도 효력입니다. 다만 그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수용하면 그 효력이 나에게 미친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힌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시간을 거스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역사를 수용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효력이 미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복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만 내가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대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내가 믿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믿게 된 것입니다. 내게 믿음을 주셔서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장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율법을 향하여 죽은 것입니다. 이른바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키 위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 망가뜨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는 율법으로 죽어야 합니다. 율법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율법으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다시 살지 못합니다. 율법은 죽음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끝까지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사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내가 지고 율법대로 죽으면 끝이지만, 율법의 종결자이신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시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종결자이시며, 복음의 완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율법의 종결자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이요, 그분이 복음의 완결자라는 말씀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복음의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살리는 프로젝트요, 프로그램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과정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못 박힘을 통과해야 하지요. 그런데 그 죽음의 관문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면 절대 그리스도와 함께 살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죄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관문을 주님이 대신 통과해주심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음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일이지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경험한 자만 다시 사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관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경험한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이 첫 번째 관문이었다면, 두 번째 관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관문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자연인으로서 내가 죽은 것이지요. 옛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만일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리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지요.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나도 그분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것이지요. 에베소서2장4절과 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나를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거듭난 것이지요.
(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예전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거든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매 나도 그분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지요. 에베소서2장1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것이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예요. 새 사람이 된 것이지요.
이제 나는 주인이 바뀐 거예요. 내안에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주인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지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의 나는 원수마귀가 지배했었지요. 공중권세 잡은 원수마귀가 나를 다스린 거예요. 그때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았었지요. 육체와 마음의 소욕을 따라서 말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산 것이지요. 그랬던 나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경험한 자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의 죄 때문이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나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한 세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경험한 자라면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동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것이지요. 본문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경험한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은 다시 살아남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확신한다면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신은 이미 주님의 부활의 참예한 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신의 육체가 살아있을지라도 당신은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이요, 부활의 생명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는 새 생명으로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장차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고 죽을지라도 당신은 분명히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부활을 보증해주시고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이지만 현재적 삶속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부활의 영이 있고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생명을 품은 사람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지의 여부로 판결이 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3장5절의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으로 보건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줄을 우리 스스로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요?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증거해 줄 것입니다. 물론 그 증거는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나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이 친히 증거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영적 상태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13장5절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증거는 성령님의 몫입니다. 성령이 내안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내안에 예수님이 계실수도 없고, 성령님이 아니면 내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심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14:26). 미안하지만 내가 성령을 받은 것을 어느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을 깨닫지 못한 경우는 있습니다. 혹은 성령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어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알 수 있다면 당연히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심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주가 되고 왕이 되며, 머리가 되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 믿음이 바로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달걀은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습니다. 유정란은 암탉과 수탉이 교배하여 낳은 달걀입니다. 그러나 수컷의 교배가 없이 암탉이 낳은 달걀도 있습니다. 그것을 무정란이라고 부릅니다. 수탉이 없이 어떻게 알을 낳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닭은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수컷 없이도 알을 낳을 수 있습니다. 혹은 오랜 품종개량을 통해서도 수컷의 수정 없이 알을 낳기도 합니다. 유정란과 무정란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유정란은 어미닭이 품으면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무정란은 아무리 품어도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자도 있고, 생명이 없는 자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지요. 하나님의 생명은 내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냐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요한일서5장12절의 말씀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주 간단합니다. 내게 생명이 있는지의 여부는 내안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나는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초라하고 비천한 자라할지라도 내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지의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유정란이나 무정란의 달걀 생김새가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품어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미안하지만 3주가 지나면 드러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지의 여부가 육체를 입고 사는 이 땅에서는 분별이 쉽지 않습니다. 다들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간입니다.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잠시 후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른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이유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직 믿음은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던 슬로건(솔라 피데)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사는 이유입니다. 내가 사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당당하게 내가 사는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목적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분명히 내가 사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이유를 말입니다.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차원적인 답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혹은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답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당신 안에 당신과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믿음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답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반드시 스스로 답을 해야 할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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