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네 가족과 함께, 경기도 안양에서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봉하마을. 오랜만에 찾아온 겨울의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금요일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저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엔 더 쓸쓸함만이 감돌았습니다.
하지만 2008년 3월에 찾은 봉하마을은 참으로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었습니다.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저희 가족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잠깐이었지만 바로 눈앞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육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방송매체에서 듣던 목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말이죠.
그리고 2011년 12월 9일, 다시 찾은 이곳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넘쳐나는 활력 대신,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경건함이 쫙 깔린 마을이 되어 버렸지요. 만약 지금, 그가 있었다면 이곳이 이렇게 국화꽃으로 넘쳐나거나, 그를 추모하는 각종 물품들로 가득한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었을 겁니다.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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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고 하는 그의 생가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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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의 생가를 보기 위해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만, 왜 이리 기운이 나질 않는지, 또 뭔가가 목에 걸린 듯하여, 결코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앞서가는 아이들의 뒷모습만 보며, 뭔가에 홀린 듯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가는 예전에 제가 본 모습이랑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긴 제가 왔을 때는 아마도 그가 태어났던 주소지에 다른 집이 지어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지금, 예전의 그 집을 허물고 새롭게 생가를 조성하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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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당시 찾았던 그의 생가입니다. 그는 이곳이 초가집이었을 때 태어나, 7살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같은 마을로 이사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 집 주인이 지붕과 벽면을 2차례 보수하였다고 하네요.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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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을, 그가 퇴임한 이후 강태룡 부산상고 총동문회장이 매입해, 김해시에 기부채납한 뒤, 김해시에서 복원공사를 추진했다고 합니다.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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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복원된 생가는 그의 기억을 토대로 정기용 교수가 기본 설계를 하였고, 출입문이나 장독대, 담장, 심지어 포도밭까지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전 이런 내용도 잘 모르고, 그저 옛날 초가집이나 대충 만들어 놓았나보다 생각했었는데, 나름 의미 있게 복원을 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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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은 그의 기억을 토대로, 거의 원형 그대로 재현되었답니다.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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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그마한 안방에는 그의 젊은 시절 사진과 결혼사진이 걸려있습니다.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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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의 생가를 둘러 보고나서 저희는 이제 그가 잠들어 있는 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처음엔 어디에 그의 묘소가 있는지 몰라서 잠깐 헤맸지만, 안내원인 듯한 사람에게 물어서 바로 옆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 방송에서 그렇게 보았던 봉화산과 사자바위, 부엉이바위가 눈에 들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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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묘역으로 가는 길. 봉화산의 사자바위와 부엉이바위가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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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곳에서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그의 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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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는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글귀가 참배객의 발길을 붙잡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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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드디어 그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
ⓒ 방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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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말라는 뜻으로 강철로 만들었다는 무덤. 아직까지는 산화하는 과정을 거치느라 꾸준히 부식이 되고, 변색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부식된 철이, 결국 보호 작용을 해서, 이 무덤을 영원히 변하지 않게 지켜줄 겁니다.
한동안 말없이 그의 묘역을 지켜본 후, 저희 일행은 조용히 다시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부엉이바위에서는 새하얀 봉화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서 현 시국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한동안 부엉이바위의 봉화는 꺼지지 않고 피어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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