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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산과강을 만들다 사라지고
사람은
점을 찍어 노닐다 헤어지네
거울이
되는가하면 모래알이 되면서
History Create mountains and rivers and disappear people We play with dots and break up the mirror When it becomes grains of sand
‘당수(唐手)’는 ‘당나라 당’과 ‘손 수’가 합쳐진 한자어이다.
공교롭게도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모두 같은 한자어를 쓴다. '당수'라는 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정식(韓定食)’, ‘한과(韓菓)’ 등에 ‘나라 '한’이 들어가 한국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당수라는 말의 ‘당’의 어원은 당나라와 관계됐다는 말이다.
‘손 수’자는 원래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하거나 버릇으로 자주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에 사용된다. 목수, 가수, 운전수 등이 뒤에 ‘수’자가 붙어 있는 이유이다. 보통 ‘수’자가 들어간 직업은 주로 손으로 일을 하거나 작업을 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당수라는 말은 당나라 때 손으로 하는 무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는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국가였다.
618년에 이연이 건국하여 907년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 동안 있었던 중국의 왕조이다. 중앙 아시아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중국의 통일 제국으로는 한나라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와 나·당 연합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 당나라는 세계 최고의 문화제국을 구축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역사를 큰 영향을 주었다.
한자, 율령, 유교, 불교문화가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바탕을 마련한 당나라 문화는 한국, 일본 등과 많은 교류를 했다. 특히 한자는 한반도의 이두, 일본의 가나 형성에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당수'도 이러한 문화융성의 분위기속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닌가 싶다. 많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무협지 등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신체를 이용한 각종 무술을 집대성한 단어로 통칭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수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체육 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수는 고대 인도에서 만들어져 중국 당(唐)나라를 거쳐 삼국시대 때 한국으로 들어와서 14세기경 일본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명(明)나라 때 당수권법(唐手拳法)으로 체형(體形)이 정리된 것으로 보이며,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성화되면서 '가라테'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일본어에서 '가라(から)'는 '비어 있다(空)'는 뜻이고, '테(て)'는 '손'을 뜻한다.
가라테[空手]는 곧 맨손의 무술을 의미한다. 중국 당나라를 가리키는 '당(唐)' 자도 히라가나로는 '가라(から)'라고 쓰는데, '가라테[唐手]'는 곧 '당나라의 권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일본의 무술로 정착되면서 '唐手(토오슈)'는 쓰지않고 '空手(공수)'로 통일됐다.
한국에서는 당수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수라는 말을 검색해보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당수라는 말은 분명 일본의 영향을 받아 생긴 말이다. 광복 이후 수련도장이 생기기 시작하여 권격도(拳擊道)·공수도(空手道)·가라테·당수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었다.
공교롭게도 요즘 중국어인 간체에서는 당수를 ‘도수(徒手)’라고 쓴다. 도수는 맨손을 말한다. ‘도(徒)’는 일반적으로 ‘무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맨손, 맨발이란 뜻도 있다. 도보(徒步)는 발로 걸어가는 것을 말하며 예전 초등학교나 군대에서 많이 한 ‘도수체조’는 맨손체조를 말한다. 중국에서 간체로 ‘당’을 포기하고 ‘도’를 쓴 것은 당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계적으로 보급된 가라테의 일본식 용어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 앞에 멸망(滅亡) 한 고구려인(高句麗人)들은 당나라(唐羅羅)에 무너진 말갈족(靺鞨族)과 함께 세상을 떠도는 유민(流民)이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唐羅羅)의 끈질길 추격 (追擊) 끝에 말갈족(靺鞨族)을 이끌던 걸사비우(乞四比羽)는 살해(殺害) 당하고. 고구려의 후손(高句麗-後孫)과 말갈족의 후손(靺鞨族-後孫)은 '대조영(大祚榮)' 아래 뭉치게 된다.
그러나 나라가 亡 하고 적(敵)에게 쫓기며 떠도는 민족(民族)에게 특별(特別) 한 힘이 있을 리 없었다.
헐벗고 굶주리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떠돌이 인생(人生)에 모두 지쳐갔다.
당나라 군(唐羅羅軍)의 잦은 습격(襲擊)에사람들이 죽어가고 자신(自身)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다.
대조영(大祚榮)은 조금씩 군사(軍事)를 훈련(訓鍊) 하며 힘을 길렀다. 그러나 당나라(唐羅羅)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結局) 당나라 장수(唐羅羅將帥) '이해고(李偕固)'가 이끄는 대군(大軍)과 만주지역(滿洲地域)의 천문령(天門嶺)에서 모두의 운명(運命)을 건 큰 전투(大戰鬪)를 벌여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멸망한 나라(滅亡國)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여겼던 유민(流民)들이 대국 당나라(大國唐羅羅)의 군사(軍事)를
완전(完全) 히 격파(擊破) 해 버린 것.당(唐) 나라에서는 용맹(勇猛)을 떨쳤던 이해고(李偕固)는 겨우 목숨만 보존(保存) 해 달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대조영은(大祚榮) 광활(廣闊) 한 대지 위에 나라를 세우고국호(國號)를 '발해(渤海)'라 칭했다.
만주지역(滿洲地域)을 평정(平定) 한 발해(渤海)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200년이나 존속(存續) 한
강력(强力) 한 나라(國家)였다. 한민족(韓民族)이 해동성국 발해(海東盛國渤海)를 세우고 드넓은 만주(滿洲)를
호령(號令) 할 수 있도록 했던 대조영(大祚榮)의 힘은 강한 의지(强健意志)와 화합(和合) 이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반만년 역사(半萬年歷史)는 수많은 침략과 억압(侵掠-抑壓)에 물들어 있다.
하지만 비극(悲劇) 속에서도 언제나 그것을 극복하며 찬란(燦爛) 하고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내고 있다.
그것이 우리 민족(民族)이 가진 의지와 화합(和合)의 힘 덕분(德分)이다.
대조영(大祚榮, ? ~ 719년 6월 재위: 698년 졸)은발해(渤海)의 초대 왕(初代王)이다.
고왕(高王)과 발해(渤海)에 관해 중국 측 기록(記錄)인 《구당서》 (舊唐書)에서 발해 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大祚榮)을 고(구) 려의 별종 출신(別種出身)으로 서술(敍述) 했고 반면 《신당서》에서 발해(渤海)가 본래 고려(高麗)에 부속되었던 속말 말갈(粟末靺鞨)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한국 측 기록인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인용된《신라고기》 (新羅古記) 《제왕운기》 (帝王韻紀)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을 고구려(高句麗) 장수(將帥)라고 기록(記錄) 하였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대조영(大祚榮)은 퉁구스족인(Tungus 族) 말갈족(靺鞨族)으로서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된 뒤 고구려 화 과정을 거친 말갈계(靺鞨系) 고구려인(靺鞨系高句麗人)으로 여겨진다.
6세기 후반,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死亡) 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淵男生)과 영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의 권력(權力) 다툼을 벌었다.
결국 권력(結局權力)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淵男生)은 당나라(唐羅羅)에 망명(亡命) 했다.
당나라(唐羅羅)는 667년 연남생(淵男生)을 앞세워 고구려(高句麗)를 침공하였다. 최고 권력자(最高權力者)였던
연남생(淵男生)의 합류(合流)로 고구려(高句麗)는 크게 무너져 당나라(唐羅羅)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평양성(平壤城)으로 진격(進擊) 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고 고구려(高句麗)는 멸망(滅亡) 하였다.
대조영(大祚榮)이 수나라 개황연간 돌지계가 이끌고 수나라로 귀부하여 유성에 정착(定着) 하게 된 속말 말갈(粟末靺鞨)의 후손(後孫)으로 보아 그의 출자(出資)에서 고구려(高句麗)를 배제(排除) 하는 학설도 존재(學說-存在) 한다
고구려 부흥 운동과 발해 건국(高句麗復興運動-渤海建國)
고구려(高句麗)가 멸망(滅亡) 한 후 옛 고구려(高句麗) 영토(領土)에는 당나라(唐羅羅)가 통제(統制) 하는
안동호부(安東都護府)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高句麗)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安市城)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나라(唐羅羅)는 고구려(高句麗) 유민 분산 정책(流民分散政策)에 따라 유민(流民)을 여러 지역(地域)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대조영(大祚榮)의 일가는 고구려(高句麗) 영주(榮州)로 이주(移住) 했다.
한편, 696년 영주(榮州)에서는 당나라(唐羅羅)의 지나친 억압 정책(抑壓政策)에 대한 거란족(契丹族)의 반란(反亂)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혼란(混亂)을 틈타 고구려(高句麗) 유민(流民)의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말갈(靺鞨)의 걸사비우(乞四比羽)는 영주(唐羅)에서의 이탈을 감행(離脫-敢行) 했고.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회유책(懷柔策)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당(唐)의 장수(將帥) 이해고(李偕固)가 이끄는 당나라(唐羅羅)의 추격군(追擊軍) 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죽고 대조영(大祚榮)은 남은 고구려(高句麗) 유민(流民) 과
걸사비우의 말갈을 합병(靺鞨-合倂) 하여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大祚榮)은 698년 천문령 전투(天門嶺戰鬪)에서
당나라(唐羅羅)의 추격군을 격파(追擊軍-擊破) 해 승리(勝利) 하고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지린 성(地臨城)
돈화 부근(敦化附近)에서 발해(渤海)를 건국(建國) 하였다.
당(唐)의 북진 정책을 위협(北進政策-威脅) 하던 돌궐(突厥)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 세력(對唐牽制勢力)을 구축(構築) 했다.대조영(大祚榮)은 705년에 당(唐)과 화친(和親) 하였고 713년, 당나라(唐羅羅)는 고왕(高王)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座孝位大將軍 渤海君王)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명목상 책봉(封爵) 하였다.
719년, 고왕(高王)이 붕어(崩御) 한 뒤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왕위(王位)를 이었다.
당나라는 발해(渤海)를 고립(孤立) 시키고자 하였으나오히려 고왕(高王)은 돌궐(突厥)과 동맹 관계(同盟關係)를 형성(形成) 하며 고립 관계(孤立關係)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는 발해(渤海)의 세력(勢力)이 건국 초기(建國初期)에 비해 상대적(相對的)으로 강해졌음을 의미(意味) 한다.
700년에는 발해(渤海)가 신라(新羅)에 사신(使臣)을 파견(派遣) 하기도 했다.신라(新羅)와의 관계(關係)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친밀(親密) 한 것도 아니었다. 신라(新羅)의 유학자 최치원(儒學者崔致遠)은
"발해(渤海)의 왕인 고왕(王人高王)이 신라(新羅)와 수교(修交)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효소왕(孝昭王)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고왕(高王)에게 대아찬(大阿飡)이라는 관직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을 《동사강목》 (東史綱目)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는 당시 몇 차례 교류(次例交流)가 있었으나 친선적인 관계(親善的-關係)로 발전(發展)
하지는 못했다.
이는 첫째로 양국이 그 무렵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直接的-接觸)이 없었다.
신라(新羅)와 발해(渤海)가 본격적(本格的)으로 관계(關係)를 맺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에 발해(渤海)가
본격적(本格的)으로 고구려(高句麗)의 후예(後裔) 임을 자처(自處) 하고 양국이 함흥(咸興) 일대에서
직접 국경(直接國境)을 접(接) 하면서부터이다.
대조영 후예(大祚榮後裔)
■ 아들: 무왕(武王, ? ~ 737년, 재위: 719년 ~ 737년)
■ 아들: 대문예(大門藝)
■ 아들: 대창발가(大昌勃價)
■ 아들: 대호아(大湖雅)
■ 아들: 대림(大琳)
■ 동생: 대야발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의 제3번 함의 이름은 '대조영(大祚榮) 함(ROKS DDH 977)'이다.
경산시 남천면 송백 2리 발해 마을(渤海村)에서는 매년 춘분에 발해 고왕 대조영의 제사가 행해진다.
# 오늘의 명언
시간과 인내, 그리고
끈기만이
모든 것을 달성한다.
- 허버트 코프먼 -
동아시아 역대 제왕들이 천년간 읽어온 통치 교본
당 태종의 치세를 정선한 『정관정요』는 정관(당 태종의 연호) 시대에 쓰이지 않았다. 당나라의 사관 오긍은 무측천 혼란기 이후 현종 대에 이르러 제왕에게 바칠 정치 사례 정선집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태종의 치세를 거리낌 없는 직필로써 적어 내려간 전10권 분량의 『정관정요』를 집필했다. 그 시기는 현종이 국정 초반의 열린 개혁 정치를 뒤로하고 간언을 무시한 채 폐쇄와 독단으로 흐르며 전횡을 일삼던 시기다. 최고의 치세를 이루었다는 당 태종도 군신들의 합당한 반대에 귀를 막고 고구려 정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일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제왕의 과오까지 직필한 특유의 필법으로 처음에는 당 조정의 인가를 받지 못했던 『정관정요』는 현종 이후 후대에 많은 군신의 공감을 얻었고, 당나라 말기부터는 제왕과 신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당 헌종憲宗, 당 문종文宗, 당 선종宣宗 등 역대 당나라 군주는 물론 송 인종仁宗과 금 세종世宗, 원 세조世祖, 명 신종神宗, 청 고종高宗 등 송, 금, 원, 명, 청에 걸쳐 중국 사서史書에는 제왕과 신료들이 『정관정요』를 읽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는 『고려사』 2권 「광종세가」 원년(950) 1월 1일 조에 과거제와 노비안검법 등을 시행한 광종光宗이 즉위 직후 『정관정요』를 자신의 국정 교과서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말기부터 『정관정요』의 전고를 언급하는 사료가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정관정요』가 읽히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예종睿宗이 애독했고, 『고려사』 곳곳에 『정관정요』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도 경연의 교재이자 유생들의 필독서로 읽히며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종조, 순조 대에 걸쳐 주해, 교정, 경연, 진강進講 기록이 거듭 발견된다. 이는 『정관정요』가 당나라에서 처음 널리 읽힌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정치 교본으로 읽혀온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정관정요』는 일본에서도 800년 경 천황 환무桓武 대부터 천황을 비롯해 아시카가와 도쿠가와 등 일본을 지배한 여러 가문에서 통치 교본으로 읽혀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왕학의 성전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시대가 바뀐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경영학의 원리를 담고 있는 훌륭한 동양고전”(하버드 경영대학원)으로 꼽히며 정치뿐 아니라 기업,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정관정요』의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치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관정요』가 이렇게 오랜 세월 국경을 초월해 동아시아의 제왕학 교과서로 자리 잡고 권위를 이어온 데는 당 태종의 잘못과 오류를 얼마간 정직하고 과감하게 써내려간 사관 오긍의 동호직필 정신과 함께, 당 태종을 마주한 수많은 이의 간언과 그를 채택하고 조화시킨 당 태종의 통치 이념이 있었다. 태종이 자신을 폭군 수 양제와 은 주왕에 빗대며 낙양 궁궐 수리 중지를 읍소해 역린逆鱗을 거스른 장현소에게 명주 200필을 하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위진남북조 말기의 혼란과 수나라의 패망을 목도한 당 태종은 “창업과 수성守成 중 무엇이 더 어렵소?”라는 질문을 자주 했다. 또 수성에 있어 흥망성쇠의 원인에 깊이 천착했다. 혁신에 목매기보다 초심을 상기하고, 기본을 지키는 데 충실하고자 했다. 역사에 기록된 망국의 징조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성의 기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민본에 입각한 통치 철학이 얹혀 치세가 이루어진다. 당 태종은 늘 망국의 군주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하는가 하면, 군신 간에 신뢰관계를 쌓고자 했고 인의의 정치를 펼쳐 민심을 얻고자 했으며,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전쟁보다 화친과 포용을 추구하고자 했다.
『정관정요』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에 관한 전고가 수없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나라(혹은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리더의 공통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절대화한다.
-탐욕에 젖어 백성을 수탈하고 폭력을 일삼는다.
-전쟁을 좋아하여 끊임없이 백성을 전쟁터로 내몬다.
-여생과 음주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
-의복과 수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대형 토목공사를 벌인다.
-독단으로 전횡을 일삼으며 나랏일을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 여긴다.
-간신배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의 잘못은 모두 남 탓으로 돌린다.
저자 오긍은 이런 역사의 잘잘못으로부터 배움을 얻고자 한 태종의 면모에 주목한다. 우리 역시 이런 역사의 가르침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를 단지 앎의 차원에 머물게 하고, 현실과 앎의 공백을 공허한 수사로 메워 결국 패망의 길에 접어든 사례 또한 숱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정관정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당 태종의 언행과 훌륭한 간언들 사이에서 묵묵히 드러나는 그의 실천 정신이다. 정관지치는 부단한 반성과 수양으로 이룬 치세의 ‘과정’에 대한 후세의 평가이며, 그와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현재적 의미를 발견하고, 과오를 바로잡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새롭게 옮긴 『정관정요』 신완역판
역대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전의 묘미를 살리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구성돼 있다.
권1은 ‘군주론君主論’으로, 임금이 견지해야 할 원칙과 조정의 중추 기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권2는 ‘현신론과 간언론’이다. 당 태종을 현명하게 보좌한 현신의 사적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권3은 ‘군신관계론’이다. 임금이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서로 올바른 이치를 권고함으로써 공생공영共生共榮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권4는 ‘태자교육론’으로, 보위를 승계할 태자를 훌륭하게 교육해야 나라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내용이다.
권5는 ‘도덕론’이다. ‘인의’는 임금의 도덕, ‘충의’는 신하의 도덕, ‘효우’는 자식과 형제의 도덕, ‘공평’은 관리의 도덕, ‘성신’은 임금과 신하 간 또는 임금과 백성 간의 도덕을 가리킨다.
권6은 ‘자질론’이다. 통치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질과 반드시 버려야 할 자질을 이야기한다.
권7은 ‘학문과 예절’이다. 문치文治를 지향하고,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것을 강조한다.
권8은 ‘실무론’으로 농사, 형벌, 사면, 조공, 흥망을 어떻게 조화롭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다.
권9는 ‘국방론’이다. 정벌에 나서고 변방을 지킬 때 군사를 부리는 요령이다.
권10은 결론인 ‘경계론警戒論’으로 임금은 과도하게 집착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초심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체계적인 구성과 내용은 『정관정요』의 형식과도 조화를 이룬다. 『정관정요』는 일반적인 대화, 서술, 장편 상소문과 조칙이 어우러져 있다. 특히 상소문과 조칙에 쓰인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은 한문에서 형식과 수사가 가장 화려한 문체로, 가지런한 구법, 글자 배열과 대구를 강구해 안정감과 논리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대구의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이 판본에서는 어휘 선택과 문장 구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저본인 『사고전서』본 『정관정요』를 충실하게 재현하고자 했다. 새롭게 출간한 『정관정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사고전서』본의 원문을 근거로 한자를 하나하나 확인하여 기존 번역본의 일부 누락된 구절과 잘못된 글자, 번역 오류 등을 확인했고, 단락 나눔도 정확하게 재조정했다.
2. 인명, 관직명, 지명, 고사성어, 전고典故 등에 상세한 각주를 달았다.
3. 전체 40편에 새로운 해설을 붙였다. 고전 읽기를 통해 옛 고전에 포함된 현대적 의미와 보편적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고자 함이다.
4. 『정관정요』 상소문과 조칙의 대구를 번역할 때, 그 형식과 의미가 잘 살아나도록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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