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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연못
“정말 오랜만일세, 쓰지구치.”
현관에서 아내 이쿠코에게 흰 가운을 벗기게 하면서 다카기는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게이조에게 말했다.
“응. 그냥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요코와 도오루의 얼굴 말인가? 설마 내 얼굴은 아닐 테지?”
“아냐, 자네 얼굴일세.”
“사내가 사내의 얼굴을 봐서 뭘 어쩌겠다고?”
감식 모직으로 만든 기모노로 갈아입고 다카기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모노의 앞자락이 벌어져 털투성이인 정강이가 드러났다.
“여보, 좀 단정히 앉으세요.”
이쿠코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게이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쓰지구치, 이 사람은 말이야, 죽은 어머니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아. 하루 종일 잔소리만 해대거든.”
하고 말하며 다카기는 행복한 듯이 웃었다. 이쿠코도 흰 이를 살짝 드러내며 따라 웃었다.
게이조는 뜰을 내다보았다. 수목이 둥글게 깎여 있고, 연푸른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아래 피어 있는 보랏빛 패랭이꽃의 자태가 퍽 아름다웠다. 20평쯤밖에 안 되는 뜰이었지만 작은 연못도 있었다. 연못가에는 하얗고 붉은 패랭이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었다.
“패랭이꽃도 아주 아름답군. 아주 멋진 뜰이야.”
“자네 집 옆에 있는 시험림과는 비교도 안 돼.”
“시험림은 영림국 소유야.”
“뭐 자네 거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나?”
게이조의 고지식한 대답에 다카기는 껄껄 웃었다. 게이조는 목을 두세 번 좌우로 움직였다.
“자네 피곤한가?”
“아냐. 요즘 들어 어깨가 좀 걸려서 말이야. 두통하고 이명도 있고…..”
“나이 탓일세. 나도 마찬가지야. 유부남이 되자마자 노화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그래? 자네도?”
게이조는 안심한 듯 다카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귓속에서 벌레가 울고 있는 듯한 심한 이명이 들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을까? 이명이 좀 심한 편인데.”
“걱정할 것 없어.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30년전부터 이명이 들리고 두통이 있다고 하셨어. 어디서 기적 소리가 들린다며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늘 말씀하셨지. 그러시면서도 30년이나 더 사셨어. 우리는 여든까지는 거뜬히 살 수 있어.”
“그럴까?”
“쓰지구치, 오늘은 세 시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한 시간쯤이면 얘기가 끝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집사람하고 집 뒤 공원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지 않겠나?”
“응, 실은….나도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거야. 손님이란 혹시 오타루에 사는 요코의…..그분 아닌가?”
“아니, 자네도 알고 있었나?”
“응, 도오루가 전화를 했더군. 가능하면 이쯤에서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며……”
놀라는 다카기에게 게이조는 간ㄴ략하게 설명했다.
“3자 거두 회담인가?”
“자네하고 먼저 의논하고 나서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보는 편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네.”
“도오루도 어리긴 어린가보군. 여전히 게이코 씨와 만나는걸 보니.”
다카기는 턱을 매만지면서 착잡한 얼굴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 교통사고를 당하게 한 셈이 되었으니 정말 면목이 없네.”
이때 현관 벨이 울렸다. 게이조는 순간 긴장했다.
“어머, 또 장난이야?”
이코코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큰 소리로 웃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 녀석일세.”
다카기가 흐뭇한 듯이 웃었다.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아버지, 다녀왔어요.”
중학교 2,3학년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 둥근 소년이 방에 들어와 쾌활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일찍 왔구나, 교지(共二). 참, 오늘은 토요일이지?”
“네, 공원에 보트 타러 갈 거예요.”
“뒤집히면 물에 빠져.”
“모르세요? 전 수영 선수예요.”
“수영을 잘해도 소용없어. 아직 물이 차서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다카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면서,
“그래, 좋아 갔다와!”
하고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교지는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형 이름은 고이치(公一)야. 두 녀석 이름의 머릿글자를 따면 공공(公共)이 돼.”
“그렇군.”
게이조는 무심코 웃었다.
“아이들의 친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애. 자식을 공공의 소유라고 생각해서 그런 이름을 지은 거야.”
이렇게 말하는 다카기도 훌륭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다시 현관 벨이 울렸다. 이번엔 진짜 미쓰이 게이코인 모양이었다. 게이코는 방석에서 내려와 자세를 가다듬었다. 한쪽 귀에서 또다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다카기 씨? 바쁘실 텐데……..”
친숙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미닫이가 살며시 열렸다. 게이조는 숨을 죽였다. 이쿠코가 앞장서서 들어오고 엷은 푸른색 슈트 차림의 게이코가 뒤따라 들어왔다.
“어서 와요. 이제 다 나았어요? 다친 데는 좀 어때요?”
다카기가 쾌활하게 말했다.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게이코는 다카기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서 게이조에게도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도오루 군의 아버지예요.”
게이코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쓰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도오루가 주제넘은 짓을 해서 다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문병도 못 가뵙고…….”
게이조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제 인사는 그쯤 해두지요. 낳은 어머니와 기른 아버지의 대면은 저도 처음 입회하는데, 왠지 기분이 좀 이상하군요.”
다카기는 앞에 놓인 차를 벌컥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게이코 씨, 나한테 무슨 의논할 일이 있다고 전화로 얘기했는데, 쓰지구치가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은가요?”
“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게이코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요코의 어머니였군. 어쩌면 저렇게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일까? 저 따스한 미소에 누군들 저항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게이코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아까 이 친구한테도 말했지만, 어젯밤 도오루한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늘 부인께서 다카기의 집을 방문하실 테니 한번 만나 뵙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 이렇게 대기하고 있게 되어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저도 꼭 한번 찾아뵙고 고맙다는 인사와 사과의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마침 잘 됐어요.”
담배를 꺼낸 게이조에게 다카기가 재빨리 불을 붙여 주면서 말했다.
“두 사람 다 괜찮다면 게이코 씨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뭡니까, 의논하고 싶다는 게? 그런데 혹시 의논하고 싶다는 것이 요코가 태어날 무렵부터의 일이라면 좀 긴장이 되는 걸요.”
다카기는 농담을 하면서도 눈빛만은 예리하게 빛났다.
“실은 다카기 씨, 쓰지구치 씨도 이미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다쓰야와 요코가 친구 사이가 되었어요.”
“네? 다쓰야와 요코가 친구 사이라고요?”
게이코는 다쓰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흠, 그럼 다쓰야는 요코가 누구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군요.”
“네. 같은 학년이어서 누나나 여동생으로 여겨지지 않는 모양이에요. 다만 저하고 많이 닮아서 관심을 갖게 된 모양인데 그 정도로 끝날지 아주 불안해요.”
다카기는 팔짱을 낀 채 게이코를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게이조에게 돌렸다.
“좀 난처하게 됐군. 그래서 게이코 씨는 어떡할 셈인가요?”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다카기 씨를 찾아뵌 거예요.”
“참,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건 나로서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겠는데요. 게이코 씨가 걱정하는 건 다쓰야와 요코가 친구가 됐다는 일만이 아닐 테니까 말이에요. 걱정이 되는 건 요코에 대한 관심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요.”
게이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카기와 게이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만일 동생이 누나를…하는 생각만으로도 전 너무 두려워서…..”
“그렇다고 해서 누나라는 걸 밝히는 게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그 말이군요. 그래 쓰지구치, 요코 쪽은 어때?”
“도오루의 말에 의하면, 요코는 다쓰야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당연하지. 요코의 처지에서 보면…….”
“그래도 요코는 자신이 누나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걸세.”
“남인 줄 알고 사랑해서도 곤란하고 누나인 줄 알게 되어도 곤란하고……게이코 씨, 요코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지요?”
게이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저란 인간은 정말 무서운 여자예요.”
“여자는 다 무서워요. 게이코 씨만 그런 게 아녜요. 그건 그렇다치고, 이거 어떡하지? 쓰지구치,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나?”
“글쎄, 그냥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이대로 말인가?”
“다쓰야 군이 요코를 사랑하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다이쇼 시대에 태어난 우리 구세대들하고는 달라서 의외로 순수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게이조답지 않게 낙천적인 말이기도 하고, 언제나 문제를 즉시 해결하지 못하는 게이조다운 말이기도 했다.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 요코는 영리한 아이니까 아무 탈 없이 대학을 마칠 수 있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전 불안해요. 다쓰야가 조만간에 사실을 다 알게 될 것만 같아요.”
“그땐 끄때 가서 생각해 보자구요, 게이코 씨. 알게 될지 어떨지 모르잖아요. 그보다도 도오루 군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어요. 게이코 씨와 아는 사이인 도오루가 요코의 오빠라는 것이 알려지면 일이 복잡해져요. 그렇지, 쓰지구치?”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게이코에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도오루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쿠코가 다급이 안으로 들어와 다카기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다카기는 벌떡 일어났다.
“실례! 급한 수술 환자가 있어서.”
다카기는 방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허리띠를 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간[임신, 분만, 산욕기에 경련 발작과 의식 상실을 일으키는 질환] 환자인가?”
다카기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게이조가 중얼거렸다.
“어머, 무서워라.”
게이코는 아름다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뜰의 연못에서 금붕어가 뛰어오르는 소리가 뜻밖에 크게 들렸다. 연못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뵙게 되어 정말 기뻐요.”
게이코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별 말씀을……”
게이조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멋쩍은 대답을 했다.
“전 왠지 너무 불안해서 요즘 들어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쓰지구치 씨를 빕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제 안심이 돼요.”
“네………..”
“다쓰야는 성미가 과격해요. 제가 지은 죄를 알게 되면 절대로 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저를 우상시하고 있을 정도라 아마도 죽여 버리려고 할지도 몰라요.”
“설마 그런…….”
“아니, 다쓰야는 그런 애예요. 제가 그 아이 손에 죽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쓰야의 삶이 엉망이 되잖아요. 그러면 남편 미쓰이도, 다쓰야의 형 기요시도 자연히 끔찍한 일생을 보내게 되겠죠. 이것저것 생각해 보면 차라리 제가 죽어 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쓰지구치 씨.”
게이코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낳는 것은 기르는 것보다 쉽다는 말이 있어요. 무엇보다 요코는 제 자식입니다. 호적에도 친자식으로 올라 있어요. 그 아이는 어느 누구의 자식도 아니에요. 바로 제 자식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게이조는 그답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게이코는 깜짝 놀란 듯이 게이조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코가 훌륭하게 자란 것은 다쓰야한테서 전해 듣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자식을 키운 것뿐인데 부인께 감사의 인사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부터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친어머니인 게이코 앞에서 게이조는 자신들 부부야말로 요코의 친부모라고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게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조는 문득 게이코의 입을 통해 모든 것이 알려질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게이코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우아한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나쓰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었다.
“어쩐지 이상해요.”
“뭐가 말입니까?”
게이조는 눈부신 듯이 게이코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쓰지구치 씨를 뵙게 되었느데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네……..”
또다시 멋쩍은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차를 마셨다.
“쓰지구치 씨가 제 오래 묵은 상처를 알고 계시기 때문일까요?”
“글쎄요. 요코가 제 딸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가 봐요. 어쩐지 친척 같은 기분이 들어요. 도오루 씨와 얘기를 나눌 때도 그랬어요.”
“……..도오루는 좀 경솔한 데가 있어서 여러 가지로 폐만 끼치고 있습니다만…….”
게이조는 게이코와 단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게이코를 만나기 전에는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카기는 수술실에 들어갔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시간이 걸려도 자신은 다카기의 집에 묵을 작정이니까 괜찮지만, 게이코는 오타루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다카기에게 아직 의논다운 의논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도 신경이 쓰였다. 문득 바라본 게이코는 어딘지 요염하고 감미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게이조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천만에요. 도오루 씨는 좋은 청년이에요.”
“………….”
“그보다는 다쓰야 때문에 정말 마음을 졸이고 있어요. 글쎄 요코의 하숙집까지 찾아갔었대요.”
“네? 그랬어요……..?”
“다쓰야는 뭐든지 저한테 말하는데, 그 얘기만은 하지 않았어요. 도오루 씨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전 안절부절못했어요. 도오루 씨도 아버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나 보군요.”
“네. 어젯밤 전화로 잠시 얘기했을 뿐이니까요……..”
게이조는 도오루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는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다카기 씨께 의논드리러 온 거예요.”
이쿠코가 손수 만든 프루츠펀치를 들고 와서 다카기가 자리를 비운 데 대해 사과를 했다.
이쿠코가 나가자, 게이코는 소녀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쓰지구치 씨는 부인을 배신하신 적이 없으시겠지요?”
당돌한 게이코의 질문에 게이조는 순간 당황했다.
“아내를 배신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렇게 말꼬리를 흐리고는 그 때문에 게이조는 또 당황했다. 문득 유카코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갔다.
“참으로 훌륭하시네요. 한 번도 배신하신 적이 없으시다니…..저처럼 한번 배신하고 그걸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배신을 되풀이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
“배신한 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일생은 크게 다르지 않을까요?”
게이조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한번도 배우자를 배신한 적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사실 부인께서 저에게 아내를 배신한 적이 없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실은 저도 찔리는 데가 있었어요. 남자들은 엉뚱한 생각을 잘하니까요.”
게이조는 학창 시절에 읽은 이후 마음에 새겨 넣은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
이런 높은 수준에서 묻는다면 배신한 적이 없다고 큰소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쓰지구치 씨,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과 실제로 죄를 범하는 것은 전혀 다르잖아요. 그것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것과 실제로 죽이는 것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그건 그렇지만……..”
“그렇잖고요. 남편을 배신할 뻔한 것과 배신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은 것은 전혀 달라요. 전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해요.”
게이코는 시선을 다시 밝은 뜰의 연못 쪽으로 돌렸다. 게이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쓰지구치 씨, 죄를 범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에요. 전 남편을 배신했기 때문에 계속 숨겨야만 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숨기고 있구요. 그러다 보니 성격이 어딘지 삐뚤어졌어요. 마음도 언제나 흐려 있어요. 불투명한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의 죄는 자신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죄를 만드나봐요. 그리고 그 죄를 키우게 되나봐요.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아니, 그렇게 절실히 뉘우치고 계시니 이미 그 죄는 씻어졌을 거예요.”
“어머! 씻어졌다고요?”
게이코는 갑자기 우습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런 꾸밈없는 그 웃음소리에서 게이조는 게이코가 방금 말한 ‘불투명한 인간’이란 말을 떠올렸다. 확실히 게이코에게는 어딘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