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4)
Who do you say that I am?”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메시아를 예고한다. 그는 동족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이러한 희생은 이스라엘이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근원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녀’에 대하여 새롭게 정의한다. 예전에는 유다인의 혈통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제2독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로, 또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여겼다. 이 모든 생각은 예수님에 대하여 메시아를 준비하는 예언자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사명이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고 선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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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러한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자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지. 그럼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꽤 알겠군.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디서 태어나셨나?” “모르겠는걸.” “돌아가실 때 나이는?” “모르겠네.” “설교는 몇 차례나 하셨나?” “몰라.”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군!” 친구의 연이은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난 사실 아는 게 너무 적어 부끄럽네. 하지만 3년 전 나는 주정뱅이에다가 많은 빚을 지고 있었지.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고 저녁마다 아내와 자식들은 내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무서워했네. 그러나 이제는 술도 끊고 빚도 다 갚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귀가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릴 정도라네. 우리 집은 이제 화목한 가정이 되었네. 이게 모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라네. 이만큼은 나도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해 알고 있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로 여기는지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제대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리 잘 알고, 또 아는 만큼 대답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사탄도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하였습니다(마르 1,24; 루카 4,34 참조).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모범적인 신앙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에 대하여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실제 우리의 삶에서 메시아이신 그분의 모습처럼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원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줘야 합니까? (마태 18,19ㄴ-22)
-신대원신부-
연중 제12주일이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는 35년 동안이나 일본제국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었다. 그러다가 겨우 나라를 되찾자마자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갈라져서는 같은 민족끼리 피비린내 나도록 처절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허리가 두 동강 난 상태에서 60년이 넘도록 여전히 서로서로 용서해주지 못하고 주적(主敵)으로 삼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이 땅에 서로가 하나돼 참 평화를 일구면서 살아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해나가기 그리 만만치 않은데, 서로 찢기고 터지도록 싸우며 불목하고 있으니 갈수록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간다.
그동안 양쪽의 위정자들은 위정자대로 입만 열면 평화통일을 운운했고, 교회는 교회대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자고 주창했다. 하지만 평화통일의 염원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듯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요원해 보인다. 북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러한 대의(大義)에 대해 남쪽만이라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전향적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데, 최근 몇 년간 대북 추이를 살펴보면 평화랄지 화해와 일치랄지 하는 구호들은 단지 머릿속 개념이나 공염불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때문에 남쪽에서는 '남-남'이라는 새로운 갈등구조가 뿌리 깊게 내릴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로 만나 대화하면서 화해할 것이 있으면 화해하고, 용서할 것이 있으면 서로 용서하면서 함께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거기에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기에 과거지사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단순히 원수로 여기려는 핑계거리나 원한을 조장하려는 수단거리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거기에 매달려 진작부터 만나야 할 흩어진 가족들마저 만날 수 없게 만들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겨레 분단, 대화 단절 등의 책임을 전가하고 상대방에게 원색적 비난만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시며 참 평화이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서로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마음을 모아 민족의 평화를 위해,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닐까? 믿음이 없으니 만날 수 없고,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할 여지도 없게 되고, 대화할 여지가 없어서 용서해 줄 마음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말씀하신다.
결국, 갈라진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길은 용서의 문제가 전제돼야 한다. 서로를 용서해 줄 의향이 있다면, 이유 불문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조건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화해의 손길이 맞닿으면 손을 맞잡을 수 있고, 손을 맞잡게 되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믿음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위정자들이 나설 의향이 없다면 교회라도 나서야 한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오셨고, 또 갈라진 온갖 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됨을 위하여' 사셨기 때문이다.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사도 바오로 말씀이 심금을 울린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4,30-5,2).
그렇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모두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아간다면, 갈라진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문제도 새로운 희망으로 움터올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마태 18,19ㄴ-22)
-허영엽신부-
세례를 받은 지 일 년 정도 지난 신자들의 피정모임이 있었습니다. 생활 나눔 중 어느 신자 분이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저는 처음에 세례성사를 받고 신자가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가벼워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그전보다 내 삶을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갔던 행동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끼는 만큼 죄를 조심하게 되었고, 신앙의 삶이 어려워도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신앙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삶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마지막 걸림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버리기도 목숨처럼 아깝지만,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활동에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자기만족이나, 위선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이나 집착 등은 어쩌면 가장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늘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우선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침도 주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결국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됩니다. 그러나 그전에 세상 속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왜 어리석은 바보처럼 십자가를 지고 갑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합시다.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에 대한 나의 믿음 때문입니다.”이라고 말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
시작기도 제 마음 안에 머무시면서 당신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주시는 주님, 당신을 끝까지 그리고 깊이 있게 따르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예수님께서 문득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당신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치유나 기적 자체보다 당신을 아는 것이 구원과 직결되기에(17,11-19) 당신 스스로 이것을 가르쳤어도 됐을 법한 중요한 사항이지만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우리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얻도록 지긋하게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시지만 수동적이지 않고 당신 삶으로 제자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십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을 때, 다시 말해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9,10-17)가 예수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9,7-8.19) 사이에 배치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정체성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답이 이 사화에서 주어졌듯이, 그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주셨을 때 직접적으로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올바른 대답을 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이 대답을 했는지도 중요합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중요한 본문을 다룰 때 자주 그러하듯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이 획기적인 순간을 맞이합니다.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른, 참된 예수님 인식은 예수님의 기도로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오랜 기간의 인내로운 동반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인식은 제자들의 능력이기보다 선물입니다.(마태 16,17) 다른 한편, 제자들도 그분과 함께 따로 있었습니다. 곧 그분과의 깊고도 내밀한 친교의 시간을 가진다는 인간 편에서의 협력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훌륭한 신앙고백 앞에서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십니다. 물론 당대의 메시아 개념이 종교적 이상과 함께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라는 현세적 사상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에 따른 올바른 메시아의 모습이 세워질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엄중하게 분부하시다 ’라는 동사가 원래는 ‘꾸짖다, 질책하다’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데서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긴 여정 동안 어렵게 얻은 이 놀라운 통찰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길은 끝나지 않고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멈추어 즐기기보다 신발 끈을 묶어야 할 시간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는 정점은 이제 고통과 죽음을 통해 구원하시는 참된 메시아 상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그리스도 호칭을 쓰시는 대신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사용하시면서 곧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실제로 이때부터의 복음 내용에서 치유나 기적 이야기는 현저히 줄고 그분의 고통과 부활에로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되살아나야 합니다. 여기서 ‘해야 한다 ’라는 동사는 복음사가의 사용에 따르면 단순한 의무를 넘어서 그 속에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에서 루카가 ‘하느님의’라는 단어를 첨가해 예수님의 역할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했듯이, 예수님은 이 단어를 쓰시면서 그분 뜻에 대한 당신의 확고한 헌신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는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배척하고 파괴할지라도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다시금 새롭게 일으키신다는 구원 역사 전체가 예수님의 생애 안에 녹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소 두려운 여정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에로 들어가야 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선포자가 될 것입니다.
묵상 (Meditatio)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었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에 그분의 운명은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지도자들이나 특별한 성인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제나 생명과 부활에로 방향 지워져 있기에 짐이 아니라 기쁨에의 초대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잠시 지날 행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크고 오래가는 행복을 지니도록 초대하십니다.
기도 (Oratio)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화해와 일치 방법은 믿음의 기도"
-홍승모 신부-
신앙인 중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질문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이 어떤 모습의 메시아를 계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복음 내용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해답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라는 질문의 핵심은 다른 사람 생각이 아니라, '내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의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자신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곧 주님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간접체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체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메시아를 바라고 있습니까? 자신과 가족들 행복과 평안과 건강을 어김없이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입니까? 슈퍼맨(Super Man)처럼 인간 능력을 초월해서, 기도 중에 끊임없이 바라고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입니까?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한 영적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초월한 신적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인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만, 묵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모든 것을 다 갖고 완벽하다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충분히 갖고 있는 사람과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 중에, 그 부족한 사람은 늘 허전하고 불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고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허전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그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이뤄지지 않고 아직 부족한 상태, 그 부족한 빈 공간에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은 우리의 빈 공간을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안주하던 자리를 떠나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움직일 때, 공허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공허한 빈 공간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우선시 하는 숨겨진 자아를 벗어 던지고 주님을 옷 입듯이 입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갈라 3,27). 움켜진 것이 중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머무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다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빈 공간을 주님이 활동하시도록 내맡기면, 주님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의 바람을 담고 한 어린이가 쓴 통일의 글을 떠올려 봅니다. "통일은 눈물의 바다. 만남의 시간이 다가오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통일은 눈물의 바다.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오면 손끝이 떨어지지 않아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통일은 눈물의 바다. 서로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 동해와 서해 속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오고 갔으면…." 60년 시간을 가슴에 새기며 아파했던 분들이 그 세월의 주름을 곱게 펴며 웃으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말이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이념과 체제를 넘어 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화해시키고 일치시킬 방법은 오직 하나 맡기고 의탁하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한 소년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는데, 교리 선생님이 탐스런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이 빨간 사과 한 개에 다 담겨 있단다. 갖고 싶지 않니?”
소년은 벌떡 일어나 사과를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쳤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소년의 손은 사과에 닿지 않았습니다. 펄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키 큰 선생님이 들고 있는 사과까지 닿기에는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더 높이 뛰었습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과까지는 닿기에는 자신의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지요.
미친 듯이 뛰던 소년은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움켜쥔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벌려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과를 소년의 손바닥 위로 툭 떨어뜨렸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 손을 가지런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사과를 취하고자 계속해서 뛰었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나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시지요.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는 의견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정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 옆에 있었고, 예수님 뜻대로 실천하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곧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생각만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과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손을 앞으로 쭉 내미는 것임을 오늘 아침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음이 진실로 구한다면, 비록 적중하지 않아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대학).
<영적 삶이 성숙할수록>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를 간결한 한 마디 진술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삶이 성숙할수록 깨닫게 되는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따르는데서 오는 기쁨, 보람, 행복, 위로는 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단맛들은 ‘이것’을 넘어서고 나서야 찾아오는데,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일상 안에서의 작은 죽음, 매일의 순교, 순간순간 나를 버림,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내게 맡겨진 몫을 다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과 세상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가 있겠습니까?
영성적 성숙의 결과는 겸손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영적 완성의 시작은 하느님 없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입니다.”
한 저명한 성서학 교수님께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피정강론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덕은 어떤 덕이겠습니까?”
“신앙? 희망? 사랑? 정의?...?”
“아닙니다. 다 부차적인 덕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덕은 겸손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특징 중 첫 번째는 겸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크심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겸손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로, 건강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로...
사랑의 콩깍지
-전삼용신부-
저는 신학교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좋아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한 때는 그 사람 없으면 못 살듯이 예뻐 보였는데 그 감정이 사라진 지금 보면 여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눈에 무엇이 씌었다가 떨어져나간 느낌이었습니다.
어떤 연구 기관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멋지고 잘생긴 연예인들의 사진 속에 연인과 닮은 사람의 사진들을 끼워 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여 준 결과 누가 봐도 잘 생기고 멋진 사진 속 사람보다 자신의 연인과 닮은꼴의 사람 사진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말을 증명해줍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미워하면 좋은 행동까지 위선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해서까지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남아있는 부부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하고도 계속 상대가 예뻐 보이기도 하겠지만 또 많은 경우는 눈에 콩깍지가 떨어져 실제를 보고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음엔 함께 살기 힘들었다가도 떨어진 콩깍지를 다시 찾아 씌워서 신혼 초처럼 다시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예뻐 보이고 안 예뻐 보이는 것은 그 상대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눈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꽃을 본다고 합시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꽃을 아름답게 볼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저 다른 풀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만이 꽃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사람 안에 아름다움을 넣어 놓아서 그 아름다움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안에 아름다움이란 것이 없어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리란 것이 없어서 진리가 무엇이며, 또 선이란 것이 없어서 무엇이 선인지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이 특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면 그 사람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콩깍지를 통해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고해성사 때 이런 고해를 들으셨다 합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싫은데 특히 몇몇은 더 싫어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싫게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말 안 좋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셨고 유다까지도 사랑하셔서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내 안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예언자라 하고 어떤 이들은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하며 각자의 의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이냐에 따라 상대를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미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을 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 볼 수 있는 눈은 베드로가 스스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베드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일러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넣어 주셔서 아름다운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셨듯이, 베드로에게도 ‘사랑’을 넣어주셔서 참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성령님’이라 부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황의 무류권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느님은 베드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갈 최고의 권위자로서 오류가 없도록 선택하여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신 것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을 예쁘게 보이게 하신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객관적으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는 특별히 더 예뻐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모에게 콩깍지를 씌우신 것입니다. 만약 자녀가 예쁘지 않으면 부모는 책임감만으로 자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면 살아가는데 덜 힘이 듭니다. 저도 예전에는 미워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온 결과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삶이 힘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성령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분이 씌워주시는 사랑의 콩깍지를 씌워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 이난호 -
아가다의 남편은 한창 나이에 실직하고 일터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가다는 십여 년 넘게 두 나라를 오가며 혼자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웠다. 나 같으면 팍삭 주저앉을 상황에서도 그는 늘 웃었다. 그것은 베드로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믿고 기댄 사람의 느긋함이라고 나는 그의 웃음을 부러워하며 십여 년 연상인 내 신체 나이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혼자 익힌 중국어 실력으로 신구약성경 필사를 끝냈고, 얼마 전 한참 늦깎이로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들어갔다고 해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요란하게 번쩍이지 않았지만 그는 빛났다. 그런 아낙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우리나라가 이만큼 버티는 거라고 든든한 묵상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가다는 마침 중국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평화방송을 시청할 수도 없었고 주일에 한 번 중국 건물을 빌려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라 생각 끝에 아가다는 자기 집에 분향소를 차렸단다. 추기경님 사진을 모시고 촛불은 켰지만 영 송구스러웠고 그 며칠 간 옷 갈아입기도 민망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설픈 분향소를 송구해하며 드렸을 아가다의 간절한 연도가 연상되어 콧마루가 찡했다. 추기경님의 영혼이 가장 달게 가장 먼저 그의 연도를 흠향하셨을 것 같았다.
사실 후닥닥 튀어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평소 그분을 ‘품고’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살았음’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아가다는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침묵을 알아들을 사람(루카 9,?21 참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맨 먼저 내다볼 사람이 아닐까?
그것은 연연해서가 아니야!
-김찬선신부-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궁금해 합니다. 궁금해 하는 정도를 넘어 연연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을 놓고 볼 때 다른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는 것은 불행의 지름길입니다. 연연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좋게 봐주면 다행이지만 나를 안 좋게 보면 분노하고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고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존재가 흔들리고 별 의미 없이 그냥 던진 한 마디에 뿌리째 흔들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 행복하다 해도 의존적인 것이기에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평판에 자유로우니 일단은 행복한 것 같은데 심각한 자기 착각과 고립을 살게 되기에 이 또한 진정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 성 프란치스코는 어떠하셨을까?
물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분도 아니셨겠지요. 연연하지는 않으시지만 염려하고 배려하시는 관심은 있으셨겠지요.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심은 일종의 가르치심이고 당신의 정체를 확고히 심어주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혼자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셨겠지만 복음에서는 중요한 때에 주님께서 기도하심을 전합니다. 12 제자의 선택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고, 수난을 앞두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시는 이 때도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매우 고심을 하신 다음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제자들이 갑자기 스승이 죽으면 엄청 혼란을 겪을 것이니 이제 당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야 하고, 그렇게 죽는 당신이 누구신지 제자들이 확실히 깨닫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앞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은 당신은 사람의 아들로서 수난을 받아 죽게 되지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물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한 달에 한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음악피정을 한다고 공지를 했기에 날짜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가위 연휴 바로 다음 날이었거든요. 더군다나 새벽부터 내리는 비는 저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음악피정이 시작하는 10시경. 저의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더군요. 너무나도 적은 교우들 그리고 조금씩 내리는 빗줄기. 피정 강의를 해주실 신부님께서는 일찍 오셔서 강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이에 반해서 좌석을 채우는 숫자는 너무나 적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습니다.
찬양을 시작하면서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함께 큰 소리로 찬양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혹시 나는 이 음악피정을 단순히 한 달에 한번 치루는 일로써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정말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더 가까이 체험하는 것이 목적인데 어느 순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에 연연하게 되고,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아서 불만이고 날씨가 너무 좋으면 사람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놀러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단 한 사람이도 이 음악피정을 통해서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피정을 시작하면서 말씀드렸지요.
“저 역시 피정에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강의 때마다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를 드리겠습니다. 성사를 보실 분은 조용히 고해소로 오셔서 성사 보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에게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저 역시 고해소에서 기도를 하면서 처음의 불편한 마음들을 하나씩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놀라운 것은 점점 사람들이 오셔서 음악피정의 빈자리를 채우시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재주와 능력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 보이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만할까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하는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기 위해 주님을 부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이 보이는 예수님에 대해 들리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의 이름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 호칭을 받는 예수님에 대해 한껏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인기도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곧바로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채우려는 욕심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진정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묵상해 봅시다.
빠다킹신부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저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강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 강좌 때 마다 한 인물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돌아보니 꽤 많은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성모님, 양부 요셉, 세례자 요한, 바오로 사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 세리 마태오, 세관장 자캐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바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분이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었습니다. 계속 파고들어보니 정말 존경스런 분이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성서 상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으셨습니다. 제자공동체의 으뜸이 되셨고, 사도교회의 수장이 되셨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와 관련해서 복음사가들이 보여준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중의 제자였던 베드로 사도,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 사도의 실수나 나약함, 인간적 부족함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관련한 기사들 살펴보니 수치스런 기록들이 꽤 많았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등 예수님께 신랄하게 혼나는 장면,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내쏟다가 주어 담지 못해 당황하는 모습, 최종적으로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모습 등등.
복음사가들은 왜 그런 부분을 좀 감싸주지 않고 신랄하게 보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참으로 의미 있는 묵상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수도자란 누구입니까? 사제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그 신분이 단 한 번에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온 몸으로 말해주고 계십니다. 자신의 신원을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제자요, 수도자요, 사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한 때 ‘반석’, ‘바위’라고 부르시기도 했지만, 다른 때 ‘사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가장 믿을만한 반석에서 배신자, 사탄로 넘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단 한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럴 듯 해보입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배신자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래의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지 않고서는 잠시도 홀로 설수 없는 부족한 우리의 근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거의 죽음과 멸망에 도달한 베드로 사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당신 자비의 눈길을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습니다.
그 따뜻한 눈길, 다시 일어서라는 격려의 눈길에 베드로 사도는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죄와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거듭하는 우리를 인정사정없이 내치지 않으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총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되풀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배반했다고 해서, 타락했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한번 부여한 수제자 직분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나약함으로 인해 삶의 벼랑 끝까지 내몰린 베드로 사도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베드로를 신뢰하십니다. 밀어주십니다. 감싸안아주십니다. 수제자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 앞에 베드로는 비로소 진정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는 사도 중의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중한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오늘 신자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오늘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하루를 보냈다할지라도 있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백
-김인한 신부-
언젠가 사제서품식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젊은 사내들이 서툰 몸짓과 함께 일생을 두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이 담긴 그 모습을 보며 저의 고백도 떠올려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으로 인해 살겠다고 맹세한 제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은 저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그때처럼 우렁차게 고백할 수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님은 과연 누구신가요? 베드로의 저 가슴 가득한 고백을, 또한 그것을 일생을 두고 살아내는 그의 삶을 우리도 깊이 고백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때 이전의 내가 죽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또 삶 안에서 주님을 형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첫 고백처럼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신앙고백
-변진흥-
어느 신심단체에서 ‘과연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자매는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고, 어떤 형제는 ‘나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고 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풍토는 기복적 요소를 물씬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다시 제가 함께하고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이분들의 대답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압축되었지요. 물론 정답입니다. 구원 신앙의 핵심을 꿰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제가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도구로 쓰시는 분’이라고요. ‘그분께서 언제 어떤 모양의 도구로 쓰시건 나는 그냥 그분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물속에 던져지건, 불속에 던져지건, 자갈밭에 던져지건 ‘내가 왜 그곳에 던져지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그냥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이 기도의 지향처럼 평화의 주님께서 쓰시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 미움을 사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어둠에 빛을 비출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만 있다면 들어오는 복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더라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강영구신부-
만일 예수께서 저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저는 우물쭈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에 바르게 대답하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를 아는 사람이 예수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자신 있게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려면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知識)이 아닙니다. 예수는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고, 그분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며 그분의 형제들이 누구인지(마태13,55) 따위를 아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박사(博士)가 될 수는 있겠지만,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지식(知識)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을 줍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 안에 귀의처(歸依處)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나는 누구
-조성풍 신부-
성묘를 가거나, 장례 미사에 참례하게 되면
삶을 보다 진지하게 돌아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앞에서 그분을 기억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런저런 대답들이 오가고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여기느냐?”라고 직접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답을 함으로써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함께함의 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 대한 고백과 그에 걸맞은 우리들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김병환 신부-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동시에 전하고 있다. 이는 신앙고백과 수난은 서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 당신 신원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마지막 과월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당신 수난이 임박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을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처음에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물으시자 제자들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스도란 말은 구약에서 예언된 왕,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의 대답에 깜짝 놀라신다. 베드로의 대답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었던 신앙이었다. 그런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언급하시면서 처음으로 당신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수난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 수난의 엄청난 사건이 믿음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암시하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고 자신도 수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고 또한 고백해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이해하고 우리도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예언자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해야 한다.
- 권경렬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예수님께서 물어 보십니다. 이 물음은 우리들이, 매우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한번쯤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남과의 관계 속에서 남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할까를 묻게 되기도 합니다. 나 어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 우리는 거울을 보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비춰 보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에 아주 예민해져 때로 남이 나를 두고 평가하는 말에 좌지우지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내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관계들을 통한 의미추구가 아닐까싶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의미에 관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됨의 본질을 이루는 인간성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삶은 의미가 있고, 인생은 진퓽?찾을 가치가 있음을 믿으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는 조바심을 심중에 품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실존의 유한함을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의 무한함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에 그토록 관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고 하더냐?” 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됨에 관심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고 단순한 존재를 넘어설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이 가실 길,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목숨까지 내어 놓는 그 길이 사람됨의 길이며, 존재 너머에 태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싫든 좋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이고 알든 모르든 우주 속에서 사람이라는 역을 맡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 자신을 내어놓고 세계에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끼치며, 이해하며, 찾아내며, 함께 세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열려져 있는 세상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 만나고, 함께 우정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길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됨의 의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의미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을 걸고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의미는 쓰디쓴 시련, 실망, 좌절 뒤에 따라옵니다. 우리의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나옵니다. 삶의 진실로부터 뽑은 체험들입니다. 세상을 솜씨 있고 약삭빠르게 다루는 것으로는 삶의 참된 의미는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진실한 관계 속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 때 삶의 참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어지는 선택에서 옳은 선택이란 참으로 어렵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진지하게 다룰 중요한 결단은 과연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진리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진리를 위해 죽을 것인가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그 사람됨이 결정됩니다. 자기가 한 말들이, 자기가 한 행위들이, 자기에게 던져지는 물음들의 대답인 삶이, 자신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저절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는 가치 있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존재 의미에 대한 진정한 관심일 것입니다. 허무와 패배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냐 저 세상이냐를 선택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서로 반대되는 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살고 죽는 것이 곧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게 되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며, 우리가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 한창현 신부-
살아가다 보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좋게 말할 때가 있는가하면 나쁘게 말할 때도 있고, 정확하게 알고 말하는가하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고요.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말을 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하나...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말씀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씩을 했지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나 신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아마 우리들은 많은 말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거나 신자답지 않게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엉터리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다른 이들의 말에 너무 힘겨워할수도 있습니다. 또 남을 힘들게 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합니다. 제대로 알고 말해야하겠습니다.
한편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오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되어 오상을 받으신 성인들도 계심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오상을 받으셨던 분들 중에는 비오 신부님이 계십니다. 2002년 성인 품에 오르셨고요. 이분은 50년 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을 받으시고 수많은 죄인들을 회개로 이끌어 주신 분이십니다.
고백성사를 보고도 같은 죄를 또 짓게 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때마다 다짐하지만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은 단번에 여기에서 건져 주십니다. 제대로 통회하지 않은 죄인들,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가벼운 죄만 고백하는 죄인들, 죽음 일보 직전에 있는 큰 죄인들을 낚시로 고기를 낚듯 한번에 걷어내십니다. 이미 자신에게 올 영혼들을 13세때 환영으로 보신 분이십니다. 하루 한두 시간만 주무시고 한끼 적은 식사로 평생을 사신 이분은 수많은 희생과 보속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분에 관한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은, 이 책을 한번 읽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아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예수님께 성사를 본다고 하는 고백성사의 참뜻을 체험하고 참으로 기뻤다고 합니다.
오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분의 신앙을 본받고 또 터득하여 주님과 일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에 화답하여, 본당활동과 소공동체운동 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전파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매진한다면 우리 신앙의 기쁨은 거기서 배가 될 것이고, 우리 신앙에 확신을 준 비오 신부님 역시 천상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박상대 신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가 9,18-21)
-유 광수 신부-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한 신앙 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 맡을 만큼 성숙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 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벤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떤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년동안의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가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