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축하행사에 대한 반대~하석 이용원 선조
고종 20권, 20년(1883 계미 / 청 광서(光緖) 9년) 7월 20일(무술) 2번째기사
형조 참판 이용원이 축하하는 행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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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참판(刑曹參判) 이용원(李容元)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세상에 쓰일 만한 학문이 없고 재주도 남들보다 못하여, 동료들에게 배척을 받은 바 있고, 조정에서도 쓸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충성에서는 남들만 못하지 않으며, 비록 격렬한 논쟁으로 간쟁(諫諍)을 벌린 일은 없지만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 속에 다짐한 구구한 마음은 저 푸른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삼가 근일에 신료들이 올린 글을 보건대, 모두 전하의 덕을 찬양할 것을 청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또 조정의 논의가 격렬하게 일어나 빈계(賓啓)를 올리려 하고,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신에게 그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신은 나아가서 남들을 따르자니 평소의 다짐을 어기게 되고, 물러가 침묵을 지키자니 행동이 또한 역시 스스로를 얽어놓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각오하고 진달하는 바이니, 성명(聖明)께서 밝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아! 지난해 여름의 변란을 겪은 사람들이 오늘날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신하들치고 그 누군들 기뻐서 춤을 추며 우리 전하께서 세운 공적을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존호를 올리는 조치는 당(唐) 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강목(綱目)》에서는 이것을 낮추어 평가하였으니, 이것은 어진 임금들이 답습하여 오류를 범할 바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옛날 한(漢) 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임금 앞에서 성인(聖人)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의 공덕은 그대로여서 후세에 명철한 임금이라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신하로서 그 임금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동한(東漢) 이상의 임금들에게 있는 것이니, 당(唐) 나라 이하의 임금들과 같이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라의 형편을 돌이켜 보면, 방향이 없으며 법과 기강은 무너지고 간사한 자들이 날로 성하고 있으며 재정이 바닥나서 지출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이런 결과로 군사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다행히 조종(祖宗)의 말없는 도움에 의하여 반란이 겨우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정사를 하기 위하여 마땅히 모든 신료들이 분발하여야 하며 근본을 견고하게 하지 않았을 때의 두려움을 잊지 말고서 수습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는 힘쓰지 않고 도리어 평화로운 나라에 아무 걱정이 없는 것처럼 겉치레를 하는 형식에 매달리고 있으니, 참으로 실질에 힘쓰는 도리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의 연세가 한창이시니, 하고많은 세월에 축하할 날이 없지 않을 것인데, 하필 이때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은 외람되게 하찮은 견해를 가지고 온 조정의 의견을 반대하여 나섰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신은 단지 전하를 생각할 뿐이고 신의 생사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바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애당초 그렇게 크게 논할 일이 아니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원본】 24책 20권 38장 A면
【영인본】 2책 102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변란-정변(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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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원(容元) [1832(순조 32)∼1911(명치 44)]
자는 경춘(景春), 호는 하석. 병은(秉殷)의 계자이며 생부는 병식(秉植)이다.
1858년(철종 9) 진사 · 금산군수를 지내고, 1875년(고종 1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춘천부사를 지내고 대사성 · 승지를 역임했다. 1869년(고종 6)에 가선대부가 되고 광주유수 · 호조참판 · 대사간 · 대제학을 지내고, 명성태황후가 평양에 이궁(離宮)을 짓는 것을 반대상소하여 흑산도에 귀양갔다. 후에 기로소에 들었다. 문집 20권이 있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옥곡리 해좌에 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광산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