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흔한 말로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한 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 둘 딸이 워싱톤 주립대에 갈수 있었던 것도 미국에 그것도 워싱톤 주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 했을지도 모릅니다.
워싱톤 주립대에 대한 평가가 종종 신문이나 학술평가지에 보면 세계 상위권 안에 들고 미국에서도 상위안에 드는 명문 대학으로 서울대가 세계 80위권 인 것을 보면 과연 우리 애들이 한국에 있었으면 이 대학을 갈 수 있었겠나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미국 대학은 소수 민족 비율과 현지 거주인과 유학생 비율을 정해 놓고 학생을 뽑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가능했을 겁니다.
대학도 유지와 돈이 필요해 유학생을 많이 뽑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현지 학생들이 입학하기가 힘들어 졌다고 하네요.
왜냐면 현지인 보다 유학생의 등록금이 훨씬 비싸니깐요.
하여간 큰 두 딸들은 자기 앞길을 잘 헤쳐 나갔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모든 자식들이 무난한 건 아닙니다.
막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셋 딸 중에 가장 착하고 온순한 아이였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 했습니다.
미국도 학군이 있습니다.
한국 계신 분들이 미국에 어디가 어느 학군이 더 좋은지 더 잘 알고 오기에 제가 그 에 대한 언급은 안 하겠습니다.
처음 저희는 린우드에 정착을 했습니다.
거기에 모 고등학교가 있어 입학 신청을 할 려니 그 학교는 ESL 반이 없어 막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기에 결국은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고등학교가 미국 내 에서도 알아주는 유명 고등학교 더군요.
저에 여동생이 시애틀에 살고 있는 지 오래 되어 동생이 일부러 한국인이 없는 학교로 막내를 보냈는데 그것이 막내에겐 힘들었 던 일이였나 봅니다.
언어 안 돼 친구 없어 공부 재미없어...
나중엔 그것이 학습 포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 장거리 트럭일을 하고 있었고 큰 애는 멕시코에 둘째는 커뮤니티 컬리지에 집 사람은 낮에는 식당에 밤에는 카페에 주방에 일을 하기에 막내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장거리 일을 하다보면 문자로 학교에서 연락이 옵니다.
막내가 몇 째 시간 몇 째 시간을 빼 먹었다.
오늘 수업에 참석 안 했다.
그러면 제가 집으로 연락을 합니다.
막내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합니다.
학교에 갔는데 왜 그러느냐고.
전 집사람만 뭐라 할 수 밖에 없었지요.
둘째는 저를 닮아 성질이 못 되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어찌 하냐고 투정이고 막내는 언니 말은 듣지도 않는 가 봅니다.
둘이 많이 싸웠다 하네요.
결국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청청벽력 같은 소리지요.
학교 수업 일 수가 부족해 학년을 올라 갈 수 없다 하여 한 해 더 다녔는데 그 다음 해엔 나이가 오버되어 학교에서 더 받아 줄 수 없다고 커뮤니티 컬리지에 가면 고등학교 졸업 학점을 주는 제도가 있어 그 과정을 인수하면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니 그리로 가라고 안내를 하더군요.
허나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를 안 하던 아이가 거길 간다고 공부를 하겠습니까?
수업료만 날리고 학교는 안 가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제가 일을 안 하면 집안에 들어가는 돈이 김당이 안 되니 전 엉망이 된 막내를 보고 길을 떠나 곤 했습니다.
그 사이 집사람이 말 못 할 아픔을 많이 겪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처음 미국에 와 트럭을 사긴 했어도 미국 회사에서 경험이 없다고 안 써 주니 제 회사를 만들어 일을 할 수 밖에 없어 트럭 보험료가 월 1200 . 트럭 할부금이 1000. 큰 딸 혼자 멕시코에 있으니 하숙비와 학비 2000 ~ 2500 . 아파트 비 1300 . 자동차 필요하니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1000 ,생활비 및 유틸리비 1000 학비 500~1000 . 이러다 보니 월 7000 ~8000 불이 필요 했습니다.
미국에 처음 오면 크레딕이 없어 무조건 비싸고 돈 많이 듭니다.
그러니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 집에서 쉴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제대로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 길을 떠납니다,
결국 막내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식당 서빙으로 나섭니다.
나 공부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 모습에 손이 몇 번 올라갔지만 차마 때리지 못 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뉴욕을 가겠다고 나서는 막내.
전 여기서 유학 온 학생들이 부모 손을 떠나 얼마나 자유 분망하게 사는 지 그 모습을 보아 왔기에 반대를 했지요.
부모 밑에서도 공부를 안 하는 게 뉴욕 가서 뭘 할려고 하느냐고요.
식당에서 안 언니가 뉴욕 가서 암웨이 다단계 사업을 한다고 자기도 따라 가 성공해서 온다고 ...
어이가 없어 극구 말렸지만 끝내는 저 몰래 뉴욕으로 도망 아닌 도망을 갔습니다.
전 막내는 없다고 포기를 선언 했습니다.
2년 동안 연락도 안 하고 제 앞에선 막내 말도 못 꺼내게 했습니다.
그 당시 저 땜에 시애틀로 온 “설도”란 친구 부인에게는 자기 마음을 털어 놓고 상담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럴 땐 부모보다 남이 나은 가 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집사람은 중간에서 마음고생이 컸었 던 것 같습니다.
미국서 날고 기어도 사업 성공하기 힘든 데 나이 갓 20 살 짜리가 무슨 사업을 하겠습니까.
뉴욕가 죽도록 고생만 하고 결국 집에 올 비행기 표도 없어 집사람이 비행기 표 끊어 줘 2년 조금 넘어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뭐 총책임자 아줌마가 다이야 몬드라 하나요 그 사람 집에 있으면서 일만 하고 심부름 죽도록 하다가 그 아줌마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오고 갈 때 없으니 집으로 오게 된 겁니다.
인생 공부 잘 했지요.
아무리 속을 썪여도 부모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봅니다.
집에 돌아 온 자식 쫓아 버릴 수도 없고 전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었지요.
그래도 눈앞에 있으니 안심이 되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전 전혀 간섭 안 했습니다.
언니들은 동생을 무시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미국서 한국사람 식당에서 평생 먹고 살거냐 정신 차려라 하며 어울려도 막내만 빼고 둘이 어울리고...
그 걸 보니 부모 마음이 안 좋더군요.
그래서 큰 애들을 뭐라 하면 창피하다고 말이 안 통한다고 싫다 합니다,
나 원 참 같은 배에 떨어진 자식 형제도 그러니 남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시간이 될 때면 막내를 설득하고 먼 훗날 후회한다고 정신 교육을 시켰지요.
애가 착해 그런 말에는 순응을 하고 말을 잘 듣는 데 할 일 없으니 종일 들어 앉아 컴퓨터와 음악 밖에 안 듣고 있으니 부모로서는 속 터지지요.
어쩔 수 없이 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밴드 동호회에 나가 밴드 활동을 하다 보니 젊은 층에서 노래 부르는 친구가 성실하고 참해 보여 어느 날 그 친구에게 물어 봤습니다.
여자 친구 있냐고,,,
없다 하데요.
그래서 막내를 밴드에 데리고 나가 소개를 시켜 주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애들은 남자만 소개 시키면 남자 혼을 빼는지 금방 남자애들이 반해 버리데요.
막내도 소개 시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느 날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겁니다.
결국은 지금에 막내 사위가 되었지만요.
그렇게 공부 하라고 할 땐 안 하더니만 신랑이 권 하니 지금은 커뮤니티 컬리지에 고등학교 이수반에 들어 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막내가 지금은 그럽니다.
엄마 아빠 나 끝까지 포기 안 하고 기다려 줘 고맙다구요.
이제 철이 조금 든 거지요.
공부는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열심히 하라고 말 합니다.
미국 온다고 모든 자식들이 부모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 못 하고 때를 놓쳤다고 인생마저 포기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유명한 사업가 어머니는 공부 못 하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넌 공부에 취미가 없으니 열심히 사업을 배워라. 네 친구들이 저리 열심히 너를 위하여 공부를 하니 훗날 너에 회사에 일을 시키면 된다고요.
어머니가 준 용기에 그는 지금 세계 굴지의 사업가가 되었다구요.
미국에 와 친구 잘 못 만나면 마약에 빠질 수도 있고 갱단에 가입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게 꿈처럼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부모들 극성이 또 한국 민족의 우수성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빛을 발휘하는 예가 많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미국에 한국인 2세든 1.5세든 미국에 와 군인으로 별을 단 사람이 몇 명 있더군요.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야전군 사령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아직도 인종 차별이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겁니다.
결국 큰 회사 국가 기관 등등 고위직엔 아직은 소수 민족에게 안 맡긴다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 이민 와 부자 소리 듣습니다.
다른 이민자들도 그리 생각 합니다.
이민 와 한국 사람들은 거의 개인 비즈니스 하니 돈을 벌 수 밖에요.
그것이 눈앞에는 좋을지 몰라도 미래에는 결국 지배 당하는 입장이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나라 이민자들은 사업 할 돈 없으니 공공기관이나 기업 화사원으로 취업 길을 돌리는 예가 많습니다.
물론 그 나라에서는 영어권에 있어 한국사람 보다도 영어권에 들기 더 쉬운 장점도 있겠지만
결국엔 우리가 그들 밑에 놓이게 됩니다.
큰 사위 마이크로 소프트 다닐 때 메니저가 거의 인도 사람들 이라 하네요.
물론 인도가 아이티 분야에 강한 면도 있지만 오자마자 그 쪽 길로 달려든 결과이고
일반 시나 주 국가기관에 가면 동남아 월남 필리핀 사람들이 많고 중국 사람도 종종 보입니다. 그러나 한국사람 못 봅니다.
우리가 한국사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공공기관은 오직 우체국입니다.
결국 사업장 검사 인허가 받을려면 그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지요.
물론 돈 버는데 의사 최고 사업가 최고 부동산 업자 최고이지만 미국에 지배층에 있을려면 미래를 생각해 자식들 국가 기관으로 많이 보내야 한다는 거지요.
제 개인적 생각으로요
그래야 어쩌다 한국사람 주 상원위원 한 명 되었다고 신문에서 난리치고 연방정부에 고위급에 올라가면 한국 신문 방송에서 조차 난리치는 그런 일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날이 되어야 된다는 거지요.
아마 그럴 날 오리라 확신 합니다.
미국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엔 그저 튼튼한 몸과 성실만 있었으면 되었지만 이젠 옛 말입니다.
제가 9년 전 왔을 때 하고 지금 하고 많이 다릅니다.
이젠 변화도 예전보다 더 빠르게 온 다는 거지요.
지금 시장 잠식을 소련 인디아 중국 사람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여럿이 모아 한 주유소를 사고 그 주유소에서 돈 모아 또 다른 주유소 사서 동업자 에게 주고...그렇게 사업 늘려 가고 인도 사람이 주유소 하는 데 가 보면 인도 트럭들 바글바글 합니다.
그 만큼 단합 잘 된다는 뜻입니다.
중국 사람들 벼락 부자 많아 여기 벨뷰에 비싼 집들 몇 백 만불 짜리 집 건물 현찰로 싹 쓸이 하는 실정입니다.
점점 집 값 오르고 렌트비도 엄청 비쌉니다.
자식들 때문에 미국 온다는 구실로 엄청 비싼 댓가 치르는 사람들 많습니다.
되도록 E-2로 오지 마세요.
E-2로 와 정말 많은 고생하고 다른 길 찾아 신분 변경하는 사람 많이 봤습니다.
그럴려면 엄청 돈 많이 까 먹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조금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제대로 된 신분으로 오길 바랍니다.
난 아니겠지 하면 안 됩니다.
자식 공부도 나의 사업도 신분이 되면 훨 수월 합니다.
다음엔 제 트럭 수입과 트럭 일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속아 미국 와 고생하는 사람들 신분 때문에 떠돌이 생활하는 한국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밴드 연주에 마추어 ..
집사람과 막내 그리고 사위 저 입니다
막내 결혼식은 야외 결혼식을 했습니다. 막내 사위 고모부님이 큰 농장을 해서 그 집 마당에서 제가 활동했던 밴드 와 함께 저렴한 결혼식을 했습니다.
이번 결혼식은 완전 미국 식 입니다. 케더링에 지인들 모셔놓고 재미있게 춤 주며 말 그대로 축제처럼 했습니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에 깡통 달고 결혼식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신랑은 제 손님 여자분과 신부는 제 손님 남자분과 돌아가며 춤을....
마지막 하일하이트..
제 모습 한 컷트
|
남보다 뚜렷하게 잘 난것은 없지만 착하게 살아 주었으니 그걸로 만족 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있으시길 바래요!
감사 합니다
ㅎ 많은 스토리가 있었네요...ㅎㅎ 설도님은.. 자주 .. 다른 카페에서 ..글 보고 있습니다..ㅎ
요새는 설도하고 연락이 뜸 합니다
잘 있다는 소식은 듣구요.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요. ㅎㅎ
이 글을 보고 미국이민에 대한 안목이 조금이라도 넓혀진 기분입니다. 만만치 않은 생활속에서도 포기하지않고 이겨내신 점에 큰 감동을 받고 갑니다. 부디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시길 빌게요.
사진을 보고 느낀거지만.. 미국은 정말 이렇게 자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다는거 너무 좋은거 같아요. 이런 결혼식.. 너무 부럽습니다 ㅠ
감동입니다 저도 3남매를 두고 있지만 서로 생각이 틀려서 많이 힘든경우도 있었습니다