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 보름달 산책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파파고 공원에서 16일 밤,
보름달을 배경으로 산양들이 언덕을 오르고 있다 2011년 5월 -AP통신
35전년에 출가한 나는 지금 산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을 등지고 환속한 것은 아니다. 3년 전, 내가 늘 깃들어 살고 있는 땅끝마을 두륜산을 떠나왔으니 산승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겠고, 조계사가 자리한 서울에 살고 있으니 수도승이라 함이 마땅하겠다. 산승과 수도승은 출가수행자를 분류하는 우리들 세계의 객쩍은 은어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에게 “스님들은 피나게 정진해도 수행의 소득이 없을 수 있으나 우리들 수도승은 굳이 참선하고 경을 읽지 않아도 저절로 도가 높아진다.”고 놀려 먹으며 힘든 도시생활을 스스로 위로한다.
출가수행자가 산사를 떠나 도심에서 살아가는 일은, 새가 숲을 떠나 낯선 세상에서 날개짓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온갖 시비와 복잡이 얽혀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출가할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일구어내야 하는 수도승 생활은 여간 조심에 조심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수도승의 옷을 입은 지도 어느덧 3년을 넘었다. 돌이켜보면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수행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삶의 진행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유약하고 모호한 태도를 극복하며 보다 단단해진 것 같다. 일을 통해서 세속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보듬게 되었다. 사람과 일을 통해서 새로운 눈으로 경전을 보는 힘도 얻었다.
‘엠시어리’(M-Theory)의 ‘문 프로젝트’ - 프랑스 천체사진가 노르베르 뤼미아노와
말레이시아의 천체사진가 친웨이룬이 찍은 실제 보름달 천체사진으로 제작된 달 모양 러그,
쿠션(사진), 침대, 카우치.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평범한 일상에 환상과 상상을 선물한다. 텐바이텐 제공
그러나 잃은 것도 많다. 내면의 빛이 바랜 경향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를 아끼는 이웃들의 말을 빌자면 감성의 물기가 많이 빠지고 여유의 멋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때로는 사무적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고 한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 맞는 말이다. 매우 죄송한 일이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나의 말과 표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께 진심으로 참회의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퇴색한 감성과 여유를 찾기 위해서 서울에서도 나름 안간힘을 쓴다. 그 중에 하나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 산책하는 일이다. 한밤중, 새벽녘, 저물 무렵을 가리지 않고 산책을 즐긴다. 사람에 걸리지 않는 독신과 독거가 이래서 더없이 좋다.
오늘도 새벽녘에 북촌을 거쳐 삼청공원을 지나 경복궁 돌담길까지 걸었다. 조금은 싸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비록 겉으로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달빛을 밟고 걸어간다. 지상에 내린 달빛에 눈길 주고 마음을 얹으니 나는 분명 하늘의 달빛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길을 가면서도 수시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본다. 그러자니 모든 게 새삼스럽다. 어! 서울에도 하늘이 있네. 달이 있네, 나무가 있네, 꽃이 있네. 아하! 정녕 마음을 열고 보니 눈이 열리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니 하늘의 달과 지상의 꽃이 보이네. 홀연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한다. 더불어 내 곁에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마음 열고 눈을 주면 세상 만물은 그대로가 나와 함께하는 한 생명 한 호흡이라는 오묘한 이치를 가슴으로 깨닫는다. 달빛을 밟고 가려니 달빛에게 고맙기도 하려니와 미안해지려 하기도 한다. 달 아래서는 잡념과 시비와 번뇌가 절로 사라진다. 달은 그 존재만으로도 힐링이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오늘 새벽 덕스러운 만월보살滿月菩薩님께 시를 공양하였다.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빛에 비쳐주리라
가다가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내 사랑은, 박재삼
달을 생각하면, 달 아래 서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시가 생각난다. 시골 농촌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던 나는 유달리 달을 참 좋아했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도 초가지붕 위에 달을 많이 그렸다. 가난한 한 가족이 마당에 평상을 펼쳐 놓고 옥수수를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 것도 보름달 아래서였다. 그런 날, 모기를 쫓고자 야생 잡초에 불을 지피면 그 매운 연기 사이로 보름달을 보며 나는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곤 했다.
그림 박재동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후에도 나는 달만은 버리지 못하고 늘 함께 살았다. 새벽 예불을 위해 산사의 경내를 돌며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다가 산 위에 걸린 달빛에 취하여 그만 염불을 놓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늘 하는 독경이 싫증나서 불경 대신 위의 시 ‘내 사랑은’을 목탁에 맞추어 낭송(?)하기도 했다. 까닭없이 마음이 많이도 아팠던 20대 시절에 나는,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꽂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주문처럼 읊고 또 읊어댔다. 그래서 언젠가는 달빛 젖은 조약돌 하나를 건져 내 볼에 대어 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달이 그토록 뜨거운 줄을 알았다.
하지만 달은 뜨거운 것만 아니었다. 태양처럼 눈부셔 바라보기 힘든 게 아니라 마음 내키는 데서 마음내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편안한 대상이다. 그래서 달빛으로 세상 읽기가 가능하다. 하얀 달빛은 온 누리를 맑고 은은하게 정화해준다. 손님처럼 찾아온 번뇌가 묻은 마음바탕을 깨끗하게 헹궈준다. 굳이 특별한 세탁소를 가지 않아도 무겁고 축 늘어진 번뇌의 옷을 깔깔하게 말려준다. 이렇게 보자면 달은 우리 삶과 의식의 심층구조이자 랑그*이자 시니피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절집에서는 달을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경전에서도 선시에서도 달의 대목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호탕무애한 도심道心의 세계를 달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대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물 밑을 뚫어도 물결 하나 일지 않네月穿潭底水無痕 -야보 도천
여기에서는 세상에 어떤 일에도 마음 기울지 않고 마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를 달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이웃을 위해 연민과 자애의 마음을 나누더라도 그 마음은 늘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는’ 그런 무심과 무욕의 바탕에 서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비리고 비운다는 건 바로 텅 빈 충만이다. 이 텅 빈 충만이 물결 하나 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요즘은 산중에도 사람들의 방문이 많아졌다. 번잡한 일상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고자 산사에 머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오니 달을 보게 되네요.”
나는 그들의 말과 표정에서 애틋한 감회와 씁쓸함을 읽는다. 아니, 서울에는 달이 안 뜨나?
그런 것 같네. 달은 어디에도 있는데, 달은 보는 사람에게만 뜨는 것이었네. 정말 그렇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달은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네.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어떤 신비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삭막한 서울일지라도 조금만 눈을 주면 길가의 가로수를 볼 수 있고 골목길의 담쟁이넝쿨을 볼 수 있다. 집 앞에 화분으로 가꾼 배추와 고추도 볼 수 있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그것들에 눈을 주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그것들은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 유정무정의 모든 생명은 이렇게 눈으로 연결되어 한 호흡으로 숨 쉬고 있다.
* 랑그(langue) :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그 사회에서 공인된 상태로의 언어를 의미한다. 곧 언어능력에 해당하고 음악 연주에서 악보에 비유된다.
** 시니피에(signifié, 記意): 기호에서 어떠한 것의 본래 성질(개념)로, 예를 들어 ‘나무’라고 했을 때 그 의미 ‘木’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무’라는 말(청각영상)은 시니피앙(signifiant, 記標)에 해당한다.
첫댓글 달은 어디에도 있는데, 달은 보는 사람에게만 뜨는 것이었네. 정말 그렇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달은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네.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어떤 신비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윗글에서 ,,,
대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물 밑을 뚫어도 물결 하나 일지 않네月穿潭底水無痕 -야보 도천
달빛을 밟고 걸어간다...좋은데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보고갑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