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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계산(덕암초등학교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훈풍
유구 이야기는 이 카페에
1편. 공주 유구의 역사
2편. 유구역루와 간신거국도를 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 편으로 정감록과 유구이야기 그리고 유구를 관광지로 개발 했으면 하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정감록”과 유구 이야기 (유구이야기 세 번째)
지금과 같은 최첨단 시대에 “정감록” 이야기를 하면 무슨 케케묵은 이야기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정감록비결(鄭鑑錄秘訣)하면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감록비결”에는 이 나라를 이끌어갈 왕조의 부침과 시대별 환란의 시기를 예언하고 이런 환난을
당했을 때 난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살기 좋은 곳 열군데, 십승지(十勝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살기 좋은 곳 십승지의 한곳으로 유구읍이 들어 있습니다.
공주 유구이야기를 역사, 유적지 이렇게 두 번 썼는데 세 번째 마지막 편은
<십승지 유구>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정감록비결은 어떤 책인가?
이 예언서는 저자도 집필 연도도 정확하지 않으며 정본(正本)이 뭔지, 어느 게 이본(異本)인지도 분명치 않다고 한다.
“정감록”의 처음 시작은 “한(漢)의 융공(隆公)을 완산백(전라도 관찰사)으로 봉했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이인 임(淋)은 일찍 죽고 둘째는 심(沁) 셋째는 연(淵)이다.
이심(李沁)이 정공(鄭公)과 함께 팔도 산수 명승지를 돌아보고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조선 산하를 둘러본 후 조선의 국운과 미래를 예언하며 나눈 문답을 기록 한다.
*** 완산은 전주의 옛 이름이다. 완산백으로 봉해진 융공은 전주이씨로 사성(賜姓)받아
전주이씨의 시조가 된다고 추정.
*** 정공은 촉나라의 도인 정감이라고도 하며 조선 이후에 태어날 정씨왕조의 시조가 된다.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곤륜산으로부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1000년의 운이 지나갔다”.
(이것은 평양을 기반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를 말하는 듯함.)
또 “운이 송악(松岳·개성)에 옮겨가 500년 도읍이 되나 요승과 궁녀가 장난하여 땅의 기운이 쇠하고
하늘의 운수가 막혀 운이 한양으로 옮겨갈 것”이며
한양의 기운도 500년이 지나면 국운이 다하게 되고 새로운 현인 정도령이 나타나 역성혁명을 일으켜
계룡산 아래에 도읍을 두는 정씨왕조가 생겨날 것이라는 예언과, 이후에 태여 날 왕조이야기 와 각
시대별로 환난의 시기가 예언되어 있으며 이런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로 “십승지”를 기록해 놓았다.
저자는 누구인가?
정감록의 저자를 정감이나 이심으로 본다면 정감이 촉나라 사람이고 이심의 아버지가 한나라 융공이므로
그 연대는 서기 3세기 중엽이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이다.
(한나라 (전한) BC 206 - AD 220) 촉한(AD 221 - 263)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감록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완성됐다고 보는데 이는 정감록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조선 중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성혁명을 예언한 예언서로 조선의 멸망 후 정씨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보니 세조-성종 때 이후
금서(禁書)가 되면서 수많은 필사본이 생겨나고 그 내용도 이것저것 보태져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늘날 세간에 통행되고 있는 《정감록》은 이양인(兩人)의 문답 외에 도선(道銑)· 무학(無學)· 토정(土亭)· 격암(格庵)·
서산대사(西山大師)· 서계(西溪)· 정북창(鄭北窓)· 두사총(杜師聰)등의 예언서에서 발췌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정감록 기록의 많은 변화와 더불어 저자로는 촉나라의 도인 정감(鄭鑑), 신라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
신라시대 풍수설의 대가) 혹은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등이 꼽히지만 이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많은
비결서가 포함되어진 것으로 보아 누구 한사람을 저자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십승지 이야기
“정감록비결”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 까지 가장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환란을 피 할 수 있는
“십승지”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곳 열군데).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를 실제 돌아보고 기록을 남긴 사람으로는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 (南師古 (1509~1571)
조선 중기의 천문·지리 등에 통달한 학자)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6?)을 들 수 있다.
이두분의 저서에도 유마양수지간에 가활만인 (維麻兩水之間 可活萬人), 능히 만인이 피난해
살 수 있는 좋은 고장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특히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는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네가지는 유효하다고 본다.
1) 십승지(十勝地)는 어디어디인가?
1.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2.안동(安東)의 내성(奈城),
3.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4.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5.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동점촌(銅店村),
6.공주(公州) 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7.영월(寧越)의 정동(正東) 상류,
8.무주(茂朱) 무풍(茂豊)의 덕유산(德裕山),
9.부안(扶安) 변산(邊山)의 호암(壺巖),
10.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이다.
2)십승지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나?
십승지에는 병화도 들어가지 못하고 흉년도 들지 않는다.
즉 삼재(三災)와 팔난(八難)이 없는 곳이다.
* 삼재(三災) - 여기서는 기근, 역병, 전란을 말함
* 팔난(八難) - 여덟 가지의 어려운 경우.
곧 배고픔(먹고)·목마름(마시고)·추위·더위·물·불·칼·병란
십승지를 해석한 다른 내용에서 보면
① 정신적으로 그 땅은 토속신앙의 성지이면서 풍수지리 적으로 길지라야 한다.
② 경제적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토와 약초가 있어야한다.
③ 전략적으로 도(道)나 군(郡)의 경계에 위치해서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다른 행정
구역에 있는 십승지와 쉽게 연결되어야 한다.
④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기다리는 역성혁명세력의 근거지로 십승지 주변에 있는 주민의 지지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⑤ 병란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대로변 피하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가까운 곳에 국도나 하루거리
간격의 적당한 고갯마루가 있어서 생활에 필요한 소금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한다.
즉 평소에 생활하는 터전과 달리 난세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곳이라는 설명이다.
십승지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 했을까?
십승지는 특히 난리를 피하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십승지가 38선 이북에는 한 곳도 없는 것은 이 지역이 오랫동안 북방민족들의 침략이 심했거나 그들의
지배에 있었던 까닭이다.
또 해안지역이 제외된 것은 고려말기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동안 왜구가 창궐하면서 해안지대는 왜구의
침해를 받지 않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근교나 대도시 주변 또는 대로변은 병란의 화가 미치기 쉽고 역병은 대도시나 대로일수록 더 빨리 미치게
되어 배제되었을 것이다.
3. 십승지에 대한 현대적 조명
십승지(十勝地)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지치고 희망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일반 백성에게는
하나의 희망이고 위안이며 이상향이었다.
이곳이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후천(後天)개벽(開闢)을 기약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평등하게 잘 살수 있다는 이화세계를 기다렸을 것이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잡다단한 일상과 스트레스에 십승지(十勝地)와 같은 곳은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은 것이다.
좀 더 나은 생활과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영원한 바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 그러면 실제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낙향해 살았었나?
1) 역사적 인물들의 낙향
유구읍에서 아산으로 넘어 가기 전 우측에 금계산(해발 574m)이 있다.
이 산자락에 위치한 추계리에는 고려시대 문극겸(1122 - 1189 고려 중엽의 문신)의 묘소와 유구역루에 그려져 있던
유명한 벽화 간신거국도의 원초가 된 그의 시가 걸려있는 고간원이 (지방문화재) 있다.
기록에 보면 문극겸이 관직을 물러난 후 이곳에 낙향해 살았고 그의 후손인 문익점도
이곳에 낙향해 살았다고 한다.
(文益漸(1329 - 1398) 목화씨를 중국에서 몰래 붓 뚜겅에 숨겨와 우리나라에 전파케 한
고려말의 문신이며 외교관)
그리고 조선후기에 이조판서를 지냈던 조동만이 (1846년 - ?) 유구리 인근에 낙향해
오면서 그를 따라 여러 명의 관료가 낙향해 살게 되면서 6판서 마을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분들이 이곳을 낙향지로 삼은 것은 한양과의 왕래가 용이하며 (150km-걸어서 7일거리) 왕실과 양반가의 휴양지였던
온양온천이 멀지(30km) 않고 온양온천과 유구 중간 지점에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집단 주거 마을인 외암리 마을도 있어서
오가는 길이 편리 했을 것이며 유구에는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던 유구역이 있어서 한양과 삼남지방으로 오가는 교통이
편리했음도 작용 했을 것으로 본다.
**외암리마을---아직도 그 시절의 가옥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이다.
그러고 보면 유구는 십승지로 알려지기 이전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 졌었던게 아닌가 생각되며 외지인이 정착해
사는데 토착민들의 인심도 후했고 퍽 협조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2) 자산가의 정착--- 유구리 아흔 아홉 칸 집
유구리 창말 한가운데에 공주군 유일의 아흔 아홉 칸 집이 있었다. 이집은 1938년 오지영이라는 분이 지은 집이다.
1938년이면 왜정시대인데 그때에 이토록 큰집을 유구리 에다가 지을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금광으로 많은 부를 축적 했다는 이분의 발자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설에는 오지영씨가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다가 왜경에 적발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작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사실여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36년부터 몇 년간 전국적으로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이집의 신축과 농사일에 인근 주민들을 많이 고용해서
품삯도 넉넉히 주고 밥도 배불리 먹여 그 인심이 후하다는 소문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확실히 실천한 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6.25사변이후 토지개혁 때에 이분의 토지 상당부분이 인근주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고 한다.
(분배 받은 실제 사례를 본 사실이 있음)
그 후 이집은 황해도 피난민으로 전라도에서 성공한 기업가인 “한”씨라는 분이 구입하여 주택 옆에 직조공장을 지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집이 넓어 관리가 매우 어려워 점점 축소되기 시작한데다가 누전으로 나머지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고
지금은 안채 일부만 겨우 남아 99칸 집의 웅장했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다.
뜻있는 공주의 시민들이 아흔아홉 칸 집 살리기 운동을 펼치며 관계요로에 진정도하고 서명 운동도 펼치고 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 8.15해방과 6.25사변으로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
일제 말기부터 8.15해방을 기점으로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인 이곳으로 찾아 들기 시작했다.
삶의 터전이 없었던 그들은 살아가기 위한 생업으로 직물 생산에 뛰어 들었다.
베틀 수준의 직기가 쪽닥기라는 인견직 기계로 바뀌면서 본격적인인견직 생산에 들어가게 된다.
6.25사변이 일어나자 이들의 친인척은 물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물색하든 이들이 정감록비결의 피난처인 이곳으로 많이 들어와
1944년 9000여명이던 인구가 1955년경에는 15000명으로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된다.
*** 이들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찾아오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면 먼 타향, 연고도 없는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날 때 어디로
갈 것인가를 어떻게 정했을까? 생각해 보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동원해 살기 좋은 곳 무난히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정감록 비결”의 십승지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 가 없는 피난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955년부터 60년대까지 인조견이 전성기일 때에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종업원이 3,500여명에 달해 유구에는 3000궁녀
(여직공의 수가 3,000여 명이었다 함)가 살고 있다는 우수갯 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50여개의 직물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실크, 자카드(직물에 화려한 무늬를 넣어 짠 천)와 색동천(색동천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구에서만 생산 된다고 함,)이 섬유의 본고장 이탈리아는 물론 일본 등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4) 2000년대 이후의 낙향 객들....
이지역의 산으로는 금계산, 보파산, 구산, 관불산등이 있는데 금계산 자락의 추계리 문금리 보파산지역의 신달리 세동리와
동쪽 고개 너머에는 동해리, 연중리등이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남한 3대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지며 풍수지리의 양택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도 서울등 수도권지역에서 노후의 건강과 안락한 삶을 위해 낙향해 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어
(주민의 10% 이상이 된다고 한다.) 전원 주택지의 토지 가격이 유구읍 도심보다 높다고도 한다.
***(이 지역에 종중 선산이 있는데 몇 해 전에 묘 자리로 거금을 줄 테니 매각하라는 요청을 받은 적 이 있음.)
5) 유구리 농공단지 우수 기업 입주
정부와 지방 자치 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생겨난 농경단지가 잘 되는 지역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유구 농공단지는
전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환경산업의 1인자 코웨이와, 진입 장벽이 높아 성공하기 매우 어렵다는 음료사업에 뛰어 들어 굳건한 입지를 굳힌
웅진식품이 자리 잡고 있어 주민들의 고용 창출은 물론 지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유구의 유적지 복원으로 관광지로의 발판 구축 필요성 >
십승지로 유구를 설명 할 때 “유마양수지간(維麻兩水之間)” 백리지역으로 표현되어 있다.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백여리의 땅을 말하는 것인데 그 시작점에 유구가 있다고 한다.
십승지는 모든 환란을 피하고 가난 한자가 부자가 되고 병든 자가 병을 고친다는 최대의 길지라고 한다. 그리고 십승지에는
물줄기가 흐르고 물이 좋아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탑곡리와 문금리에서 발원한 유구천의 물줄기는 마을마다 흘러내리는 냇물이 더해져 유구리쯤에 도달하면 큰 냇물이 되어 흐른다.
유구읍 어떤 마을을 보아도 배산임수의 명당 터에 자리 잡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농공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코웨이와 웅진식품 모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이들 두 기업이 물과 관련된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십승지는 물이
좋은 곳이라는 기준과 부합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해 볼만하다.)
유구는 직물단지의 부진에도 불구 이두 기업이 들어오면서 어쩌면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의 농촌지역의 공통적인 고민은 인구 감소이다. 유구도 한때 15,000명을 넘던 인구가 지금은 8,700여 명으로 줄었다.
이 지역이 더 발전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먹거리 창출이 필요하다.
그 방편으로 유구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국민 생활 수준이 높아 지면서 관광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전국 어디를 가나 숨어 있는 유적지를 발굴
복원하고 전설 속 이야기까지 현실화해 관광 상품으로 내 놓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유구는 그 어느 곳 보다 훌륭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다.
유구 관광 자원으로 개발 될수 있는 상품을 생각해 보면-------
1. 유구역과 역루 개발
2. 유구리 99칸집 복원
3. 임진왜란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유구지명 유래 (비득재와 금비들기 이야기)
4. 고간원과 금계산 산성 홍길동 전설
5. 국말이 밥 전통 살리기
-- 유구역루----
유구역은 유구천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말이 옛 공물 보관 창고지 였음을 감안할 때 바로 인근에 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유구역루는 이역에 세워졌었던 것인데 아마 창말 앞 개울가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역루는 고려시대 문신 문극겸이 임금이게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나주로 가는 길에 유구역에
묵게 되는데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벽에 쓰게 된다.
이 시가 쓰여진지 십여년 후 “루”를 수리 하던 박씨라는 화공이 시에 쓰여진 내용을 벽화로 “루” 서쪽 벽에 그려 놓는다.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잘 모르다가 50여년 후 이곳에 묵게된 송광사의 “무의자”라는 스님이 이를 알아보고
그림의 제목을 “간신거국도”라고 짓고 그에 대한 찬시를 벽에 써 놓으면서 전국적으로 이 벽화와 시가 알려지게 되었다.
***(“諫臣去國圖”라는 말은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수도를 떠난다는 뜻)
이 아름다운 벽화와 시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경향 각지의 시인묵객들이 찾아 들어 역루와 “간신거국도” 벽화를 예찬한 시가
역루에 많이 걸리게 되었고, 심지어 임진왜란에 출병 했던 명나라 장수도 이를 예찬한 시를 짓기도 했다는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유구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게 되면서 역이 번창하고 유구역루와 여기 얼킨 이야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유구역을 상세히 조사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조선 정조 시대 발간된 “공주목 읍지”
목원조에 실려 있다.
그 규모는 기마(騎馬 - 타는말) 5필, 복마(卜馬 - 짐 싣는 말) 5필, 남녀종이 46명
(남자(奴)29명, 여자(婢) 17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을 관리하는 인원이 46명이였다면 적어도 이 숫자 이상이 숙식 할 수 있는 규모일 것으로 보면 역의 규모가 얼마나
컸었나를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역루는 전란에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불확실함.)
*** 역루 옆에 당시의 역을 재현한 역참의 주막에서 공주의 전통 “국말이 밥”을 먹는 모습 을 그려본다.
-- 99칸집 복원 --
유구리(창말)에는 공주시에서 유일하게 99칸 집이 있었다. 지금은 그 웅장했던 모습을 찾아 볼수 없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공주의 뜻있는 인사들이 99칸 집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99칸 집 복원은 유구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한다.)
--홍길동 전설과 금계산 정비--
십승지의 확대 해석에는 “역성혁명가가 미래를 준비하며 은둔해 살 수 있는 보신처(保身處)라는 말도 있는데,
이곳에는 역성혁명을 꿈꾸었던 홍길동의 전설도 있다.
금계산에는 무너진 성터가 있다.
이곳에 홍길동이 어머니와 누이가 함께 살았는데 힘이 좋았던 이 남매는 성을 쌓는 내기를 했다고 한다.
누이는 성을 쌓고 동생 길동은 철제 나막신을 신고 한양을 갔다 오는 내기였다. 하지만 누이는 성을 다 쌓아 가는데
길동이 아직 돌아오지 않자 아들이 이기기를 염원했던 길동의 어머니는 인절미 떡을 해가지고 딸에게 찾아와서 시간도
충분하니 떡을 먹고 하라고 꼬드긴다. 누이가 떡을 먹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그때 마침 돌아온 길동에게 지고 말았다.
너무 억을 했던 누이는 미처 삼키지 못한 떡이 목에 걸려 숨지게 되고 누이의 넋은 뻐꾹새(뻐꾸기)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수양을 하거나 큰 인물이 태어날 수 있는 풍수지리지의 양택이 있는 곳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정안면 무성산의 홍길동 전설과 내용이 똑 같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공주 목으로 재직했다고 하며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도 공주 출신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십승지 유구에 대해 매우 잘 알았을 것이라 생각됨.
*** 이런 전설이 숨어 있는 금계산은 등산코스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인근의 법화산과 함 께 이곳을 즐겨 찾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전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등산로의 개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등산로: 문극겸의 묘소 고간원-금계산-법화산 코스)
-임진왜란 참전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관 련있는 지명 유래 (비득재와 금비들기 전설)
(이 이야기는 유구 사람 모두가 알고 있음)-------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땅에 진군했다가 유구의 지세가 나라를 구하고 큰 나라도 위협할
인물이 태어 날 출생형임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유구리 뒷산고개 마루턱을(비득재) 끊었는데 이때 땅속에서 세 마리의
금빛 비둘기가 피를 흘리며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군졸들이 죽어간다.
해결 방법이 없었던 “이여송”은 인근 사찰의 고승을 찾아가 치유방법을 묻자, 이곳 지명을 유구(오직 비들기라는 뜻)라
고쳐 부르라 해서 유구라 고쳐 부르기 시작하자 역병이 사라져 그 후 유구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도 비득재 바로 옆에 있는 코웨이와 웅진식품을 연결해서 돌아 볼수 있는 관광지
개발이 가능하다고 본다.
***(외국여행을 다니다 보면 큰 회사들은 회사 홍보를 위해 관광코스에 들어 있다.)
--전통 “국말이 밥” 전통 맛 복원----
1950~60년대 이곳 유구에서 초등학교를 디녔던 사람들이라면 가을 운동회가 얼마나 큰 지역행사 이였나를 기억 할 것이다.
운동회 2~3일전부터 지역 상인들이 채일의 치고 운동장가에 솥단지를 걸며 음식준비를 하던 것을 기억할것이다.
한집에 한 두명의 학생은 모두 있었기 때문에 운동회 날은 그야 말로 전 주민이 다 모여 들었다.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릴레이”
였는데 학생부 뿐 아니라 지역 마을대항 “릴레이 경주”는 그 응원전이 흡사 올림픽 800m 계주 경기와 맞 먹을 정도 였다.
이곳에서 팔던 “국말이 밥”은(지금의 돼지국밥 비슷) 그야 말로 천하 일미였다.
***“국말이 밥” 재현하면 어떤 맛 일까? (옛날 유구에는 도살장도 있었고 양조장도 있었다.)
---유구읍은 관광지로 입지적인 조건도 매우 좋다.---
유구리 바로 고개 너머에 대찰 마곡사가 있고 북쪽으로 30km 거리에 유명한 온양온천과 외암리마을이 있으며 남쪽 30km안에
백제의 수도 공주의 수많은 유적지가 있다.
이 관광 벨트 안에 새로운 역사 유적지로 유구역루와 99칸 집이 복원된다면 유구의 더없는 자산으로 후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길이길이 남겨질 것이다.
유구의 이런 유적지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다면 쇠퇴해가는 유구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 할 수 있을 것음 물논 후대에게
큰 문화 유산으로 넘겨 질거라 생각한다.
유구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일이 아닐수도 있다. 유구는 큰 인물도 많이 배출했고 또 농공단지에는 국내
굴지의 사업체도 있다. 누군가 사명감을 갖고 추진한다면 지방행정 당국의 협조는 물론 이지역의 성공한 인물들 그리고
성공기업들의 협조를 충분히 얻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해 본다.
“참고 문헌” 정감록비결
남사고 비결
이중환의 택리지
공주군지---1988년도
공주의 전통 마을 시리즈...2010
기타 백과 사전 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