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밤이다. 어둠 속에서 벨이 울린다.
80년대의 벨소리 집 전화이다. 내 휴대폰은 이틀 째 꿀 먹은 벙어리였기에.
깜박 화장실의 변기 속에 빠트리고는 건저내서 빨래처럼 널려있다.
전화를 받으니 내가 부장으로 있을 때, 과장이었던 동갑내기 이완직씨이다. 그는 신동아 건설 자체 사업 담당 과장으로 있다가 차장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울 방학동이나 인천 주안에 있는 신동아 건설의 로고가 붙은 아파트는 그가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쳐서 사업 승인을 받아 이룩한 그의 성과였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심상치 않은 일이다.
무슨 큰 일이 있냐하니 그의 말은 내가 휴대폰 하나 없이 딱한 처지가 되지않았냐하는 걱정이 듬북이다.
그가 전하는 말을 들으니 내가 큰일은 커녕 전하는 소식이 큰일이다.
둘이 함께 근무 할 때, 주택사업 본부를 지휘하던 우리의 대장이었던 상무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알림이다.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슬프다. 미운 사람이 죽어 슬프고 착한 사람이 죽으면 슬프고, 존경했던 상사의 부인이 그런 불행을 당하면 더 슬프다.
시간은 밤 10시, 발인은 다음날 아침. 잠자고 있던 내 휴대폰으로 안면이 있던 연줄들이 전화를 몇 통화 걸고 포기를 했으나 한 때는 과장 부장 사이로 맞먹기도 예사였던 동갑네 완직씨가 돋보기를 쓰고 수첩을 두져 내 집 전화번호를 챙겨 전화를 거느라 고 수고했다.
심장병 앓던 상무의 부인은 오늘 내일 하다가 드디어 간병 10년의 남편을 두고 갔다.
삼성 병원 장례식장 17호실을 가는 동안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마치 교통지옥 아침 출근시간처럼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있다.
삼성병원의 영안실은 시신들로 가득 차서 영안실 여기저기를 찾는 문상객들이 앞서고 뒤서서 이랬다.
상무는 평복으로 문상객들 틈에서 나를 보고 반긴다.
김명현씨, 그는 서울시 재개발 초기의 회사 실무자였다.
내가 과장으로 극동 건설에서 재개발 사업을 담당할 때 그는 우성 건설의 재개발 부장이었다.
내가 신동아 건설의 재개발 사업 담당 부서장인 차장이었을 때, 그는 우성건설의 재개발 담당 이사였다.
내가 신동아 건설 개발 사업부장일때 그는 신동아 건설 주택사업부의 상무로 왔다.
내가 극동이나 신동아에 있을 때, 그는 참으로 약둥이처럼 자기 회사인 우성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다.
다른 회사의 직원들의 뒤통수를 치던 일도 곧잘 해서 함께 공동 사업을 하던 사당동 재개발 사업장에서는 우성의 김 이사라면 고개를 절래 절래 돌렸던 이였다.
그가 내 상관으로 왔을 때, 사실 내 감정을 미묘한 갈등을 겪었었다.
그런 감정은 잠시였다. 그는 부하를 아껴주고 재개발로 큰 중역답게 재개발의 어려움을 다른 부서의 장들에게 강조하기를 “자체 사업은 초등학교 과정이라면, 재개발 사업은 대학원 과정이다. 그만큼 어렵다. "
할 정도였다.
사당동 재개발 지역은 도시게릴라전쟁이었다.
철거반원과 세입자들의 싸움은 시가전이었다.
세입자들은 신문지에 식칼을 들고 골목을 돌았다.
철거반원들은 달려드는 아줌마들을 군화로 걷어차기도 했다.
가난한 자들과 가난 자들의 싸움이었다.
그 일의 뒤에 있는 실무부서장인 나 자신도 그들 못지않게 딱한 처지이니 운명의 굴레 속에 묶인 우리들은 돈을 벌려고 모여든 투기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다.
회사에 널린 사업장은 수십 군데이고, 곳곳마다 늘 화약고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상무는 미세혈관폐쇠로 듣지도 말도 못하는 증세로 한 동안 병원 생활 뒤 회사를 그만두었다. 병세가 나아졌을 때는 유원건설 전무로 갔다. 그 회사는 시청 바로 옆에 있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 그의 차지였다.
그곳에서 다시 얼마 안되 그만두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다.
병든 아내를 간병하랴. 아직 남은 자신의 병을 다스리러.
그 뒤 세월은 산골 흐르는 물이 바다로 가듯 흘렀다.
상무도 흰머리요, 나도 반백이 되었다. 서른 마흔의 젊음은 서로 육십 대가 된다.
사람들은 만나면 묻듯 그 또한 요즘 무엇을 하냐 묻고 요즘 뭐한다는 내 말에 한 바탕 웃음도 반갑다.
거기서 한 때 내 아래 과장으로 있던 직원이 지금은 건설 상무가 되어 자신을 신동아로 데리고 왔던 상사의 부인을 문상 왔으니 물갈이 된 현실이 꿈인 듯 와있다.
나는 젊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형편의 집에 살지만 그는 운을 잘 타서 타워 팰리스에 산다니 현역 젊은 상무에게 대단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초라해진다. 그는 어떻게 돈이 자라고 모이고 어떻게 이름 값하는 그곳을 산다는 등. 돈 운이 저를 따라왔다는 등 , 이제 초등학교 2학년짜리에게 뮤지컬이 오면 첫날 첫 회를 보여준다는 등. 나는 한 번도 꿈도 못 꾸었던 아빠 노릇을 하는지 모범답안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문득 내 자식에게 얼마나 부족한 아빠인지 반성을 한다.
이렇게 몇 년 만에 전 직장 동료들이 모이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구분이 뚜렷해져 가지고 있는 집과 현재의 직위가 현재의 기준이 된다. 만나서 반가운 것은 잠깐, 얼마나 부질없이 자기 비하가 되는 것이냐. 내게는 젊기만 한 그도 이제는 오십이 넘지만 아직 젊은 상무는 내게 “형님 같이 글 쓰고 책 보는 생활이 부럽습니다.” 하는 말이 진담 반 농담 반같이 들린다.
왔던 세월 속에 요령 있게 건사를 했으면 약간의 돈을 챙길 수도 있었으련만, 그 돈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일만 향해 나섰던 일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내가 바보이다.
훈장을 받을 일은 없어도 열심히 살아 온 것을 어찌 현재의 부귀와 비교하랴.
내가 모셨던 늙은 상무는 열심히 살았되 지금 가난하며 나 또한 그렇다.
이제 늙은 몸이 되어 아내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외롭고 정이 그리우랴.
" 당신에게 연락을 꼭 하라고 했어. 보고 싶어서."
사람은 자신이 외로울 때나 죽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진정의 사람이다.
그 중 나도 뽑힌 사람이니 이게 행복이다.
부와 명예가 어디 내게 가당하랴.
찾는 이가 있어 그의 슬픔을 함께 하는 이 밤이 행복이지.
" 어디 한 번 찍어 봅시다. "
하며 나는 들고 간 디지털 카메라로 늙은 상무의 아우에게 늙은 상무와 늙은 부장인 나와 한때는 과장이지만 지금은 젊은 상무, 이렇게 셋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한다.
이제 언제 또 만날까 하는 마음과 함께.
나중에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늙은 상무의 약속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