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7편 피안(彼岸)>
①어느 날갯짓-13
“자꾸 누구한테 묻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 끌지 말고, 당신이 한 대로만 말해요?”
“포장마차에도 니 자리, 내 자리가 있던가요?”
그는 연신 원론적인 말만 되뇔 뿐이었지, 자기가 저지른 일은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순경이 다시 주의를 주었다.
“하-아! 여봐요! 당신이 나이 먹어가지고, 자꾸 이런 식으로 뺀둥거리면, 정말 폭행죄, 영업방해죄 줄줄이 걸어서 서(署)에 넘길 거야. 당신 전과자 아냐? 말 안 들으면 조회할 거니까, 바른대로 말해요!”
순경이 그에게 엄포를 놓자, 그가 또 구시렁대었다.
“폭행은 내가 맞았는데, 무슨 폭행?”
그의 왼쪽 턱밑부위가 전등불빛으로 나타난 그림자인지는 모르되,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그가 제대로 입을 놀리지 못하는 거도 알고 보면, 그 때문이지 몰랐다.
그때 천복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방금 자리가 비좁다고 했으나, 긴 의자에 우리 부부만 한쪽으로 앉았을 뿐인데, 열 명은 더 앉을 여유가 있었고요, 또 지금 오히려 자기가 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주먹질하는 걸 내가 막자, 제 김에 넘어져 의자에 부딪친 거예요. 말은 바로 해야지!”
천복은 그 치가 하는 짓이 폭행당한 일을 뒤집어씌울 게 분명하여 미리 말하였으나, 취조하던 순경은 알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한사코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치가 계속 뺀둥뺀둥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특단의 조치라도 취하는 듯이 말하였다.
“자,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피해자가 진술한 내용을 확인할 터이니, 분명하고 확실하게 대답해요. 알았소?”
그러자 그 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피해자가 방금 ‘야, 이년아! 말해봐! 내가 문둥병환잔가?’라고 당신이 말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옆에 사람이 앉는데 도망치니까, 기분 나빠서 한 소리요.”
“하-참! 기분이 나빴던지, 했으면 했다, 안 했으면, 안 했다고만 말해요. 했소?”
“했소.”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머리를 숙이었다.
“다음은 당신이 먼저 ‘잇 짜식이!’하며, 주먹을 날렸다는데, 맞소?”
“주먹을 쥐고 날리긴 했지만, 때리지는 않았어요.”
“무슨 말이오? 지금 내가 묻는 말은 주먹을 날렸느냐, 안 날렸느냐는 말이오. 때리지 않은 건 못 때렸지, 당신이 안 때린 게 아니잖아요?”
“...!”
그 치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고개만 어슴푸레 끄덕이고 있었다.
“고개만 끄덕일 게 아니라, 말로 해요. 말을.”
순경이 다그치자, 그는 또 희미하게나마 대답하고 있었다.
“예.”
이밖에도 몇 가지를 더 묻고, 간단하게 조서작성을 마친 순경이 말하였다.
“쌍방이 크게 다치거나, 손해가 발생한 건 아니니, 일단 돌아가고, 뒤에 조회하여 전과가 들어날 경우에는 다시 소환할 터이니, 그런 줄 알고, 각자 돌아가요!”
순경의 말에 천복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와 보니, 매화가 지서 출입구 한켠에 나무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복이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가요.”
매화가 천복의 팔에 손을 찌르자, 그네는 곧장 역사대합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벽차를 타고, 곧장 성환역에서 내리어 자매수예점으로 돌아왔다. 이제껏 말이 없던 매화가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싸움꾼인가 봐요? 그 사람도 쌈패 같던데요?”
“보나마나, 폭력전과자야. 아무러면, 사십대가 이십대를 이기겠어?”
“한밤에 그런 깡패들 때문에 기분이 잡쳐요. 모처럼 나가 꿀맛 같은 술 한잔하다가 봉변당했어요. 당신 고생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천복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고생하였다는 거였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지.”
이렇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매화가 이브자리를 꺼내어 편 뒤는 전등불을 끄고, 서로 마주보면서 누웠다. 그런데 모기장 문으로 먼동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매화는 팬츠만 걸치고, 남자에게로 달리어들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팔베개를 빈 채 꼭 끌어안고, 힘을 주었다.
오늘밤이 지나고 헤어지면, 언제 또 다시 만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남자가 팔베개를 비어주자, 죽은 듯이 남자의 품을 파고들어 바스댐 없이 그 참 잠으로 빠지어드는 거였다.
세상에 행복이란 언제나 짧게 끝난다는 걸 천복은 알고 있었다. 꽃이 활짝 피면, 공교롭게도 비바람이 몰아치었고, 열매가 튼실하게 맺고, 무르익어갈 무렵에는 태풍 폭풍이 몰아치어서 심술궂게도, 나뭇가지를 뒤흔들어놓고는 하였다.
첫댓글 지서에서 조사 받는 과정에도 천복이 침착하게 자신의 정당방위였슴을 일사불란하게 진술하는 걸 볼 때 역시 천복은 판검사를 해도 적격이지 싶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 치가 쏫아놓은 무례한 말들 조차도 온전히 기억을 못하거나 기억이 나도 진술을 꺼리거나 포기하고 말 수 도 있겠지요. 일단 자신이 그 치를 한 번 때린 사실도 있으니 의기소침할 수도 있구요 ㅎ
그렇습니다. 서울대만 나왔다면 천복이 명판사는 될 건데 아깝지요.
그래서 운명이야기가 이따금 나오고 인연이란 자체가 운명의 사슬일지
모르고요. 선손질은 그 치가 했지만 고의였던 아니든 그의 팔꿈치가 그의
턱을 가격했으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 수도 있지요. 암튼 천복의 사리판단은
명확합니다. 하기에 그가 틈을 타서 정당방위를 말함으로서 뒤에라도 그의 팔꿈치
가격이 드러나더라도 아리바이가 성립되겠지요.
대우님께서 잘 보신 겁니다. 바로 그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