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畵에 나타난 비너스, 아프로디테>
아름다운 애증(愛憎), 그 안타까운 사랑의 철학
崔 秉 昌
우리는 어쩌면 인간보다 더 간절하고
인간적인 절대성의 가치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가치, 그것은
과연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과거 글을 쓸 때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스러운 존재의 하나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가끔씩 상징적 화두로 삼곤 했다.
비너스, 곧 아프로디테와의 로마적 원명(原名)은 베누스로서 흔히 환타지적 아름
다움의 기준과 사랑의 대상이었기에 초월적이든 세속적이든 그 가치관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랑이 인격화된 실체로서 모든 남성의 구원의 여인상으로서 서양의
집단환상(集團幻想)을 수 천년동안 무궁무진하게 재생산해왔으며, 더하여 그 환상을
전 세계적으로 장악해온 아프로디테, 곧 비너스의 이미지는 사랑이란 잠재의식
속에 영원한 영적(靈的) 아름다움으로 지향 되었기 때문이리라.
아프로디테는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자면 하늘의 신 우라노가 그의 아들 쿠로노스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 날때 아들은 그 아버지의 성기를 잘랐다고 하며, 그것을 바다에 던지니
그곳에서 커다란 거품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로 하여 태어난 것이 아프로디테라고
하니, 그 신화에서 처럼 가히 관능적이며 촉발적 현상의 감성(感性)을 지칭하는
여신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세계사적으로 화가들은 비너스의 형상을 화폭에 담아 신화적 존재의
의미를 더욱 고조시켯으며 그러므로 하여 비너스는 세계 여성사에 미의 기준인양
탄생하게 되었으니, 그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당대의 화가들을 보면 1484년경
보티젤리<우피치 박물관>, 1555년 틴토레토<뮌헨 알테 피나코테크미술관>,
1560년경 수스트리스<루브르 박물관>, 1635년 루벤스<프라도 미술관>,
1824년 다비드<벨기에 왕립미술관> 1863년 카바넬<오르세 미술관>, 1874년
부그로<오르세 박물관> 등, 유수한 작품들은 신화적 아프로디테를 각각 이상화된
작품으로 남겼으며, 각각의 작품 내면에서 보여지듯 결국 그것들은 우리 삶에 있어
아름다운 미와 사랑이란 영원무궁의 순환적 흐름이란 관조(觀照)로 면면히 이어온 것
아니던가.
신화를 다시 거슬러보자.
사랑의 화신(化身)인 아프로디테와 결혼한 당대의 유명한 대장장이이던 남편
헤파이스토스 몰래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어느 날 깊은 사랑의 밀회(密會)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때 새상 구석구석을 비추던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가 이를
보고 남편 헤파이스토스에게 그 사실을 전해주었음에, 남편 헬리오스는 화가
나서 거미줄 같이 잘 보이지 않는 그물을 만들어 침실에 몰래 설치해 놓았더니
두 남녀 신은 벌거벗은 채로 그 그물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헬레오스는 이 장면을 올림포스 산의 모든 신들에게 적나라하게
공개하였으며 신들은 이를 보고 모두가 냉소하며 크게 비웃었다는 것이다.
다시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과거 화가들의 그림을 면면히 살펴본 저명한 현대화가들의 말을 빌린다면,
아프로디테와 아레스는 그 속성대로 아름다움과 용맹성, 또는 호전성으로 변용
되었으며 전자(前者)를 관능과 불륜의 주체로 본다면 후자(後者)는 전쟁의 신을
정복하려는 위대함에 있다 하였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이를 일컬어 미녀와 야수라 칭하고 있으니 사랑 앞에서는
체면도 권위도 역시 무위(無爲)한 것인가 보다.
사랑의 화신인 아프로디테의 또 다른 사랑얘기는 아도니스와의 연애 담이다.
아도니스는 뮈라의 아들로서 뮈라는 자신의 아버지 키뉘라스 왕의 딸을 사모
하다 동침한 뒤 밀려드는 수치심과 모멸감에 사로잡혀 몰약나무가 되었는데,
달이 차자 뱃속의 아기가 스스로 나무를 가르고 나왔다는데 그가 바로
아도니스란다.
아도니스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반 할 정도로 준수하게 잘 생긴 사냥꾼으로
자라났으며, 그 후 아프로디테는 그와의 사랑에 빠지면서 곁에서 항상 야수의
위험을 멀리 하도록 사냥을 못하게 일렀으나, 사냥꾼인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의
간청을 잊어 버리고 어느 날 사냥을 하던 중 거대한 멧돼지와 맞붙어 가지고
있던 창을 던졌으나 창을 맞은 그 멧돼지는 죽지 않고 도리어 아도니스에게
달려들어 결국 아도니스가 물려 죽게 되는데, 이때 아도니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간 아프로디테의 눈앞에는 땅바닥에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진 싸늘한
시신만이 있을 뿐이었단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혼미해진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끌어 안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으니, 인연도 사랑도 이승에서는 못 다한 것인 듯 그녀가
아도니스를 한동안 부등켜안고 흐느끼던 순간 아도니스가 흘린 피가 스며든 땅에서
아름다운 꽃송이가 피어났단다.
그 꽃이 바로 슬픈 사랑을 말하는 아네모네꽃이란다.
아네모네 꽃
결국 아프로디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흘린 피를 통하여 아네모네 꽃을 피우게
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위하여 아도니스를 잡아두려 했고
아도니스는 위험을 무릎쓰고 사냥을 하기 위하여 아프로디테의 간청을 무시
하였기에 두 사람은 슬픈 종말을 가져온 것이리라.
여기에서 외향성의 아도니스는 열린 공간이고 내향성인 아프로디테는 닫힌
공간으로서 사랑을 지켜내려는 애틋함이 그것이다.
무릇, 사랑이란 무형의 살아있는 생물학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기에 사랑의
본원적(本源的) 대상이 일원적(一元的) 일수 만은 없겠으나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이미 모든 여성의 조형적 이념이 되어버린 비너스는 관능적
아름다운 존재 일뿐 아니라 미의 가장 이상적(理想的)이고 절대적인 법칙을
만들어내는 존재의식을 낳았으며 인간이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게 하는 초월적 자의식(自意識)을
가져오게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가치관은 일상적인 목적만이 정의가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추론(目的論的 推論)에 비유한다면, 사랑이란 자연적 질서이지
사회적 행위나 행동이 아니라는 데에 아프로디테의 주관적인 행위와는 다소
이질적인 이론의 여지를 남긴다. 즉, 행복한 삶이란 선(善)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고 좋은 삶이란 도덕성을 기초로 한 정의론에 더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에
서는 신화적 아프로디테의 이상(理想)과는 상당한 괴리를 갖는 것이며,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미덕(美德)과 일치하는 공존의 미학(美學)을 주창
하였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필자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아프로디테가 추구한 절대절명의 미와
이상향적(理想向的) 사랑을 사랑함에 있다고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가
주창하는 목적론적 추론에 반(反)한 듯한 아프로디테의 행위 자체는 목적이
정의가 되리라는 철학적 이론에 여타의 부분이 합치된다고도 볼 수 있어,
아프로디테의 애정행각이 절대적으로 반이성적(反理性的) 만이 아니라는 데에는
다소의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더불어 칸트의 이성론(理性論)과 감성론(感性論)에 따르자면 행위시도 자체가
선의(善意)와 악의적(惡意的)인 추론(推論)으로 구분 지을 수가 있는데, 이는 인간이
어떠한 행위나 행동이 전제하는 자기본위의 절대가치, 즉 행위자가 자기반사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 출발점이 선의적(善意的)인가 악의적(惡意的)인가에 따라
행동이나 결과성으로 이어지는 삶의 가치관이 현저히 달라진다는 점으로
볼 때에 아프로디테는 사랑하는 대상이 어느 누구든 간에 사랑이란 본질이
사랑 그 자체에 있었다는 사실로 선의적(善意的) 출발임이 명료하기 때문이리라.
이는 의도적(意圖的)이든 비의도적(非意圖的)이든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호(好),
불호(不好)의 결과성에 대하여서도 그 행동의 주체자가 선의(善意)가 아닌 사유적
욕구(私有的 慾求), 즉 비도덕적 악의(惡意)에 의해 출발되었다면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것은 행복하지도 좋은 삶이지도 못하다는 뜻을 지칭한 것이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우리에게 무한한 것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화적인
사랑이 우리시대의 영원한 노스텔지어로 남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유한한
것은 그 사랑 또한 지금도 우리 인간사에 역사적으로 탐닉되는 차원 높은 사실이라는
점에 있다.
필자가 아프로디테에 관한 신화적 설화 모두를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며 간절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추구했던 아프로디테,
비록 신화이긴 하지만 그의 사랑에 사랑 이상의 더 깊은 신화적 의미와 가치가
담겨져 있음을 보면서 이 시대의 비슷한 얼굴과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닮아가면서
일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려는 또 다른 아프로디테나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
버금하는 동질의 절대성이 더욱 가득하기를 스스럼 없는 바램으로 가슴 깊은 기대를
가져본다.
<필자. 시인. 문학평론가.
후미진 칠갑 산골에서 아득한 별을 지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