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병이 공짜/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술에 관한 시 모음>--------
익는 술
착한 몸 하나로 너의
더운 허파에
가 닿을 수가 있었으면.
쓸데없는 욕심 걷어차버리고
더러운 마음도 발기발기 찢어놓고
너의 넉넉한 잠 속에 뛰어들어
내 죽음 파묻힐 수 있었으면.
죽어서 얻는 깨달음
남을 더욱 앞장서게 만드는 깨달음
익어가는 힘.
고요한 힘.
그냥 살거나 피흘리거나
너의 곁에서
오래오래 썩을 수만 있다면.
(이성부·시인, 1942-)
+ 술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 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 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시인, 1930-1993)
+ 술타령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신천희·스님이며 시인, 전라도 어느 암자의 주지승)
+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내가 술을 마시는 건 꼭 취하고 싶어 마시는 술 아니다.
허무한 세상
땀 흘려 얻은 울분을
허기진 뱃가죽 공복에 씻어내려고 마시는 술만도 아니다.
남자의 고독을 술 한잔에 섞었다 말하지 말아라.
나 홀로 술잔 기울인다고 술꾼이라 말하지도 말아라.
내 빈 술잔에 아무도, 무엇 따르는 이 없는 걸 너희가 아느냐.
내가 말없이 술잔 비우는 건
윤회를 꿈꾸는 세월에 주먹을 치며 나를 달래는 일이다.
내 가슴 일부를 누구 스친 바 없는 시간에 미리 섞는 일이다.
허기진 공복에 잔을 씻고 씻으며
미지의 시간을 위로해주려는 그런 마음이란 말이다.
(강태민·시인, 1962-)
+ 술 마시는 남자
다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술을 마시네
술 취해 목소리는 공허하게 부풀어오르고
그들은 과장되게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욕을 하네
욕은 마음 빈곳에 고인 고름,
썩어가는 환부,
보이지 않는 상처 한 군데쯤 가졌을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었으면 좋겠네
취해서 누군가를 향해 맹렬히 욕을 하는 그대,
취해서 충분히 인간적인 그대,
그대는 날개 없는 天使인가
그들 마음의 갈피에 숨어 있던 죄의 씨앗들
밖으로 터져나와
마음 한없이 가볍네
그 마음 눈 온 날 신새벽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풍경이네
술 깬 아침이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네
그렇다 할지라도
욕할 수 있었던
간밤의 자유는 얼마나 행복했던 것이냐
(장석주·시인, 1954-)
+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김수영·시인, 1967-)
+ 나는 포도주
나는 포도주
햇볕과 바람과 비와 인간 속에서 저절로 익은 포도주
나를 마셔라
부드럽고 달콤새콤한 맛은 모두
고뇌의 흔적이 낳은 은총
눈물에든 웃음에든 맘껏 섞어 마셔라
태풍과 폭우와 욕망과 배덕의 식은 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익은 포도주
와서 나를 마셔라
돼지에게는 돼지의 맛
소에게는 소의 맛
나귀에게는 나귀의 맛
개에게는 개의 맛
인간에게는 인간의 맛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맛과도 교제한다
와서 맛보라
저절로 익은 것들은 무엇보다도 풍성하고 따뜻하다
理想에 겁먹고 性에 굶주리고 향수에 시달린 이들이여,
서슴없이 와서 나를 맛보라
자연과 인간의 눈물이 죽도록 사랑해서 만들어놓은
十惡十善의 맛이 골고루 응축되어 있다
원하는 맛대로 나를 마셔라
저절로 익은 향기는 모두 에로스의 핏줄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사랑이 내 속에 녹아 있다
마음껏 나를 마셔 나를 발견하고 나와 작별하라
나는 포도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커다란 축복
언제나 나는 그대들 속에
숙명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김상미·시인, 1957-)
+ 막걸리
어머니의 젖줄 같은
그윽한 정이
투박하게 배어있는
진하고 걸쭉한 물
거머리 뜯기며
진흙 창 논바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허리 참 하는 그 시간
피로와 배고픔을 채워주던
마술 같은 액체
가슴은 두근두근
순이 곁에 서면
작아지던 내가
벌컥 벌컥 한잔 들이키고
"사랑한다"며
첫사랑을 고백하게 한
사랑의 미약
부질없는 삶
낙수소리 벗삼아
머리 허연 우정을 싸잡아
어우렁더우렁 잔 부딪치는
행복한 노년의 낙
(우보 임인규·시인)
+ 날 부르려거든
날 부르려거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지 말고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 말해 주오
좋은 술집, 비싼 술집이 아니라도 좋소
시장 안, 꼭 시장 안이 아니라도 좋소
돼지국밥집이나 순대국밥집이면 더욱 좋소
술을 사겠다니 부담이 없어 좋지만
주머니엔 술값을 넣어 가지고 나가겠소
마시다 보면 술값은 내가 낼 수도 있고
아니면 2차를 내가 내더라도
그게 술 마시는 기분 아니겠소
한 잔이라고 했지만
한 병씩은 마십시다 그려, 그리고
기분이 동하면 한 병 더 시킵시다
혹시,
술값을 내가 내어도 나무라지는 마오
술 사려다 대접받으니 그대가 좋을 것이고
대접받으려다가 내가 대접을 했으니
내 기분도 좋을 것이라오
날 부르려거든
그냥,
"참소주를 한 잔 사겠소"라고만 하소
어제 과음했어도 나가리라
내일 과음할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나가리라.
(김종환·시인, 1951-)
첫댓글 장석주 님의 시에 공허한 마음을섞어
들이키는 한잔의 술에 젖는 나를
그대~ 애처로이 생각말라.
좋은글들 감사 하므니당~!
강태민 시를 안주 삼으며~~~
오랜만에 보는 귀한 글들 입니다.
아침부터 한잔 생각나게 하시네요. ㅎㅎ
감사히 잘 봤습니다.
Ah ! ~ Coming heart aches.
술에 취하며 장혜진 ~ 노래, 맘껏 불러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