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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15일(일요일) 서초구 [인릉산 & 범바위산 & 헌인릉] 산행일정
산 : 서초구 [ 인릉산 & 범바위산 & 헌인릉 ]
[부부가 함께 묻힌 자그마한 인릉
1400년에 조선의 3대 임금에 오른 태종과 1800년 23대 국왕이 된 순조. 둘의 즉위 연도는 정확히 400년의 시차가 있다. 이들이 국왕이 되는 과정과 왕으로서의 삶 또한 400년의 시차만큼이나 판이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제위 기간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생왕국 조선의 기초를 다졌다. 반면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순조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거쳐 장인의 ‘세도정치’로 빠져들었다.
왕릉은 두 왕의 생전 모습을 닮았다. 조선왕릉 최대 규모에 보통 하나씩 있는 석물도 몽땅 두 개씩 갖춘 태종의 헌릉에 비해 순조의 인릉은 척 보기에도 자그마한 합장릉이다. 조선의 스물 일곱 왕 중에서도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이렇게 판이한 성격의 왕을, 이렇게 대조적인 왕릉에, 그것도 한자리에 모신 것은 유래를 찾기 힘들다. ‘조선국왕 비교체험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재실을 먼저 보고 입구에 들어서면(참, 재실 마당에 나란히 있는 잡석들도 놓치지 마시길), 인릉을 지키는 홍살문이 눈에 들어온다. 왕의 재위 순으로 태종의 헌릉을 먼저 볼까? 아니다. 규모가 작은 인릉을 먼저 보는 것이 동선에도 맞고, 둘의 규모 차이 때문에 아이가 느낄지도 모를 실망감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인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거기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 석양 등 대부분의 석물들은 다른 왕릉에 있던 것들을 재활용(?)했다. 세종의 영릉과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희릉을 천장하면서 남은 석물들을 사용한 것이다. 인릉을 만들면서 새로 제작한 석물은 망주석과 석마, 석양 일부뿐이다. 순조가 세상을 뜰 당시 나라 살림이 그만큼 어려웠던 탓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백성들의 어려움도 극에 달해 민란이 들끓었다.
조선 왕릉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헌릉
자, 이번에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본인이 직접 왕위에 올랐고, 재위 당시에는 왕권강화를 통해 신생왕조를 반석에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계모이자 정적이던 신덕왕후에게는 무덤에까지 복수를 하고야 말았던 집요함의 소유자, 태종의 헌릉을 살펴볼 차례다.
앞서 말했듯 헌릉은 조선왕릉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살아생전 태종의 모습을 보듯, 병풍석에 난간까지 두른 당당한 봉분을 남들보다 두 배 많은 석물들이 빽빽이 지키고 있다. 한마디로 빈틈이 없다. 두 번의 칼바람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생전에도 이렇듯 빈틈없는 경호를 받았을 것만 같다.
다른 왕릉과 달리 헌인릉은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 덕분에 위풍당당한 봉분과 석물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 가능하다. 왠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무인상을 살펴보는 것도,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물의 종류를 맞혀보는 것도 재미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옆에는 석마가, 봉분과 곡장 사이에는 석호와 석양이 있다.
태종은 잔인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자식 둘을 죽인 계모의 묘를 사대문 밖으로 이전하는 것도 모자라, 거기서 나온 석물을 가지고 청계천 보수공사에 사용해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0년 뒤, 할머니와 장인의 손아귀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던 순조와 비교한다면?
시대를 뛰어넘는 이런 비교가 불공평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우리 같은 백성의 입장에서는 농사 짓는 곡괭이를 들고 민란으로 나서게 만드는 무능하고 허약한 국왕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자식(효명세자)을 앞장세워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던 순조와 지저분한 일은 자기 손으로 전부 해결하고 깨끗한 나라를 물려주었던 태종을 비교하면 말이다.]
산행코스: [ 옛골 버스 정류장 ~(3.8km)~ 인릉산~(635m)~ 범바위산 ~(1.0km)~ 헌인마을 ~(1.3km)~ 헌인릉 ~(0.8km)~ 헌인릉 버스 정류장 ] (약 7.5km)
일시 : 2023년 10월 15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초구 : 최저기온 12도C, 최고기온 21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4시간 소요)
08:00~08:43 연신내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양재역으로 이동 [43분 소요]
08:43~09:00 양재역 10번 출구로 나와서 양재역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옛골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4432번 버스 승차 대기
09:00~09:25 양재역 버스정류장에서 4432번 버스를 타고 옛골 버스정류장으로 이동 [25분 소요]
* 09:25~10:55 서울 서초구 신원동에 있는 옛골 버스정류장에서 산행출발하여 인릉산(仁陵山, 326.5m)으로 이동
[인릉산(仁陵山)은 서울특별시의 서초구와 경기도 성남시에 걸쳐 동서향으로 뻗은 산으로 해발 327m의 산이다.
인릉산이란 산 이름은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의 조산(朝山)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여겨진다. 인릉산 아래로 용인서울 고속도로의 심곡터널과 세곡터널이 지나간다. 이곳에서 발원한 물은 세곡천으로 흘러가 탄천으로 합류한다. 성남의 대왕저수지도 여기서 내려온 물이 고여 만들어진다.
인릉은 대모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원래 대모산은 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 하여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의 헌릉이 자리하면서 '노파'보다는 '어미'라 부르는 것이 낫다는 세종의 어명에 의해 대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10:55~11:05 사진촬영 후 휴식
* 11:05~11:15 범바위산(260m)으로 이동
[옛날 나무꾼이 밤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 바위를 보고 호랑이인 줄 알고 놀랐다고 해서, ‘범바위’라 했다고 한다.]
* 11:15~11:30 사진촬영 후 간식
* 11:30~12:00 헌인마을로 이동
* 12:00~12:25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헌인릉(獻仁陵)으로 이동
* 12:25~13:05 헌인릉 탐방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호)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이 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태종과 세종이 합장된 왕릉이었으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세종의 능을 이장하자는 추진에 따라 1469년(예종1년)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로 이장하여서 태종의 능만 남았다가 후에 23대 임금인 순조가 안장되면서 현재의 헌인릉이 되었다.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석물도 다른 곳보다 딱 두 배가 많은 헌릉과 그에 비해 병풍석도 없는 자그마한 봉분 하나에 부부가 같이 묻힌 인릉. 두 임금은 능의 모습처럼 다른 길을 걸은 왕이었다.]
[세종이 승하한 후 19년간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등 왕이 4번 바뀌고 세조와 예종의 장남이 잇따라 요절하자, 세종대왕의 능을 지금의 헌인릉에서 여주의 영릉으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조선 제3대 왕 太宗 이방원(李芳遠) - 왕권 강화로 창업의 기틀을 다진 왕
출생 1367년(공민왕 16)
사망 1422년(세종 4)
본명 이방원(李芳遠)
본관 전주(全州)
목차
남다른 총명함과 재능으로 집안의 자랑이었던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 준 태종
내가 조선의 창업 군주다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다
수성 군주 세종의 시대를 위한 태종의 마스터 플랜
남다른 총명함과 재능으로 집안의 자랑이었던 이방원
태종은 1367년(공민왕 16)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방원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받았다. 자라면서 유학 공부에도 심취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7세가 되던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인 집안에 학자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원에게 특별히 학식이 높은 선생님을 붙여주고 여러 선비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방원은 글만 읽는 유생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버지 못지않은 무인의 기질과 그보다 큰 야망이 있었다.
방원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 4)에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정몽주는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성계가 이색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은 친명파로서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고려의 정치 개혁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역성혁명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원은 1389년(창왕 1) 10월 11일 이성계의 생일날 정몽주와 변안렬을 불러 〈하여가〉를 부르며 최종적으로 역성혁명에의 동참 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렬은 〈불굴가〉를 불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래서 아버지 이성계의 반대에도 기어이 정몽주를 죽이고 만 것이다. 이 일로 방원은 이성계의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그것이 조선 창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새 왕조를 열고자 했던 꿈은 방원의 꿈이기도 했다.
방원은 민제(閔霽)의 딸(원경왕후 민씨)과 혼인해 4남 4녀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첫째 아들이 폐세자된 양녕대군이고, 셋째 아들이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이다. 이 밖에 11명의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두었다.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 준 태종
정몽주를 격살하고 역성혁명의 1등공신이 된 태종.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 왕좌에 오르기까지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으며,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1, 2차 왕자의 난 모두 이방원이 아닌 그의 정적이 먼저 난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이를 제압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방원에게 먼저 난을 일으키고자 했던 마음이 없었을까? 1차 왕자의 난만 하더라도 명백히 이방원의 쿠데타였다. 정몽주를 죽인 일로 태조의 미움을 받고 있던 방원이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의 경우도 방간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이방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특히 방원은 정종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며 세제가 아닌 세자에 책봉되는데, 이는 '적장자 무후(無後)이면 중자(衆子), 중자 무후이면 첩자(妾子) 승중(承重)'이라는 종법(宗法) 정신을 따른 것이다. 정종은 동생 방원을 왕세자로 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부터 왕 노릇 하는 자가 저이(儲貳, 세자)를 세우는 것은 종사를 높이고 국본(國本)을 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문(禮文)을 상고하면, 적자와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말이 있는데, 혹은 세대로 하든지 혹은 차제(次弟)로 하든지 오직 지당하게 할 뿐이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몸으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공경하고 근신해 다스리기를 생각한 지가 이제 2년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적사(嫡嗣)가 없고 다만 서얼이 있는데, 혼매하고 유약해 지혜롭지 못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마땅히 어진 모제(母弟)를 세워 굳건한 국본을 정해야만 하겠다. - 《정종실록》 권 3, 정종 2년 2월 4일
그러나 왕의 동생이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 것이 종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이때 대신으로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했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 했다. - 《정종실록》 권 3, 정종 2년 2월 4일
방원이 형인 정종의 양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서 세자로 만든 것은 태조의 적통자임을 자임하는 방원의 뜻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자가 된 방원은 곧바로 사병 혁파를 단행해 병권을 장악했다. 2차 왕자의 난 때 정종의 갑사(甲士) 몇 명이 방간의 측에 섰던 것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갑사란 중위(中衛)인 의흥위(義興衛)에 속한 군사로 궁내에서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왕의 사병이라 할 수 있는 갑사 중 일부가 반란군에 참여했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방원은 정종과 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했다. 결국 병권까지 장악한 방원은 세자에 오르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정종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400년 11월의 일이었다.
이복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과감히 제거해 나갔다. 또한 정동(貞洞)에 있던 신덕왕후의 묘를 훼손하고 동소문 밖(지금의 정릉)으로 옮겼을 뿐 아니라 신덕왕후의 묘지석을 광통교(廣通橋)에 깔아 도성의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만들었다. 자신이 죽인 이복형제들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적통을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자행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계비라도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태종이 권력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이 밖에도 태종은 왕실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재정리해 태조와 자신의 직계만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종과 자신의 서자는 물론이고 태조의 방계인 이원계(李元桂)와 이화 역시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켰다. 자신이 죽은 후에 종친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조치한 것이다.
특히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는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태종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좌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또한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외척인 민씨 형제를 몰아내는 데 앞장설 만큼 태종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도 그를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킨 것을 보면 태종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다.
태종의 철저함은 왕실 족보 정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을 만들어 적자가 아닌 사람은 아예 문과 시험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재가녀(再嫁女)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출세를 제한했다. 서얼과 재가녀 자손에 대한 금고법은 조선 시대 최고의 악법으로 꼽힌다.
내가 조선의 창업 군주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은 것이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왕에게 주는 일종의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장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에서 종주국인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개국 후 10년이 지나도록 명나라의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 정벌 계획 등으로 인한 외교적 마찰과 명나라의 내부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즉위한 후에야 드디어 고명과 인신을 받게 된 것이다. 태종이 스스로를 창업 군주로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외적으로 친명 노선을 강화한 태종은 1401년(태종 1)에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데 이어, 1402년(태종 2)에는 하륜(河崙)을 명나라에 보내 새로 등극한 성조(成祖)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고명과 인신을 새로 내어 줄 것을 요청했다. 명나라 성조는 조카인 혜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미 혜제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조선에서 자신에게 새로 고명과 인신을 받겠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태종의 외교적 수완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은 이와 같은 대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도 정국의 안정을 꾀하며 창업 군주다운 업적을 하나둘 이루어 나갔다. 우선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버지 태조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태종이 아버지 때에 설계한 한양에 수도를 다시 옮겨 온 것이다. 그는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새로 지어 경복궁과 번갈아 가며 머물렀다. 경복궁은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 세우고 왕자의 난으로 희생된 방석과 방번 형제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태종이 경복궁에 머무는 것을 싫어해서 새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쨌든 태종이 새 궁궐을 지어 법궁(法宮)과 이궁의 양궐(兩闕) 체제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통치 기반이 될 한양도 그에 걸맞는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은 이 밖에 서적을 인쇄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불교 개혁을 단행해 국고를 충실히 하는 등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진했다.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
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왕권 강화를 통한 정국 안정이었다. 그는 먼저 관제 개편을 단행해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六曹)가 분장하게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채택했다. 육조직계제는 육조에서 각각의 담당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으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대부분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펼친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와는 다른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였다.
그러나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는 정도로 만족할 태종이 아니었다. 태종이 빼어 든 보다 강력한 왕권 강화 카드는 외척 세력의 견제였다. 외척은 왕이 힘이 없을 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득세할 경우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절대 권력을 꿈꾸었던 태종에게 외척의 득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종이 가장 경계한 외척은 처갓집인 여흥 민씨 집안이었다. 여흥 민씨 집안에는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를 비롯해 아들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민무휼(閔無恤), 민무회(閔無悔)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원경왕후가 누구인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여장부가 아닌가? 민무구와 민무질도 방원이 왕이 되는 데 원경왕후 못지않게 공이 컸다. 태종은 바로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공신인데다 세자의 외숙이라는 지위까지 가진 민씨 집안 형제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1406년(태종 6)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갑작스러운 왕의 선위 발언에 놀란 백관과 종친 들이 펄쩍 뛰며 명을 거두라 아뢰었다. 선위는 불가하다는 반대 상소도 빗발쳤다. 그러자 태종은 며칠 만에 못 이기는 척 선위하겠다는 명을 철회했다.
태종의 이 선위 파동으로 화를 입게 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내심으로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의 죄를 제일 먼저 청하고 나선 사람은 영의정 부사 이화였다.
전하께서 장차 내선(內禪)을 행하려 할 때, 온 나라 신민(臣民)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輿望)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復位)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이는 대개 어린아이를 끼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고자 한 것이니, 불충한 자취가 소연(昭然)히 나타나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이화는 상소를 통해 민무구, 민무질 등을 금장(今將)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금장의 죄란 그들이 태종에 대해서 역심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일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고, 결국 1410년(태종 10)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태종의 선위 파동은 외척인 민씨 집안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대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죽음으로 민씨 집안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민씨 집안에 대한 태종의 견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민씨 형제의 막내인 민무회가 태종에 대해서 불충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형인 민무휼 역시 민무회가 불충의 죄를 지은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두 사람 역시 1416년(태종 16)에 각각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태종은 이들 형제의 누나인 원경왕후마저 폐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왕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간신히 폐서인이 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태종의 외척에 대한 견제는 민씨 집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태종의 다음 견제 대상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의 외척 청송 심씨 집안이었다. 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 심온(沈溫)은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1420년(세종 2), 심온은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 동생 심정(沈泟)이 상왕인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평한 것이 알려져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심온 역시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고, 사약이 내려지자 자진했다.
태종은 외척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견제했고, 그 결과 이무(李茂), 이숙번 등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태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으며,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다
정적에 대한 과감한 제거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한 태종은 창업에서 수성(守成)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의 대를 이어 수성 군주가 되어 줄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1404년(태종 4)에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양녕의 나이 11세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난 양녕은 착실히 공부를 하기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즐겼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여색을 즐겨 자주 궁궐 밖으로 나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태종에게 이런 양녕이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왕위에 오른 것에 부담을 느낀 태종은 장자인 양녕을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양녕이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도 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태종도 더 이상 참지 못할 일을 양녕이 저지르고 말았다. 평소 기생부터 여염집 여자까지 가리지 않고 놀아나던 양녕이 급기야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간통을 저지른 것이다. 양녕은 어리에게 완전히 빠져서 아예 동궁전에 데려다 놓고 매일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어리를 궁중에서 내쫓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양녕은 조금도 반성하는 빛이 없이 어리를 장인인 김한로(金漢老)의 집에 숨겨 두고 몰래 만났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노해 김한로를 귀양 보내고, 양녕을 폐위시키는 절차에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 마침내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태종은 여러 대소신료들에게 "양녕의 두 아들 중 첫째로 하여금 세자의 자리를 잇게 할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할지 의논해 아뢰라."라고 했다. 비록 양녕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 폐하지만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또다시 깨고 싶지는 않았기에 양녕의 첫째 아들로 그 뒤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양녕의 첫째 아들은 불과 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박은(朴訔), 유정현(柳廷顯), 조말생(趙末生) 등이 양녕의 어린 아들 대신 어진 사람으로 세자를 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셋째 아들 충녕이었다.
충녕은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해 왕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그가 장자가 아닌 것이 마음에 걸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터였다. 태종은 원경왕후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평소 양녕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원경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라며 충녕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태종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하지만 결국 태종은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며 충녕을 세자로 삼을 것을 명했다.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부(儲副), 세자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곧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일에는 하나의 대개(大槪)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리에 합당하도록 기대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 제(禔)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여겨 장성해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스물이 넘어도 도리어 군소배(群小輩)와 사통(私通)해 불의한 짓을 자행했다. 지난해 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이었다. 제가 이에 그 허물을 모조리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上書)해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는 듯했으나, 얼마 가지 아니해 또 간신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 다시 전철(前轍)을 밟았다. 내가 부자(父子)의 은의(恩誼)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제는 이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憤然)히 상서했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해 전혀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다.
정부, 훈신(勳臣), 육조, 대간, 문무백관이 합사(合辭)하고 소장(疏狀)에 서명(署名)해 말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하거나 막중한 부탁(付託)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의 초창(草創)한 어려움을 우러러 생각하고, 또 종사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생각해 대소신료의 소망(所望)에 굽어 따르시어 공의(公義)로써 결단해, 세자를 폐해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서 즉시 저이(儲貳)를 세워서 인심을 정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충녕대군은 영명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의 여망(輿望)에 부합합니다." 했다.
내가 부득이 제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대군 도(祹)를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愛憎)의 사심(私心)이 있었겠느냐? 아아! 중외(中外)의 대소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 《태종실록》 권 35, 태종 18년 6월 3일
항간에는 양녕이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 기행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진위를 알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양녕이 왕세자로서 적절치 못한 행실로 부왕인 태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태종이 단단하게 다져 놓은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결국 새 왕조를 안정시키고 번성하게 하려는 태종의 원대한 포부는 왕세자의 교체로 그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게 되었다.
수성 군주 세종의 시대를 위한 태종의 마스터 플랜
세자를 교체한 태종의 마음은 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충녕이 수성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춰 주기를 바란 것이다. 기본적인 성품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직접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또 다른 것이었다. 결국 태종은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여 만에 선위를 발표했다. 곧바로 실전에 투입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물려주고 뒤를 봐주어야 한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태종은 그만큼 뛰어난 정치력과 결단력을 가진 왕이었다.
1418년(태종 18) 8월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태종의 소임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태종의 상왕 정치가 시작되었다. 태종은 여러 대소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상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이다. 또 나라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해 각각 가부를 진달(陳達)하게 해 시행하게 하고, 나도 마땅히 가부에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가(可)하다. - 《태종실록》 권 36, 태종 18년 8월 10일
세종이 수성 군주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출 때까지는 태종 자신이 병권을 쥐고 정사에 관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선대왕들이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정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고 왕위에 오르는 순간, 태종은 이미 모든 악명(惡名)은 자신이 지고 가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한 왕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을 알면서도 왕실 족보를 정리하고, 외척과 공신 들을 과감히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만큼은 어진 성군으로서 정사에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이 세종을 대신해 폐세자 양녕의 지지 세력을 정리하고, 외척 제거에도 직접 나선 것이다. 또한 병권을 쥐고 있겠다는 것은 내부의 적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방해하는 대외 세력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해 직접 제압하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세종 재위 초기에 행해진 대마도 정벌 등의 군사 작전은 상왕인 태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태종은 세종이 성군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심지어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다."라면서 세종에게 빈(嬪)과 잉첩(媵妾)을 더 들이도록 권하기도 했다. 다만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불충의 죄를 지었으니 그의 딸인 소헌왕후를 폐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에는 반대했다.
이처럼 창업 4대 만에 해동의 요순 시대를 연 수성 군주 세종의 탄생은 태종의 철저한 마스터 플랜에 따라 이루어졌다. 태종은 할 수만 있다면 세종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계속 뒤를 봐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지 4년 만인 1422년(세종 4)에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부터 세종의 시대가 열렸다. 세종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왕이었고, 그를 만들어 낸 것이 태종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
시호 :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출생 연도 : 1365년(공민왕 14)
사망 연도 : 1420년(세종 2)
본관 :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원경왕후는 조선전기 제3대 태종의 왕비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태어나 1420년(세종 2)에 사망했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라는 칭호를 얻었다.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후궁을 두는 문제로 태종과 불화가 심했고 친정 동생들로 인해 폐비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 한 태종의 정책에 동생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자진했고 나머지 두 형제마저 불충 죄로 잃는 불행을 겪었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이방원(李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 이방원을 도왔다. 1400년(정종 2) 2월에 이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 해 11월에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해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이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10여 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린 시위패(侍衛牌: 고려 말 조선 초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 담당 병종으로 일명 시위군이라고도 함)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무기를 몰래 숨겨 두었다. 일이 발생하던 그 날 이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의 상종문제로 태종과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태종과의 불화는 성품의 강한(强悍: 마음이나 성질이 굳세고 사나움)과 빈어(嬪御: 빈들이 왕을 모심)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더욱 심각해졌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이미 1402년(태종 2)에 왕이 창종(瘡腫: 헌데가 생겨 부은 것)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집권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정비가 이에 관여한 것 같지는 않으며,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불충죄로 몰리는 한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파동(禪位波動: 왕위를 물려주는 일에 관련된 파동)은 민무구의 투옥을 유발하였다. 이는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원경왕후의 지나친 투기와 불평은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곧 그들 사이를 더욱 벌려 놓았다. 또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의 방자한 행동을 부추겼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옥에 갇힌 지 4개월 후, 정비가 금령을 범하고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그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만다.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태종은 격분하였다.
그 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 나갔다.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 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 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다. 1409년 10월에 그들의 투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1년 뒤에 제주도로 귀양가 있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자진(自盡)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그 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샀다. 그리하여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내사(內事: 왕궁 안의 일 혹은 내명부의 일)를 대신 섭주(攝主)할 만한 여자를 간택하려고 일빈이잉(一嬪二媵: 정실 왕비 대신에 1명의 빈과 2명의 애첩을 두는 것)의 빈어제도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였다. 또한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媵室: 첩 혹은 후궁을 이르는 말)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민씨 형제의 투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5년 뒤에 민무휼(閔無恤) · 민무회(閔無悔) 두 형제에게 비화하였다.
1415년 4월 민무회가 다른 사람의 노비소송(奴婢訴訟)을 둘러싼 시비에 관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옥에 갇히자 그해 6월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일전에 민무휼, 민무회와 어머니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아바마마께서 민무구 형제를 죽인 것에 대해 불만을 토했다”는 진술을 해 이들 형제들을 더욱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갔다.
양녕대군은 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집에서 연회하면서 밤이 깊도록 상왕 정종(노영국)의 시첩이었던 기생 초궁장을 끼고 공주의 대청으로 들어가 술을 마시다 물의를 일으키는 등 잦은 기행으로 부왕 태종의 눈 밖에 났던 차에 외숙들의 죄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불명예를 씻어 입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대하사극 ‘대왕세종’이 그리는 양녕대군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국 이같은 양녕대군의 고변으로 인해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민무휼, 민무회 형제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양녕대군과 이들 형제를 병조정청에서 대질시켜 대체의 윤곽을 잡게 된 태종은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직첩을 거두어 서인으로 삼은 뒤 유배시켰다. 하지만 대하사극 ‘대왕세종’에서 그려진 것처럼 원윤 비가 출생하였을 때 원경왕후가 질투해 모자를 죽이려고 한 사실이 밝혀지자 유배지에서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게 된다. 국문 중 민무질, 민무구 두 형이 죄없이 죽음을 당했다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돼 원주로 유배된 후 4일만에 두 형제 모두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다.
이와 같이 정비는 태종의 무자비한 외척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된 채 친정 4형제를 참혹하게 잃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였으며, 1420년 7월 56세로 사망하였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 · 효령(孝寧) · 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 · 경정(慶貞) · 경안(慶安) · 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1호에 있다.]
[순조(純祖) :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1834). 김조순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암행어사 파견,《만기요람》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출생-사망 : 1790 ~ 1834
재위기간 : 1800년 ~ 1834년
가족관계 :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아버지 정조(正祖), 어머니 수빈박씨(綏嬪朴氏),
이름 공(玜). 자 공보(公寶). 호 순재(純齋).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묘호 외에 6차례에 걸쳐 존호(尊號)가 바쳐져 정식 칭호는 70자에 이른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실시되어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1803년 말에 친정을 시작한 후 몇 단계에 걸쳐 그들을 축출하였다. 그 후로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그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게 되었다. 그 이후 죽을 때까지 태도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835년(헌종 1)에 세실(世室)로 모셔졌으며, 저술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묶여진 데 더하여 문집으로 《순재고(純齋稿)》도 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인릉(仁陵)이다.]
[순원왕후 (純元王后) :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왕비.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 초간택·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다.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가 1802년(순조 2) 10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삼간택 문제를 놓고 시·벽파(時僻派)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당시 대왕대비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 김관주(金觀柱)와 권유(權裕)들의 방해 움직임이 있었다. 1809년(순조 9) 문조(文祖)를 낳았다. 문조는 1812년(순조 12)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문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순조 30) 22세로 죽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하고 1834년(순조 34) 익종에 추존되었다.
순원왕후는 1827년(순조 27) 존호 명경(明敬)이 올려졌고 헌종 연간에 왕대비·대왕대비에 진호(進號)되었다. 그 뒤 문인(文仁)·광성(光聖)·융희(隆禧)·정렬(正烈)·선휘(宣徽)·영덕(英德) 등의 존호가 더해졌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원상(院相)에 권돈인(權敦仁)을 지명했다. 그리고 영조의 혈맥을 잇기 위해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의 셋째 아들을 지목해 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51년(철종 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책봉해, 그 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이룩하였다.
1857년(철종 8)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헌(慈獻)·현륜(顯倫)·홍화(洪化)·신운(神運) 등의 존호가 뒤에 추상되었다. 『순원왕후어필봉서(純元王后御筆封書)』가 전한다. 명온(明溫)·복온(福溫)·덕온(德溫)의 세 공주가 있다.
시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純元王后)이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에 있다.]
* 13:05~13:25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3:25~13:45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버스 정류장에서 양재역으로 가는 741, 440, 452번 버스 승차 대기
13:45~14:07 헌인릉 버스정류장에서 741, 440, 452번 버스를 타고 양재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2분 소요]
14:07~14:20 양재역으로 이동하여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4:10~14:53 양재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 [43분 소요]
[헌인릉&범바위산&인릉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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