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사람을 보고 ‘감성적(感性的)’이라 여긴다면,
어떤 자극에 대해 느낌이 일어나는 능력이 매우 예민한 경우다.
그 자극에서 받은 인상으로 행동까지도 쉽게 좌우된다면,
그를 ‘감수성(感受性)’이 퍽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할 터이다.
흔히 '센스있다' 거나, '촉(觸)'이 강하다'라고 말들 하기도 한다.
슬픈 감정에 빠지기 쉬운, ‘감상적(感傷的)’이란 말과는 사뭇 다르다.
이 ‘감성적’이라는 평은, 좀 ‘여성적’이라는 말과 엇비슷하다.
눈물이 많거나, 웃음이 헤픈 여성을 ‘감성녀(感性女)’라 한다.
때론 여성이 더 ‘이성적’이고, 남성이 더 ‘감성적’이기도 하다.
<타인의 취향>이란 오묘한 제목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영어로 'The Taste of Others' /원제인 불어로 'Le Goût des autres')
이 영화의 주인공 카스텔라는 자신의 영어선생 클라라에게 시를 읽어준다.
"그녀가 나타나 내 삶은 재미있어졌다네. 그녀의 얼굴은 빛나고
눈빛은 강렬하지. 그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따뜻해진다네.
그녀는 영어를 가르치지만, 나는 더 소중한 것을 배운다네.."
자신이 사다 건 그림을, '내 취향이 아니야'라며 떼어버린 부인에게
실망한 나머지, 클라라에게 이성으로서 '감성적' 관심을 표하는 카스텔라..
'아름다운 카페' 글들과 댓글을 잘 살펴보면,
시큼달콤~쫍쪼름~떨떠름~매콤에 구수하고 쓰디쓴 맛까지..
그야말로 ‘백인백색(百人百色)’과 ‘천인천향(千人千香’)의 멋과 맛이,
글마다 댓글마다 그림마다 사진마다 스멀스멀 풍겨 나온다.
바로 '타인의 감성'이자, '타인의 취향'들이다.
갑자기 나만의 감성(感性)과 취향(趣向)이 궁금해졌다.
돌이켜보니, 나는 젊은 시절부터 좀 '감성적'인 편이었던 듯하다.
틈만 나면 절친한 친구와 함께, 서울 시내 극장을 쏘다녔다.
불후의 명작 <벤허>에서부터 <콰이강의 다리>, 그리고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등장하는 <볼사리노>까지,
당시 인기를 끌던 웬만한 외화(外畵)들은 거의 다 보았던 기억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S그룹 L회장도 일본 유학 시절,
방에 틀어박혀 영화만 보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나도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까닭일까?
특별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내 머리와 가슴 깊숙이 파고든 셈이다.
그런 남다른 외도(?)덕인지, 그 감성은 그대로 내 취향이 되었다.
감성이 느낌이요 감정 그 자체라면, 취향(趣向)은 그 '방향'이다.
그때 그 순간 느낌 그대로 녹아들었던 감정이,
내 가슴속에 ‘감성’으로 뿌리내리고 ‘취향’으로 익어간 셈이다.
누구는 영화나 연극, 또 다른 누구는 산행이나 골프, 여행을 선호한다.
어떤 이웃은 붓글씨 삼매경에, 또 다른 이웃은 통기타 선율에 빠져든다.
어떤 여인은 와인을, 그녀와 다른 사나이는 소주나 막걸리를 즐겨 마신다.
한 친구는 빨간색을 유난히 좋아하고, 다른 친구는 늘 파란색만 쫓아다닌다.
그러니 나 자신과 타인의 '감성과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람은 저마다 감성이 다르고 취향이 각각 다르기에,
서로 동감하고 서로 공감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과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내 감성과 취향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마땅히 타인의 감성과 취향도 더 존중해야할 일이다.
그와 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나도 그도 더 튼실하게 익어갈 것임을 믿는 까닭이다.(*)
첫댓글
사람마다 다른 감성과 이성,
그리고 지성이란 것이
개개인의 개성을 나타내고
나의 것과
남의 것이 잘 어우러져야
살만한 세상과 조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일률적이어도 별 볼일 없고
난잡하여도 이루어짐이 없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닐까요.
그 조화란 것은
배려와 예의도 있어야 되겠지요.
님이 기대하는 댓글이 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 <타인의 취향>이란 영화 평을 살펴보니, 누군가
'취향이 다른 사람끼리 더 잘 어울린다'고 했더군요.
저 또한 감성과 취향이 맞는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여겼는데, 콩꽃님 댓글을 보니 그 말도 맞는 듯합니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배려와 예의가 기본이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한 걸음 씩 양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대했던 댓글 감사합니다~~^^
글의 주제가 재미있네요.
영화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오래전에 고대총장 김상협이 지성과 야성을 말해서 젊은이들이 감동했었지요.
그때의 야성은 아마도 지성에 감성을 입혀보라는 게 아닌가 했습니다.
지성이나 이성만 추구한다면 혁일사회가 될수도 있겠지요.
허나 말씀하신 감성 내지 감수성을 이성 내지 지성에 혼합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가 구현될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회를 위해서는 타인의 취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봅니다만
횡설수설 입니다.
김상협 총장의 취임사.."자유 정의 진리라는 인류의 영원한 목적가치를 추구하되,
추구하는 방법은 치밀한 지성과 대담한 야성이라는 실천가치를 가르쳐 키워내야 한다."
말씀대로 '지성에 감성을 더해 야성을 키우라'는 감동적이고 전설적인 연설이었지요.
타인의 취향을 인정해야, 나 자신의 취향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PS. 영화 <타인의 취향> 줄거리
문화적인 소양은 하나도 없는 일자무식이지만 마음만은 순수한 중소기업체의 사장 카스텔라는 조카가 단역으로 출연하는 연극 <베레니스>를 보러 갔다가 여주인공 클라라에게 한눈에 반한다. 알고보니 그녀는 자신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던 개인교사.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예술계에 종사하는 클라라의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조롱뿐이다. 순진한 카스텔라는 급기야 자신의 마음을 담은 어설픈 영시를 전달한다.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클라라는 순수한 카스텔라의 마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앙젤리크는 카스텔라의 아내. 인테리어 코디네이터인 그녀는 완벽한 핑크빛의 꽃과 그림들로 집을 장식할 만큼 빈틈이 없다.
영화 <타인의 취향> 예고편입니다.
https://youtu.be/jy9eeQXzas0
PLAY
올려두신 영화 제목들이 모두 제 옛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들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민족의 덕목이 협동과 화합이었는데, 격동의 역사와 편가르기 정치로 서로를 존중하기 어려운 세월을 사네요. 월드컵에서 보듯, 태안 기름유출 극복에서 보듯 그래도 우리에겐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힘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은 안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저도 공감하며 같이 바래봅니다.
옛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라니 반갑습니다.
편가르기는 정치판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죠.
월드컵에서는 국민 모두 한마음이었으니까요.
공감의 댓글 주심에 감사합니다..^^
나와 타인이 다른 것을
나와 다른 타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겠죠.
나 아닌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듯 어렵기도 어려운 듯 쉬운 일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님을 깨우치면
다름과 틀림 사이를 오해할 일이 없겠지요.
그러니 분노할 일도 원망할 이도 없답니다.
공감해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