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지구 온난화’를 소재로 한 영화 상영관 앞의 배롱나무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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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19]
살금살금 비 내리고, 새벽 바람의 느낌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어느 큰 빌딩 앞 너른 마당에서 꽃이 활짝 피어난 배롱나무를 보았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나무입니다.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배롱나무는 중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없었지만, 최근에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나무를 키우는 분들의 솜씨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기후가 더워진 탓도 분명한 이유일 겁니다. ‘지구 온난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앞에서 만난 배롱나무는 그래서 한번 더 바라보게 됩니다.
백일 동안 붉은 꽃이 피어 있는 나무라 해서, 처음엔 백일홍나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발음이 이어지면서, 훨씬 더 예쁜 이름을 갖게 된 배롱나무는 수형이 아름다운 대표적인 정원수입니다. 꽃이 없는 계절에도 충분히 사람의 눈길이 머무를 만한 나무이지요. 배롱나무는 부담스러울 만큼 큰 키로 자라지 않으며, 나뭇가지를 사방으로 고르고 넓게 펼쳐서 정원에 키우기에 매우 좋은 나무입니다. 대개의 배롱나무는 높이의 두 세 배 정도 넓이로 나뭇가지를 펼쳐서 우아한 모습을 갖춥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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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펼친 나뭇가지는 쉼 없이 가만가만 흔들립니다. 구불구불 펼친 나뭇가지 아래의 줄기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배롱나무의 줄기는 매끈한 피부를 가졌지요. 노란 빛이 도는 옅은 갈색의 수피(樹皮)에 드리운 고운 얼룩무늬는 배롱나무의 맵시를 한껏 뽐내게 하는 매력적 특징입니다. 비슷한 얼룩 무늬의 피부를 가진 나무로 모과나무나 노각나무를 꼽을 수 있는데, 모두가 나무 줄기만으로도 바라보는 기쁨을 주는 나무입니다. 잎 떨어진 겨울에도 배롱나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배롱나무를 처음 보는 친구가 있으면 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나무 줄기를 살살 간지럽혀 보라고 합니다. 분명 나뭇가지가 간지러워서 부르르 떨 것이라고 덧붙이지요. 간지럼을 태우며 나뭇가지 끝을 바라보는 벗들은 깜짝 놀라며, “엇, 정말로 간지럼을 타네.”라며 놀라곤 합니다. 배롱나무는 가지를 넓게 펼치기 때문에 실은 하루 종일 가지를 살살 흔듭니다. 그러나 거기에 눈길을 주지 않다가, 간지럼을 태울 때에야 비로소 가지 끝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걸 보고 놀라게 되는 거지요. ‘흥미로운 속임수’라고 해도 될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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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와 함께 우리 산과 들의 여름을 아름답게 하는 나무는 단연 무궁화입니다. 뜨거운 이 여름 무궁화는 쉼 없이 꽃을 피우는 중입니다. 아침에 피어난 꽃은 저녁에 지고, 다시 또 그 곁에서 다른 꽃이 피어나면서 배롱나무처럼 여름 백일 동안 내내 꽃을 피웁니다. 무궁화는 대략 하루 아침에 스무 송이에서 서른 송이를 피우고, 이튿날 또 그만큼의 꽃송이를 올립니다. 백일 동안 그렇게 꽃을 피우니, 대략 계산해 보아도 한 계절 동안 무려 삼천 송이의 꽃을 한 그루의 나무가 피우는 겁니다.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이 놀랍습니다.
무궁화는 나라 꽃이라는 까닭에 뭔가 더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런 부담이 오히려 무궁화 꽃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라 꽃이라고는 하지만, 무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큰 확신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꽃 그 자체로서보다는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을 함께 겪어온 나무라는 문화적 의미가 앞서는 나무인 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식물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담담한 마음이 더 필요합니다. 무궁화는 꽃 한 송이만으로도 무척 아름다운 나무라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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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궁화라고 이야기하지만, 무궁화에는 종류가 참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무려 2백 여 종이나 있습니다. 나무의 수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꽃 모양에서 차이를 보이지요. 꽃송이의 빛깔만 보더라도 분홍 빛과 흰 색의 꽃이 있는가 하면, 분홍보다 강한 보랏빛이 있는가 하면, 파란 빛이 도는 꽃도 있습니다. 거기에 꽃잎 전체가 한 가지 색인 꽃도 있고, 가운데 부분 즉 꽃받침 쪽에 붉은 색이 짙게 박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꽃잎이 가느다랗게 나뉘어져서 꽃송이의 생김새 자체가 다른 꽃도 있지요. ‘안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토종의 무궁화가 그런 모양의 꽃을 피우지요.
‘안동’ 무궁화를 이야기하니, 경북 안동의 예안향교 앞마당에 서 있는 늙은 무궁화 ‘안동’이 떠오릅니다.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모든 무궁화를 통틀어 몇 안 되는 가장 크고 오래 된 나무인데, 안타깝게도 그는 이태 전에 수명을 다하고 고사(枯死)했습니다. 지난 봄에 예안향교를 찾아 보니, 아예 나무가 서 있던 흔적까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기에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예안향교의 무궁화는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무이기에 아마도 오랫동안 그리움으로 남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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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태풍 소식도 들려옵니다. 연달아 발생한 두 개의 태풍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많지 않으리라고 합니다만, 태풍은 태풍이고, 또 다른 태풍이 더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니,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활동 중인 태풍 12호와 13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 나무의 이름을 가졌더군요. 12호의 이름은 장미과의 나무 이름은 ‘짜미(Trami)’이고, 13호는 ‘복숭아야자(Bactris gasipaes)’의 이름인 ’페바(Pewa)’입니다. 늘 싱그럽게 자라는 나무들처럼 편안하게 그리고 우리의 삶을 늘 평화롭게 지켜온 나무들처럼 평온하게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태풍 지나면 바람에는 완연한 가을 내음이 묻어나겠지요. 갈무리의 계절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고한 나무들이 한해의 노동을 마무리하고 초록 잎을 내려놓기 전에 열매들을 맺겠지요. 이미 모감주나무 열매는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만, 다른 나무들에서도 차츰 하나 둘 열매를 익혀갈 것입니다. 우리네 가을 풍경을 압도하는 감나무 밤나무의 열매도 익어가겠지요. 그렇게 한해의 모든 노동을 갈무리하는 한가위 명절도 다가올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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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아침 바람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갈무리의 계절’ 가을을 이야기하는 게 아직은 좀 이른 느낌입니다만 계절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먼저 다가오니까요. 가을 갈무리할 열매를 이야기하면서 얼마 전에 펴낸 책에 써두었던 열매 이야기를 가만히 펼쳐 봅니다.
“강을 버려야 물은 바다에 이르고, 꽃을 버려야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는 건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모감주나무 꽃을 보지 못 하고 여름을 보냈다. 혹독했던 여름, 그 나무에도 노란 꽃이 피었던가? 허공에 흩어지는 질문 사이로 꽈리 모양으로 맺힌 모감주나무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꽃 버리고 열매 맺는 건, 생명의 이치이거늘, 비바람 우심했던 탓에 이 가을의 열매가 더 반갑다. 꽃 지는 건 새 꽃 피우기 위한 시작이다. 모감주나무의 꽈리 열매에 들어있을 까만 씨앗이 예쁘게 그려진다. 생명의 순환이 아름답다.” - [나무에게 길을 묻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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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여름, 잘 마무리하시고, 다가오는 가을을 더 풍성하게 맞이하실 수 있도록 지금 우리 앞에 선 하루 하루를 부디 슬기롭게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